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론]‘학점세탁’에 대학성적 멍든다

한 번 들은 과목의 성적이 ‘맘에 들지 않을 경우’, 얼마든지 재수강할 수 있다.
그리고 재수강하는 과목의 성적은 A학점까지 받을 수 있다. 그 결과 재이수를 넘어 삼수, 사수까지 하는 학생이 즐비하다.

현재 대학은 학점 성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나쁜 학점을 더 나은 학점으로 바꾸는 제도가 도를 지나쳐 성적표로는 학생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이상한 학점 세탁이 횡행하고 있다. 대학도 자기 학생이 취직하는 데 불리할 것 없다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대학행정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교육인적자원부도 이 문제만은 너그럽게 수수방관하고 있다. 예전에 3.0 정도면 괜찮은 성적이었다. 허나 요새는 좀처럼 내밀기 어려운 경쟁력 없는 성적이다. 아니 학점관리에 신경을 안 써 학점 세탁에 실패한 성적이다. 기업체에서도 3.0이면 서류 전형에서 떨어트리는 성적이란다. 그리고 대학 성적은 믿을 게 못된다는 것이 기업체 인사담당자의 지배적 인식이다. 어떡하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모든 학생이 가고 싶어하는 학교를 예로 들어보자. 한 번 들은 과목의 성적이 ‘맘에 들지 않을 경우’, 얼마든지 재수강할 수 있다. 그리고 재수강하는 과목의 성적은 A학점까지 받을 수 있다. 그 결과 재이수를 넘어 삼수, 사수까지 하는 학생이 즐비하다. 예전엔 전공필수 과목을 F 받았을 때만 재이수를 허용했고, 이 경우 성적 상한선은 B+였다. 대부분의 학교가 이를 철저하게 지켰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의 대학이 재이수의 상한선을 ‘널널하게’ 열어놓고 있다. 너무 지나친 제도가 아니냐는 교수사회의 비판을 의식해 C0이하의 성적을 받았을 때 한 해 두 번의 재이수 기회를 주고 성적 상한선도 B+로 한정하는 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다른 학교는 A+까지 허용하는데 왜 우리 학교만 재이수 과목의 성적을 제한하느냐는 항의에 굴복해 성적 제한을 풀고 말았다.

더 한심한 것은 재이수할 경우 재이수 성적이 원래 받았던 성적을 그대로 ‘덮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전 성적이 학점 누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학점 세탁을 제도화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전 같으면 괜찮은 성적인 3.0 정도가 이젠 거들떠보지도 않는 학점으로 전락하는 아주 비정상적인 상황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학점 세탁의 제도화로 인한 부작용은 매우 심각하다. 우선 재수강하는 학생들이 과목마다 홍수를 이루는 데 있다. 한 번 들어 과목 성격과 시험문제 유형까지 터득한 후 다시 재수강해서 좋은 성적을 선점하는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3, 4학년들이 1학년 과목을 점령해 A학점을 독차지하는 경우도 적잖이 발생한다. 억울하면 너희도 4학년 돼서 봉창하라는 식이다. 재수강 삼수강하는 학생이니 잘 봐달라고 교수에게 호소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가 받은 학점을 맘에 들 때까지 수용하지 않는 심리가 학생들의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아 가는 데 있다. 나쁘게 나온 학점을 자기 탓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들으면 된다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큰 문제다.

학점 성형에 익숙한 학생들이 받는 성적의 속내를 알면 더 비참해진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거의 모든 대학이 A학점과 B학점을 합해 최소 50%에서 최고 70%까지 주고 있다. 이 기준을 지키지 않으면 성적이 입력되지 않는다. 그러니 현행 대학제도에서 C학점이란 것은 예전의 D 이하의 성적이나 마찬가지다. 이른바 ‘A폭격기’라는 별명의 성적을 잘 주는 교수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대학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가 망한 이유가 성적 나쁜 학생들이 많으면 가르친 교원이 징계받는 데서 비롯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 이 지경에 이르고 있는가. 대학원 면접이나 신입직원 면접을 볼 때 4.0을 넘는 성적이 수두룩하다. 이 모두 학점 세탁과 성형을 조장하고 묵인하는 대학 당국과 교육인적자원부의 책임이다. 하루 빨리 ‘학점 실명제’라도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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