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 속 대통령, 진짜 대통령이 될까

우크라이나 코미디 배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지난 3월 31일 치러진 대선 1차 투표 결과, 30.23%를 득표해 득표율 15.95%인 현직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우크라이나는 그 이름은 익숙하지만 정작 한국인들에게는 어떤 나라인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특별히 국제 뉴스의 중심에 설 일이 없는 이곳이 최근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대선 출사표를 던진 코미디 배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 덕분이다.

우크라이나의 코미디언 출신 정치 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후보가 지난 3월 31일(현지시간) 수도 키예프의 선거본부를 방문해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대선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어 젤렌스키와 현 대통령인 페트로 포로셴코가 오는 4월 21일 치러지는 2차 결선 투표에 나서게 된다. / 로이터|연합뉴스

젤렌스키는 지난 3월 31일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선 1차 투표 결과, 개표율 99.8% 상황에서 30.23%를 득표해 득표율 15.95%인 현직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53)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이번이 세 번째 대선 도전이었던 율리야 티모셴코(58) 전 총리는 13.39%로 3위에 그쳤다.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얻은 후보가 없어 젤렌스키는 4월 21일 포로셴코와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된다.

젤렌스키의 대선 출마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다. 현직 코미디언인 그의 ‘정치 경력’이라고는 2015년 방영된 TV 코미디 드라마 시리즈 <국민의 종(Servant of People)>에서 대통령 역을 맡은 게 전부다. 흥미롭게도 드라마에서 그가 연기한 인물도 평범한 교사였다가 대통령이 된다. 그가 연기한 극중 인물 바실리 페트로비치 골로보로드코는 열정적으로 부패를 비판하는 그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면서 전국구 스타로 떠오르고, 대선까지 출마해 대통령이 된다. 대통령이 된 후의 행보도 파격적이다. 골로보로드코는 친한 친구들을 장관에 임명하고 그들과 함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부패와 맞선다. 모두 23회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중 하나로, 폭스 스튜디오와 넷플릭스가 판권을 샀다.

젤렌스키는 자신이 2003년 설립한 기획사 ‘크바르탈95’를 통해 우크라이나 정치를 풍자하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만들어왔지만, 현실의 젤렌스키가 실제로 대선에 뛰어들 수 있었던 일차적인 힘은 바로 이 드라마의 성공에서 나왔다. ‘국민의 종’은 지난해 창당된 원외정당의 이름이기도 하다. 젤렌스키는 이번 대선에 ‘국민의 종’ 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정치 풍자 드라마 성공 힘입어 대선에

로이터통신은 1차 투표 결과를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결과로 해석했다. 지난달 갤럽 조사에 따르면 정부를 믿는다는 응답은 고작 9%였고, 91%가 불신한다고 응답했다.

결선에서 맞붙을 포로셴코 대통령은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 판매를 기반으로 사업을 확장해 ‘초콜릿 왕’으로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 최대 부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되고 치른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됐다. 그는 부패 척결, 유럽연합(EU)·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추진, 러시아에 병합된 크림반도와 친러 반군들이 장악한 동부지역 탈환 등을 약속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EU와 NATO 가입은 요원한 상태이고 동부지역에서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과의 교전이 지속되고 있다.

선거 한 달 전인 지난 2월 터진 방산비리 스캔들이 결정적이었다. 포로셴코의 사업 파트너 올레 글라드코브스키 국방위원회 부의장의 아들이 러시아에서 밀수한 부품을 우크라이나 방산업체에 헐값에 넘기고 이익을 취한 혐의로 고발됐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부패 이야기에 단련이 돼 있다. 그러나 대선을 한 달 앞두고 터진 이 스캔들은 부패 이야기라면 신물이 난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노를 일으켰다”고 전했다.

젤렌스키는 부패라면 신물이 난 우크라이나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특히 새로운 얼굴을 바라는 젊은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30대 이하 유권자의 40%가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경험 부족은 결함이 아니라 기성 정치에 물들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키예프에 거주하는 한 20대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뉴욕타임스>에 “젤렌스키는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후보”이기 때문에 표를 줬다고 말했다. 유세 방식도 기성 정치인들과는 달랐다. 젤렌스키는 대규모 유세나 언론 인터뷰 대신 자신이 제작하고 출연하는 코미디 쇼를 유세 무대로 활용했다.

우크라이나 대선이 실시된 지난 3월 31일 페트로 포로셴코(가운데) 현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수도 키예프의 한 투표소에서 투표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부패 척결 내세워 젊은층 지지 이끌어

젤렌스키는 부패 척결을 최우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뇌물수수 전력이 있는 공직자의 공직 진출을 영구적으로 금지하고 러시아와의 직접 협상을 통해 동부지역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사안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견 없이 부패 척결을 바라는 민심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언론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고 상대 후보들과의 TV 인터뷰도 거절했다. 기성 정치 반대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최근의 포퓰리즘 흐름에 서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시첸코는 <가디언>에 기고한 칼럼에서 “그러나 그는 서구의 우익 포퓰리스트들처럼 내부나 외부의 적에 대한 증오를 동원하지도 않는다”면서 “그의 결정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활동가들의 기대를 넘어선다”고 지적했다.

드라마 속 대통령이 현실의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대선 1차 투표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후 젤렌스키는 “기쁘다. 그러나 위대한 승리를 향한 첫걸음일 뿐”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현직 프리미엄을 최대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1차 투표 이후 자신의 트위터에 “특별히 오늘 청년들에게 호소하고 싶다”면서 “여러분은 이 나라가 더 빨리, 더 깊게, 질적으로 더 확실하게 변화하길 바라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가진 불만의 이유를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가 기피해온 TV 토론을 통해 코미디 배우 출신 후보의 경험 부족을 공략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알자지라는 포로셴코 대통령이 젤렌스키가 당선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합병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조장할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또 해외 도피 중인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재벌)와 젤렌스키의 연루의혹을 집중 공략할 것으로 보인다. 포로셴코는 1차 투표 다음날인 지난 4월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 금융재벌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의 꼭두각시라고 공격했다. 포로셴코는 부패 혐의로 이스라엘에 망명 중인 반정부 성향의 우크라이나 금융재벌 이고르 콜로모이스키가 젤렌스키와 티모셴코 전 총리를 지원해 자신의 재선을 막으려 한다고 비난해왔다. 콜로모이스키는 젤렌스키의 시트콤 시리즈가 방영되는 TV 채널을 소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젤렌스키가 오는 10월 총선에서의 지지를 조건으로 티모셴코 전 총리와 손을 잡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이를 부인했다.

<정원식 국제부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