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영수회담서 조기 추진 합의…
정치권 합의 ‘넘어야 할 산’ 많아
행정구역 개편은 정부 개혁 부분의 ‘마지막 개혁’으로 불린다. 행정구역 개편의 목적은 한마디로 행정의 효율성 제고다. 막강한 중앙집권체제로 인해 시민의 선택권 보장이라는 풀뿌리민주주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식 지방자치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요구하는 중대한 문제다. 그뿐 아니라 행정구역 개편 논의 자체가 한국의 지방자치의 문화를 바꿈으로써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의 변혁을 추구하는 한 과정이다.
지방자치제도의 대수술이라고 할 수 있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국가경영 개념의 재정립,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권력 관계의 재조정, 중앙정부 중심의 관료체제 대변화 등 국가체제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행정구역 개편 논의와 함께 부상할 지방자치선거제도의 손질, 지방 재정의 확충 방안이나 재정자율권 부여 여부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구 재조정 등과 같은 사안은 지엽적 문제라고 치부해도 무방할 정도의 큰 변혁을 불러올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행정구역 개편을 ‘기득권을 해체하는 극약 처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현재 상황에서 행정구역 개편보다 더 효율적인 정치·행정개혁이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중요한 문제다.
현 지방자치는 불완전한 동거 시스템
농정시대 때 만들고 100년이나 이어온 현재의 행정체계는 정보지식사회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이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어 왔다. 현재의 풀뿌리민주주의는 지방자치와 중앙집권체제가 동거하는 불완전한 시스템이다. 중앙정부의 힘이 너무 막강해 실질적인 자치정신을 살릴 수 없다는 주장도 있고, 반대로 지방정부가 너무 이기적 관점에만 매달려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무엇보다 전통적 지방행정구조 해체에 따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어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반복적인 행정구역 개편 논의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결실을 얻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도(道) 해체 논의를 시작으로 거의 20년 동안 행정 개편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 결실은 고작 1995년 위축된 농촌을 개발하고 균형발전시키기 위해 단행한 도·농 통합이 전부였다.
2005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제안에 대해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지방행정체제 개편이 더 낫다”며 맞불을 놓았다. 이것이 이듬해 국회 내에 지방행정체계개편특위를 구성한 계기가 됐다. 지방행정체계개편특위는 국회 본회의에 보고한 뒤 정부에 개편안을 이송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회는 지방선거 등 일정 등의 이유로 더 이상 논의를 진행시키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다시 행정구역 개편 논의에 시동이 걸렸다. 이명박 대통령과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9월 25일 청와대 회동에서 지방행정체계 개편을 조기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일단 행정구역 개편 논의에 불을 당겨놓은 것이다. 행정구역 개편에 적극성을 띠고 있는 민주당은 2009년까지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입법을 완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은 9월 23일 ‘지방행정체제의 효율적 개편 필요성’이라는 이름의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본격적으로 공론화 작업에 착수한 데 이어 지방행정체제 추진을 다시 당론으로 확인했다. 그것도 한나라당이 거부하기 난감한 파격적인 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17대 국회 때 한나라당이 제시한 3단계 지방행정체계를 2단계로 압축하기 위해 16개 시·도를 폐지하고, 230개 기초단체를 70여 개로 광역화하자는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일단 원칙적인 공감을 표시했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17대 국회 때 지방행정구역 개편특위위원장이던 허태열 의원과 임태희 정책위의장이 “행정의 효율성과 주민 편의, 예산 절감을 위해 행정구역 통합 개편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뿐이었다. 한나라당의 소극적 태도는 민주당이 2010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선거구 조정을 겨냥해서 행정구역 개편을 주도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적극 제안에 한나라당 소극적
“행정구역 개편은 판도라 상자를 여는 것”(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지금은 경제문제에 온 행정력과 정치력을 집중할 때”(조진형 국회 행정안전위원장)라는 발언에서도 그런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한마디로 민주당이 정략적으로 행정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행정구역 개편 논의에 반발할 것이 자명한 지방권력의 눈치를 본 점도 없지 않다.
실제로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16개 시도단체장 중에서 행정구역 개편에 찬성한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김진선 강원지사는 “60~70개의 광역시를 만든다면 이를 관리할 국가 단위의 초(超)광역기구와 읍·면·동을 관리할 별도의 행정단위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문수 경기지사 역시 “효율성과 경제성을 따진다면 만만한 지방을 갖고 그럴 게 아니라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 중앙정부가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어떻든 이명박 대통령과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행정 개혁을 추진하자”고 합의한 상황에서 한나라당도 더 이상 행정구역 개편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형편이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행정구역 개편을 포함해 헌법과 국회법 개정 등을 함께 다룰 정치개혁특위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지방행정체제를 바꾸면 기초의원 선거가 없어지고 국회의원 선거구도 바뀌는 만큼 선거구제도 함께 논의하자는 것이 역제의 이유다. 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는 정치개혁특위와 행정개혁특위를 분리하는 방안을 다시 제안했다. 현재 그런 방향에서 가닥이 잡혀가고 있는 상황이다. 박병석 정책위의장은 “지방행정 개편은 개헌보다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만약에 국회의원 선거구 등 정치문제와 결부된다면 행정구역 개편 논의가 마무리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선거구 재조정과 직결
자유선진당도 행정구역 개편 논의에 가세하고 있다. 선진당은 현행 16개 시·도를 폐지하고 230개 기초단체를 70여 개로 광역화하자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개편안은 지방화 분권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대신 행정구역을 지금보다 넓은 단위로 광역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류근찬 정책위의장은 “전국을 5~7개의 광역 단위로 확대 개편하고 국가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해 연방제에 준하는 완전한 지방분권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행정개혁 논의를 본격화하더라도 정치권의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 우선 청와대와 행정부에서 정치권이 주도하는 행정구역 개혁에 대해 탐탁해하지 않는 분위기다. 이명박 대통령은 9월 12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행정구역 개편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면 실패한다”면서 “전문가가 중심이 돼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권이나 정당의 당리당략이나 사리사욕에 의해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행정구역 개편은 국회의원 선거구 재조정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국회에서 전적으로 다룬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걱정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행정부는 국회와 달리 현재의 16개 시도를 ‘5+2체제’로 개편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 바로 이명박 정부의 핵심 지역발전정책인 ‘5+2 광역경제권’ 활성화 전략이다. 광역경제권은 수도권·충청권·호남권·동남권·대경권·강원권·제주권 등이다. 이는 사실상 16개 시·도체계를 지역 동질성과 경제 단위를 중심으로 광역화해야 한다는 사전포석으로 풀이되고 있다. 반면 정치권은 16개 시·도 체계를 해체하고 70여 개의 준광역시를 만들자는 주장이 우세하다.
한편 행정구역 개편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시와 인천시를 묶는 개편안이 제기돼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9월 23일 열린 민주당 주최 ‘지방행정체제 개편 토론회’에서 서울과 인천을 묶어 서울특별시로 하고 전국을 1특별시 5도로 광역분권화를 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학계에서는 행정구역 개편과 관련한 광역화 이론에 하중이 실려 있는 느낌이다. 이승종 서울대 교수는 “광역시와 도 간 분리에 따른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광역시와 도를 통합하는 게 바람직하다”면서 “현재의 시·도체제를 1특별시 9개 시·도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1단계 통합이 완료되면 관할구역 내에 광역시가 없는 충북·전북·강원 및 제주 등 4개 도는 인접도와 자율적 협의를 통해 통합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은 서울주와 경강주, 충정주·경상주 등으로 광역단체를 4~5개로 확대하고 각 주에 국방외교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능을 이양해 사실상 연방 수준의 시스템을 구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강재호 부산대 교수(행정학과)도 “70개 광역시를 설치하면 지자체에서 수행하고 있는 위임사무의 상당 부분이 중앙정부로 넘어갈 확률이 높다”면서 “그렇게 되면 세계적인 흐름인 지방분권화에 역행하는 중앙집권화를 초래하기 쉽다”고 주장했다.
어떻든 지역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아내고 국가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되는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행정개혁의 대장정이 어떻게 끝을 맺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