“지난 10년 동안 가장 큰 변화는 K팝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표출한 것이다.”
빌보드 K팝 칼럼니스트 제프 벤저민은 이제 K팝이 세계 속 한국문화를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월 14일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의 ‘한국이미지상’ 시상식에서 한국 이미지를 외국에 알린 공로로 ‘징검다리상’을 받은 그는 K팝은 물론 한국문화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당당하게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은 현실을 눈에 띄는 큰 변화로 지목한 것이다.
‘한류’라는 키워드를 간판으로 내걸며 가요와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만들어낸 문화 창작물을 세계에 알려온 국내 문화예술계의 노력은 세계적인 인정을 받으며 점차 더 많은 결실을 맺고 있다. 하지만 국내의 시선만으론 아직도 한국의 이미지와 한국문화의 경쟁력이 어느 수준에 올라와 있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할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기도 하다. CICI가 해마다 발표하는 ‘한국 이미지’ 설문조사는 한류에 대한 열광과 비판에서 한 발짝 떨어져 냉정하게 한국의 대외적인 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방탄소년단과 영화 <기생충>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문화를 한국인과 외국인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단초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문화를 경험해본 외국인 여론 주도층과 함께 국내 여론 주도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CICI의 2020년 한국 이미지 조사결과를 보면 가장 확고히 자리 잡은 한국의 문화코드로 K팝이 가장 먼저 꼽혔다.
CICI의 2020년 한국 이미지 조사 결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칼군무’에 전 세계가 사랑에 빠졌다. K팝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칼군무’라는 설문결과가 나왔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관해 가장 많이 검색한 키워드는 ‘K팝’(84.7%)으로 한국인들이 같은 주제에 대해 검색한 비율(64.9%)보다 훨씬 더 높게 나타났다. 그다음 인기키워드였던 ‘한반도 주변 정세’(한국인 48.1%, 외국인 48.0%)에 대해선 국내·외의 비율이 비슷했던 것에 비하면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K팝이 인기를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절도있게 딱딱 맞아 떨어지는 ‘칼군무’가 인기 요인이라는 응답(한국인 77.8%, 외국인 84.7%)이 가장 많았고, 이어 아이돌의 외모(한국인 37.7%, 외국인 53.7%)를 꼽는 비율도 높았다. 앞으로도 K팝이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혁신적인 음악’(한국인 61.9%, 외국인 92.6%)과 함께 ‘탄탄한 실력’(한국인 71.1%, 외국인 72.0%)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K팝을 듣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입지가 다져졌기 때문에 이젠 K팝 외연을 확장하기보다는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것이 CICI 측의 분석이다.
제프 벤저민 역시 이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K팝이 인기를 끌기 전부터 줄곧 변화와 활약상을 지켜보며 해외에 K팝의 매력을 일찍부터 알려왔던 그는 한 예로 10여 년 전 보아와 원더걸스 등이 미국시장 진출을 시도한 때를 언급했다. 당시 이들의 노랫말에는 영어가 다수 포함돼 있었지만 “K팝이라는 장르나 이들의 배경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방탄소년단이 앨범 ‘러브 유어셀프 결: 앤서’를 발표한 2018년이 되자 무대에서 한복을 입고 한국적 요소를 적극 내세우는 것이 더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벤저민은 “방탄소년단은 미국에서 활동할 때 더 이상 한국에서 온 아티스트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각시킨다”며 “타이밍을 잘 활용해 대중의 관심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마케팅이 K팝을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에 적합한 장르로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K팝 이외의 다양한 한국 음악도 해외에서 먹힐 가능성이 커질까.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의 음악시장은 내부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크게 성장했지만 스포트라이트 대부분이 K팝에 한정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벤저민은 자신과 함께 한국의 감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해 ‘부싯돌상’을 받은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을 언급하며 “재즈를 비롯해 록·댄스 음악에서도 한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복 입고 한국적 요소 적극 내세워야
“20년 전엔 프랑스의 소도시에 가면 저를 굉장히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포카혼타스’(애니메이션 캐릭터)냐고 물어봤는데, 지금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한국말도 들을 수 있다.” 나윤선은 25년 전부터 프랑스에서부터 재즈를 부르며 음악 인생 초기를 보냈다. 당시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변방의 신인가수에 불과했던 나윤선은 현재 해마다 세계를 돌며 100회가 넘는 공연에 초대받을 정도로 ‘한국 재즈’를 알리는 스타가 됐다. 지난해 11월에는 프랑스 정부의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과거엔 클래식을 제외하면 한국 뮤지션들의 활동을 좀처럼 보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다양한 활동을 많이 볼 수 있게 됐다”며 “좋은 음악의 감동은 국적과 국경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나윤선 역시 한국의 정서가 담긴 재즈 보컬이 오히려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요인 중 하나가 됐다고 고백했다. 재즈의 인기가 높은 프랑스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재즈가 미국 음악인 줄 알았으면 미국에 갔을 텐데, 그 정도로 난 재즈를 잘 몰랐다”고 솔직히 말한 그는 “누구의 흉내를 낼 수도 없었던 탓에 한국 가요나 국악 등 은연중에 들은 한국 음악을 자유로운 음악인 재즈 안에 녹여내다보니 그걸 잘 봐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정화 CICI 이사장은 “그간 CICI에서 두 차례 상을 받은 분은 지휘자 정명훈, 가수 싸이밖에 없었다”면서 “재즈를 통해 한국의 감성을 세계에 알린 공로가 크다”고 나윤선을 높게 평가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문화예술이 보다 더 국제적인 반열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과제도 적지 않다. 아이돌이나 특정 예술인을 통해 알려지는 한국의 이미지가 앞으로도 큰 역할을 할 것임은 분명하지만 보다 다채롭고 인간적인 색깔을 입힐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벤저민은 “현재 한국에선 아티스트보다 산업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는 경향이 있다”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고민은 무엇인지, 또 팬들과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하면 팬들로부터 긍정적 반응을 얻고 신뢰를 구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