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48년 걸린 승전보, 여자는 12년 만에 해냈다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이 월드컵 16강 진출 쾌거를 달성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처럼 웃었다. 태극낭자들이 메르스에 지친 우리 국민들에게 힘을 줬다. 승리의 주역 김수연은 “우리 팀을 보며 국민들이 메르스 공포감을 극복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드라마(Drama).

국제축구연맹(FIFA) 홈페이지는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의 2015 캐나다 여자월드컵 16강 진출 소식을 전하면서 ‘드라마’라는 단어를 썼다. 그만큼 극적이었다.

한국은 18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2015 FIFA 여자월드컵 조별리그 E조 최종 3차전에서 스페인에 2-1 역전승을 거뒀다. 브라질과 1차전에서 0-2로 패하고, 코스타리카와 2차전에서 2-2로 비긴 한국은 스페인을 무조건 이겨야 16강 진출이 가능했다.

6월 18일 캐나다 오타와 랜스다운 경기장에서 열린 2015 캐나다 여자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 대 스페인 경기에서 2대1로 승리한 여자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1승1무1패로 조별예선 통과
행운의 여신은 태극낭자들 편이었다. 전반 29분 선제골을 내준 한국은 후반 8분 조소현(27·현대제철)의 헤딩 동점골에 이어 후반 33분 김수연(26·KSPO)의 ‘슈터링(슛+센터링)’으로 역전골을 뽑아냈다. 김수연이 오른쪽 측면에서 올린 슛과 크로스를 합쳐 놓은 듯한 애매한 볼은 스페인 골키퍼를 넘어 골망을 갈랐다.

후반 종료 직전 스페인 소니아의 프리킥이 크로스바를 강타한 뒤 종료 휘슬이 울렸다. 한국 여자축구는 월드컵 사상 첫 승과 함께 E조 2위(1승1무1패)로 16강 진출의 쾌거를 달성했다.

미국 스포츠매체 ESPN은 ‘한국은 동점골 이후 기뻐하는 대신 심장 외과의사처럼 인내심과 신중함을 갖고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한국은 월드컵 두 번째 대회, 6경기 만에 최상의 타이밍에서 역사적 첫 승을 거뒀다’고 극적인 순간을 묘사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처럼 웃었다. 태극낭자들이 메르스에 지친 우리 국민들에게 힘을 줬다. 승리의 주역 김수연은 “우리 팀을 보며 국민들이 메르스 공포감을 극복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여자축구 선수로 사는 게 외로웠다.” 전가을(27·현대제철)은 지난달 18일 여자월드컵 출정식에서 눈물을 쏟으며 이렇게 말했다. 전가을은 축구를 누구보다 좋아했지만 우는 날이 더 많았다. 여자축구는 비인기 종목이기 때문이다.

2009년부터 열리고 있는 국내 여자축구리그 WK리그는 무료 입장이다. 하지만 관중석은 늘 텅텅 빈다. 여자축구 대표팀은 FIFA 랭킹 18위다. 남자대표팀(FIFA 랭킹 58위)보다 훨씬 높다. 하지만 관심은 턱없이 부족하다.

6월 18일 캐나다 오타와 랜스다운 경기장에서 열린 2015 캐나다 여자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 대 스페인 경기에서 조소현이 드리블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빠르게 성장한 황금세대 결실
1-13.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급조된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은 일본과 첫 A매치에서 12골 차로 참패했다. 1990년 아시안게임에서도 4전 전패를 당했다. 북한·중국·일본·대만을 상대로 단 1골을 넣었고, 무려 30골을 내줬다. 한국 여자대표팀은 ‘승점 자판기’라 불렸다. 버튼만 누르면 음료수가 나오듯, 한국만 만나면 쉽게 승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FIFA 여자월드컵은 1991년 출범했다. 한국 여자축구는 번번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인고의 시간 끝에 여자대표팀은 2003년 미국 여자월드컵에 첫 출전했다. 그러나 세계의 벽은 높았다. 브라질(0-3패), 프랑스(0-1패), 노르웨이(1-7패)에 3전 전패를 당했다. 김진희의 본선 첫 골에 만족해야 했다.

어린 태극낭자들이 불모지에서 희망의 신호탄을 쐈다. 2010년 지소연(24·잉글랜드 첼시 레이디스)이 이끈 20세 이하(U-20) 대표팀이 FIFA U-20 월드컵 3위에 올랐다. 같은 해 여민지(22·대전스포츠토토)가 선봉에 선 U-17대표팀이 FIFA U-17 월드컵을 제패했다.

여자축구 황금세대는 빠르게 진화했다. 국가대표 수비수 출신 윤덕여 감독(54)은 2012년 12월 지휘봉을 잡고 ‘따뜻한 아버지 리더십’을 펼쳤다. 지난해 아시안컵 4강에 올라 12년 만에 여자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냈다. 축구 천재 리오넬 메시(28·바르셀로나)에 빗대 ‘지메시’라 불리는 지소연은 잉글랜드 첼시 레이디스에 입단해 2014년 잉글랜드 여자축구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여자대표팀은 지난달 20일 2015 캐나다 월드컵을 향한 장도에 올랐다. 여민지는 출국 이틀 전 십자인대 부상으로 낙마했다. 지소연은 “여민지의 몫까지 뛰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전가을은 “2002년 월드컵 4강에 오른 남자축구처럼 여자축구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다짐했다. 윤덕여 감독은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출사표를 밝혔다.

출발은 좋지 않았다. 한국은 지난 10일 브라질(FIFA 랭킹 7위)에 0-2 완패를 당했다. 지난 14일 코스타리카(37위)와 2차전에서는 후반 44분 통한의 동점골을 내주고 2-2로 비겼다. 전가을은 코스타리카전에서 골을 넣고도 펑펑 울었다. 전가을은 “이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 감동적인 경기로 16강을 넘어 8강까지 가겠다”고 약속했다.

전가을과 선수들은 스페인(14위)을 꺾고 약속을 지켰다. 그라운드는 눈물바다가 됐다. 한국 여자축구는 12년 만에 월드컵 첫 승과 16강행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1954년 월드컵 본선에 첫 출전한 한국 남자축구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첫 골을 넣고, 첫 승을 거두기까지 48년이 걸렸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여자축구는 2012년 런던 올림픽에 나서지 못했다. 선수들은 여자축구가 대중들에게 영원히 잊혀질 수도 있다는 절박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윤덕여 감독은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월드컵 첫 승과 16강을 목표로 했는데 이뤘다. 평생 기억될 만한 날이고, 선수들에게 무척 고맙다”고 감격스러워했다.

한국은 22일 프랑스와 8강행을 다툰다. FIFA 랭킹 3위 프랑스는 우승후보다. 이번 대회 F조 1위(2승1패)로 16강에 진출했다. 2011년 독일 여자월드컵과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잇따라 4위에 올랐다.

프랑스 여자축구 등록선수는 9만명이다. 우리나라(1765명)의 51배다. 한국은 올해 3월 2019년 여자월드컵 개최지 선정에서도 프랑스에 패했다. 윤덕여 감독은 “프랑스는 세계 정상급 팀이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도전자 입장으로 나서겠다”고 말했다.

등록선수 1700여명 불모지에서 이뤄낸 기적
프랑스전 결과에 관계없이 한국 여자축구는 이미 충분히 잘 싸웠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한국 남자축구는 2002년 월드컵에서 첫 승과 4강을 달성하기까지 국제대회에 나서면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다”며 “한국 여자축구도 이제는 남자축구처럼 국제무대에서 주눅들지 않을 것이다. 또 여자축구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커진 것도 고무적이다”라고 말했다.

여자축구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풀뿌리 저변을 넓혀야 한다. 한국 여자축구 초·중·고·대학 여자축구팀은 2010년 기준 57개다. 이후 크게 늘지 않았다. 지금 황금세대 이후가 문제다.

한준희 위원은 “유럽과 미국처럼 꼬마 여자아이들이 축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축구를 잘하는 선수가 나오고, 초·중·고·대학교 축구부가 늘고, ‘여자 펠레’ 마르타(29·브라질)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박린 일간스포츠 기자 rpark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