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이 만난 사람]데뷔 45주년 맞는 가수 이미자

데뷔 이래 2000여곡을 취입해 한국기네스북에 오른 데다 45년 동안 한번도 추락하지 않은 대스타. 직접 만나 보면 소박한 차림에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푸근한 '64세 할머니'의 노래, 사랑 그리고 철학이 담긴 인생 이야기.

잘 먹고 잘 자는 게 목소리 유지 비결

45년 전인 1959년. 소박한 외모에 입이 조금 튀어나온 게 특징인 열아홉 처녀가 가정집 응접실 벽을 헐어 유리창을 붙여 만든 간이녹음실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노래를 불렀다. 추위보다 자신의 이름으로 첫 음반을 낸다는 흥분과 두려움에 더 떨었다.

"보기만 하여도 울렁~ 생각만 하여도 울렁~ 수줍은 열아홉살 움트는 첫사랑을 몰라주세요~"

경쾌한 스윙곡인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하자마자 가창력을 인정받은 이미자씨는 곧바로 음반업계는 물론 작곡가들에게도 주목을 받았다. 요즘 같으면 "노래와 결혼했어요"라며 성공이나 인기에 더 연연했으련만 순진한 미자처녀는 스무살 무렵에 연주가 정진흡과 결혼했다. 1964년, 임신 9개월인 만삭의 몸으로 방음을 위해 겹겹이 장막을 친 한증막 같은 녹음실에서 얼음으로 목과 얼굴을 문지르며 겨우겨우 녹음을 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엄앵란-신성일 주연의 영화 주제곡인 이 노래는 음반이 나오자마자 1주일 만에 다 팔리고 30주 동안 음반판매 1위를 기록했으며 '가수 이미자'를 가요계의 전설로 만들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기는커녕 언제나 똑같은 목소리로 무대를 지키고 있는 이미자씨는 10월 8, 9일에는 가요계 데뷔 45주년 앙코르 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마련한다.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 올 4월 기념공연에 못 왔던 팬들을 위한 자리다.

2,070곡을 취입해 가장 많은 곡을 부른 가수로 한국 기네스북에 오른 데다 45년 동안 한번도 추락하지 않은 대스타는 직접 만나보면 소박한 차림에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어서 신비감도 들지 않는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이모처럼 푸근하다.

요즘은 신인들도 인터뷰를 할 때는 매니저, 로드매니저, 헤어스타일리스트, 코디네이터 등 군단을 끌고 드라마틱하게 등장해 '스타'임을 과시하는데 이미자씨는 약속장소인 호텔 커피숍에 혼자 나타났고 사진을 찍는대도 거울을 보거나 화장을 고치지 않았다. 샌드위치와 물을 주문한 기자에게 호텔종업원이 "에비앙으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페리에로 하시겠어요?"라고 묻자 이 대스타는 "아유, 그거 다 돈내는 물이잖아요. 그냥 물 주세요, 보통 물이요"라고 했다. 자기가 마시거나 계산할 것도 아닌데.... 생수 하나에도 헛돈을 안 쓰려는 알뜰함이 몸에 밴 것 같다. 그 순간 언젠가 방송국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짜투리시간에도 옷이며 식탁보 등을 뜨개질을 하던 그가 생각났다.

수천명이 모이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45주년 기념 앙코르 공연을 앞두고도 담담한 표정이다. 나훈아, 양희은 등 노래실력으로는 내로라 하는 가수들도 대형 리사이틀을 앞두고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발성 레슨까지 받는데 64세의 이 할머니는 왜 이리 평온할까. 목소리를 관리하는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걸까.

"글쎄요, 목소리 관리 같은 것 해본 적이 없네요. 살인적인 스케줄에 시달리던 젊은시절에는 항상 피곤해서 목소리가 쉬고 갈라지곤 했는데 오히려 지금 목소리가 더 맑고 음역도 높아요. 나이 드니까 체력이 달려서 오래 무대에 서 있으면 다리는 아파도 목은 아프지 않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것.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게 목소리 유지법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목소리는 타고났나봐요."

아무도 복제할 수 없는 목소리

이미자씨의 부모는 노래도 못 부르고 가난했지만 천상의 목소리를 유산으로 주었다. 1941년 서울 한남동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이점선씨는 미자 아기가 첫돌 무렵에 중풍을 맞았고 어머니 유상례씨는 이듬해 친정으로 돌아가서 할머니, 삼촌과 함께 살았다. 즐겁게 노래부를 환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 탁주 한사발에 흥이 나 젓가락 장단에 맞춰 당시 유행가를 부르고 돌아가면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던 미자가 노래를 시작했다. 겨우 서너살인 꼬마가 총기도 뛰어났는지 구성진 가락은 물론 '사랑이 괴로워서 나는 울었네'같은 가사까지 징그럽게 그대로 따라 불렀다. 그게 신기해 친지들이 모이면 노래를 해보라고 시켰고 그후 동네나 학교 콩쿠르마다 출전해 밥솥, 냄비 따위의 상품을 잔뜩 타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KBS에서 노래자랑대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미자학생은 교복을 입고 갔다 '학생은 안 된다'는 말에 다시 평상복으로 바꿔 입고 출전해 나애심의 [밤의 탱고]로 1등을 했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가요평론가 황문평씨는 "중학생처럼 어리게 생긴 소녀가 어찌나 노래를 잘하는지 심사위원들이 다들 전율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음대교수로는 최초로 '대중가수 이미자를 생각한다'라는 논문을 발표해 현상학적 기술을 분석한 박종문 교수(효성대 작곡과)는 이미자씨의 목소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다는 느낌을 주지만 뾰족함이나 폭좁음으로 연결되는 가늘음이 아니라 부드러운 끈끈함과 윤기있는 폭넓음으로 이어지는 가늘음이다. 그 가늘음의 이미지를 통해 수난당하고 짓밟인 전통사회 속 여성의 처지를 매우 뚜렷하고 상징적으로 그려보이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가늘음에 머문 것이 아니라 비단같이 고운 소릿결을 갖고 있어 물레가 실을 자아내듯 곱게곱게 이어져나온다. 또 어떤 깊이와 호흡을 갖고 신중히 찬찬히 물결을 만들어 이미자씨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애잔한 느낌으로 남는다."

가늘지만 간드러지지는 않고, 비단결 같지만 여운이 남아 이별, 그리움, 사랑, 외로움 등 우리 마음의 건반을 두드리며 감동을 주고 압도되지 않지만 질리지도 않아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너훈아, 조영필, 패튀김 등 모창이나 짝퉁가수가 많지만 이미자를 흉내내는 이는 없다. 제스처 또한 그저 마이크를 잡고 몇발짝씩 옮기며 부르는 게 고작이고, 옷차림 역시 단 한번도 팔뚝이나 가슴을 드러낸 민소매 드레스를 입은 적이 없어 흉내내거나 패러디하기 가장 까다롭다.

그런 목소리로 지난 40년간 2,000곡이 넘는 노래를 불렀다. 살인적인 스케줄에 시달릴 때도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통행금지 때문에 밤공연이 끝나면 야간열차를 타고 덜덜 떨며 서울로 올라와 곧바로 녹음실에 가면 영화는 다 만들어놓고 주제가를 녹음 못해 쩔쩔매는 영화제작자, 감독이 이미자씨만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작곡가가 피아노 반주로 들려주는 노래를 한번 따라불러본 다음 음반을 취입했다. [흑산도 아가씨] 등이 그렇게 탄생했지만 지금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사랑받는 곡들이다. 그후로도 [황혼의 블루스] [아네모네] [그리움은 가슴마다] [타국에서] [황포돛대] [여로] [아씨] [울어라 열풍아] [지평선은 말이 없다] [홍콩의 왼손잡이] 등 주옥 같은 가요들을 불렀다.

그런데 이런 목소리 때문에 그의 가슴이 파랗게 멍들었다. 창법이 왜색적이고 천박하다는 이유 등으로 그의 3대 애창곡인 [동백아가씨]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가 금지곡이 되어버렸다.

"가수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를 못 부르게 하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죠. 그 노래 외에도 히트곡은 많고 10년 연속으로 10대 가수상도 받았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인데 못 부르게 하니까 너무 억울하고 답답했지요.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가수생활 30년 기념 리사이틀을 세종문화회관에서 하고, 금지도 풀려 그때 정말 감격스러웠죠."

그토록 숱한 히트곡을 내고, 앨범이 수백만장이 팔리고, 여전히 노래방에서 불려도 음반으로는 돈을 못 벌었다. 예전엔 인세란 개념이 없어서 앨범이 잘 팔려도 전속사인 지구레코드사가 부자가 됐고 '인세' 개념이 정립된 80년대 이후엔 빅히트 앨범을 내지 못했다. 또 노래방에서 불리는 노래 역시 작사-작곡가에게 저작권이 있어 이미자씨에겐 도움이 안 된다. 그래도 한창일 때는 최고의 몸값을 자랑해 천원짜리, 오백원짜리가 가득 든 돈을 둘둘 만 신문지나 '깜장 비니루'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뿌듯했단다. 물론 지금도 출연료나 리사이틀할 때의 액수는 최고다. 지난 봄, 45주년 기념 리사이틀을 하고 17지역에서 순회공연을 했고 해외동포 초청도 끊이지 않는다.

'추리닝'을 입은 여왕

일제시대에 태어나 6-25를 겪고 우리나라 국민들이 나갔던 월남 전쟁터, 사우디 아라비아의 공사현장, 동포가 많은 미국이나 일본 등을 다니며 노래를 불렀으니 이미자씨의 노래는 우리 현대사이기도 하고, 또 국민들의 눈물과 애환이 함께 만든 합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정치가가 그이만큼 국민들을 보듬어주고, 어떤 명의가 우리들의 멍들고 상처난 가슴을 그렇게 치유해주었을까. 노래 하나로 이미자씨는 온국민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질곡의 현대사를 대변했다. 남자들은 한잔 술에 취해, 여자들은 설거지하거나 다듬이질하면서 '이미자 노래'에 자신의 설움을 달랬다. 섹시한 드레스 한번 안 입고, 춤도 한번 안 추고, 부업 하나 하지 않고 그저 노래만 불러도 그는 45년간 여왕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가정적으로는 아들딸을 다 훌륭히 키워내 5명의 손자-손녀를 둔 할머니로 서울 방배동 빌라에 살며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 비결을 물었더니 '인내심'이라고 했다.

"참는 게 제일 큰 힘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칭찬받을 일이 있다면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거부하지 않고 인내하고 잘 견뎌냈다는 거예요. 그리고 항상 남보다 앞서가기보다 한발짝 뒤에 서 있었어요. 남에게 한발 양보하면 참 평화로워요. 그건 세월이 주는 지혜일 겁니다. 저도 한창 때엔 은근히 자만했고 나서기도 했을 거예요. 항상 자만하지 말자, 양보하자라고 되새기며 살죠."

그이라고 왜 아픔이나 고통이 없었겠나. 첫 결혼에 실패해 딸과 생이별을 했고 KBS PD였던 김창수씨와 재혼, 엄격한 시부모님에게 눈물겨운 시집살이도 했다. 전처 소생인 두 딸을 키우고 아들도 낳으면서 화려한 스타와 보수적인 집안의 며느리, 새엄마, 친엄마 노릇을 다 하느라 몸과 마음이 편한 날이 드물었고 하루에도 몇번씩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참자 참자"를 주문처럼 외며 살았단다.

종가라 지금까지 대소사도 많고 제사도 지낸다. 친지 밭에서 콩을 사다가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담그고 봄엔 1년 동안 쓸 마늘을 사서 빻아 냉동실에 넣어두고 가을이면 고추 사다 햇볕에 말리는 것이 일상이다. 요리할 때 사용하는 모든 양념을 직접 만들고 준비한다. 달걀 한 판, 무 한 개 값도 척척 말한다. 공연을 앞두고도 가족에게 방해되는 것이 싫어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하는 이미자씨. 드레스야 입지 않겠지만 엘레지의 여왕은 집에서 무얼 입는지 궁금해 물어보니 일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했다.

"추리닝이요. 매일 그거 입고 집에서 일하고 놀아요"

텔레비전도 잘 안 본다. 9시 뉴스와 가요무대, 어쩌다 재미있으면 10시에 하는 드라마는 가끔 본다. 연예인이지만 후배 연예인들을 만날 기회도 드물어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연예 관련 프로그램도 전혀 보지 않는다. 가수 비도 [풀하우스]를 보다가 알았지 그전엔 몰랐단다. 후배들을 잘 모르지만 후배들에게 아쉬운 점은 있다고 했다.

"저 역시 트로트가 촌스럽다, 천박하다는 열등감을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 가요는 절대 천박한 음과 박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너무 목소리를 꺾는 등 기교만 부리고 박자도 굉장히 빨라 마치 고속버스에서 춤출 때 나오는 춤곡처럼 불러요. 노래는 진실된 마음으로, 정확한 가사 전달과 박자가 필요하지 야릇한 창법이나 제스처는 필요없죠. 제발 우리 가요의 제 모습을 찾았으면 해요. 제가 죽고 나면 트로트나 가요도 사라질 것 같아요...."

요리에 자신 없는 이들이 무조건 화학조미료만 잔뜩 뿌리듯 노래실력보다 다른 것에 몰두하는 후배들이 걱정스럽다는 이미자씨. 국민훈장을 비롯해 상도 엄청나게 받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은 것 같았다.

"여전히 제 노래를 사랑하는 팬들이 있고 설 무대가 있고, 또 아이들 다 결혼시켜 손주들도 보고 우리 부부도 건강해요. 가수로서도 그렇고 가정생활도 그렇고 이젠 정말 안정되고 탄탄하다고 자부해요."

60여년 인생을 동백꽃처럼 빨갛게 멍든 가슴에 참을 인(忍)자를 새기며 살았다는 이미자씨. 그가 참고 살아주었기에 우린 지금도 아름다운 그이의 목소리와 노래를 선물받을 수 있다. 그래, 참고 버티는 게 가장 큰 힘이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

글[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