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일러’도 은행 돈 빌릴 수 있다

금융거래 부족한 주부·사회초년생 20만명 7월부터 신용등급 재조정

사회초년생 ㄱ씨(29)는 적은 월급이지만 꾸준히 저축하고, 과소비를 막기 위해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를 썼다. 공공요금을 연체한 적도,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린 적도 없었다. ㄱ씨는 월세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1금융권인 시중은행에 전세자금 대출을 문의하러 갔다. 당연히 대출 가능한 높은 신용등급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총부채상환비율 제도가 시행된 첫날인 2018년 1월 31일 서울시내 한 은행의 대출창구에서 고객이 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연합뉴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의 신용등급은 5등급으로 나왔다. 신용등급은 통상 1~10등급으로 구분된다. 5~6등급으로 분류되는 사람은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은 자영업자나 신용거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은 사회초년생, 주부 등이 해당된다. ㄱ씨는 2금융권인 저축은행의 대출을 알아봤지만, 시중은행의 1.5배에 달하는 고금리(이자)를 내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

빠르면 오는 7월부터 ㄱ씨 같은 사회초년생도 시중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된다. 단, 휴대폰 등 통신요금과 공과금을 6개월 이상 연체 없이 잘 내고, 휴대폰 소액결제와 온라인쇼핑 거래내역 같은 비금융정보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예컨대 온라인쇼핑몰에서 주기적으로 물건을 사거나 공공요금을 잘 냈다는 증거내역이 있다면 신용등급을 올릴 수 있다는 의미다.

공과금 연체 없고 소액결제 문제 없어야

금융권에서는 ㄱ씨 같은 사람을 ‘신파일러(Thin filer·금융이력 부족자)’라고 부른다. 신용평가 시점 기준으로 최근 2년 내 신용카드 사용이력 및 3년 내 대출 경험이 없는 사회초년생·주부·고령층 등이 해당된다. 이들의 규모는 지난해 9월 기준 1300만여명에 달한다.

신파일러는 ㄱ씨처럼 신용도가 양호해도 금융거래 이용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금리 선정과 대출 등 모든 금융거래에서 고비용을 부담하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신용평가에 반영되는 비금융정보가 신상정보(직장 등)에 한정돼 있고 반영 비중도 15.4%에 불과해 금융 소외계층의 신용도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회초년생 등 금융 소외계층의 신용도가 차등화되지 않고 대부분 중위등급(4~6등급)을 부여받는다. 금융당국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신요금과 휴대폰 소액결제, 온라인쇼핑 거래내역 등 비금융정보를 활용한 재평가 절차를 도입, 신용도가 양호한 금융 소외계층이 시중은행 대출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개선할 예정이다.

개인의 신용도 평가 시 금융정보가 아닌 비금융정보를 이용하는 ‘대안신용평가’는 금융상품이나 서비스를 적게 이용한 사람의 신용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도입하는 제도다.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이 이 같은 제도를 올해 하반기부터 도입한다. 다른 시중은행은 2020년부터 순차적으로 도입할 예정이다. 금융감독원은 이번 제도로 ㄱ씨처럼 신용이 양호함에도 대출이 거절된 신파일러 중 약 20만명이 시중은행에서 대출을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취업·승진 시 대출금리 인하 요구도 가능

신용등급은 금융 신뢰도를 보여주는 ‘금융 신분증’으로, 모든 금융거래의 기초가 되지만 관리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통상 소득이나 재산이 많으면 신용등급이 높을 거라고 막연히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소득이 높아도 금융거래 이력이 없거나 금융거래 이력에 연체 등 흠집이 있으면 신용등급이 낮아진다. 떨어지기는 쉬워도 올리는 건 어려운 게 신용등급이다. 연체를 경험한 사람은 향후에도 연체할 가능성이 높아 연체를 상환해도 연체 이전의 신용등급으로 바로 회복되지 않는다. 연체상환 후 성실한 금융생활을 꾸준히 해야 신용등급이 서서히 회복된다.

재테크 전문가들은 “신용등급 확인이 신용등급 관리의 시작”이라며 “청년기부터 신용등급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는 비금융거래를 관리하는 습관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신용등급은 각 신용조회회사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확인하면 된다. 연 3회에 한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앞으로 금융당국과 신용조회회사(CB)는 공공요금 성실납부자에 대한 신용등급 가점폭을 대폭 확대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휴대폰 요금 등 공공요금 성실납부 시 신용등급 가점이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특히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 등 금융거래 실적이 많지 않아 신용정보가 부족한 사람일수록 이 같은 정보를 활용하면 유리하다. 해당 정보로 신용등급을 높이려면 신용조회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비금융정보 반영’을 신청하거나, 팩스 등으로 공공요금 납부실적을 신용조회회사에 내면 된다.

신용등급 상승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금리인하 요구권’도 있다. 가계대출 시 취업과 승진, 임금상승 등으로 신용사정이 달라지면 기존 대출금리 등을 낮춰달라고 요구할 수 있게 한 제도로, 오는 6월 12일부터 시행된다. 기업대출자는 법인 신용등급이 오르거나 재무상태가 개선됐을 경우 이용 가능하다. 소비자가 금리인하를 요구하면 10영업일(자료 보완기간 제외) 이내에 금융사는 금리인하 요구를 수용할지 여부와 그 사유를 전화나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소비자에게 알려야 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소비자가 신뢰할 수 있는 신용평가 방안이 마련되도록 평가항목의 다양화·고도화 등을 추진해 다양한 금융거래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할 것”이라며 “이번 제도개선으로 금융 소외계층의 은행 이용이 실질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대출상황을 모니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은성 경제부 기자 ke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