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 달구는 스토브리그, 그 비결 뭐니?

“투수는 귀족, 외야수는 상인, 내야수는 노비, 포수는 거지.”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 7화에서 작중 야구팀 드림즈의 포수 서영주(차엽 분)는 포수 포지션이 가장 고되다고 항변한다. 연봉협상 과정에서 주전 포수인 자신이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로 꺼낸 말이다. 그런데 야구팬들에게는 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야구선수가 2013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을 꺼내 화제가 된 바 있다.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 의 한 장면. 드림즈의 실책에 관중들이 탄식하고 있다. / SBS

드라마가 방영되자마자 인터넷 야구 커뮤니티에선 NC다이노스의 포수 김태군이 2013년 한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직접 이 말을 하는 장면이 올라오며 화제가 됐다. 야구팬 시청자들은 팬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짤방’(유행하는 사진 또는 영상)을 드라마에서 재발견하는 재미를, 야구는 잘 알지 못했던 ‘야알못’ 시청자들은 현실과 드라마가 맞닿는 접점을 깨달으며 새로운 재미를 느낀다.

시청률 5.5%서 16.5%로 급상승

지난해 12월 13일 첫 방영된 <스토브리그>는 스토브처럼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서서히 달구며 후반을 향해 가고 있다. 설 연휴 동안 결방됐지만 이 기간에도 실제 프로야구 구장 안팎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명장면과 비교하며 ‘고증’에 감탄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방영 전 경기장 안 선수들의 열정을 다루는 스포츠 드라마의 공식을 거부한다며 ‘야구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홍보문구를 내걸었을 때만 해도 야구팬들의 호응은 뜨겁지 않았다. 하지만 하위 팀을 끌어올리기 위해 투입된 신임 단장과 구단 프런트의 분투가 담긴 오피스 드라마의 틀 위에 스포츠 드라마의 뻔한 클리셰를 뒤엎는 색다른 이야기 구도가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입소문이 퍼졌다. 야구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흥미 있게 즐길 수 있는 장면들이 번갈아가며 눈길을 끈 것이다.

뒤늦게 드라마를 접한 야구팬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만한 장면은 첫 화부터 쏟아졌다. 팬들을 전혀 행복하게 할 수 없었던 탓에 반어적으로 ‘행복수비’라는 별칭이 붙었던 한화 이글스의 과거 수비 실책 장면이 드라마 속 만년 꼴찌팀 드림즈의 수비 장면에서 재연됐다. 평범한 외야 뜬공을 잡으려고 두 명의 외야수가 달려들다 모두 포구에 실패하는 장면, 이런 어이없는 경기에 실망하다 못해 ‘보살’로 불릴 정도로 달관하게 된 해당 팀 팬들이 불상을 본뜬 가면을 쓰고 관중석에 앉아 있는 장면 등 야구팬들 사이에선 유명한 장면들을 충실하게 반영해낸 것이다.

드라마의 드림즈가 만년 하위 팀이라는 설정 때문에 실제 KBO에서 성적이 하위권에 오랜 기간 머문 일부 팀의 팬들은 드림즈의 모델이 서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라고 맞서기도 했다. 특히 ‘행복수비’의 한화나 팀 순위로 ‘비밀번호’를 찍었다는 롯데 자이언츠 팬들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한 팀의 모습만을 모델로 한 것은 아니다. 1화의 수비 실책으로 인한 대량 실점 이후 투수가 더그아웃에 돌아와 글러브를 집어던지는 장면은 KBO의 여러 팀에서 비슷한 장면이 중계방송 전파를 탄 바 있다. 벤치 클리어링이 아니라 같은 팀 선수들끼리 싸우는 장면은 국내 프로야구는 아니지만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꼭 닮은 상황이 벌어져 주목을 끌기도 했다.

현실고증이 충실히 된 이런 장면들이 처음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야구팬들을 화면 앞으로 불러들였다. 1화 시청률은 5.5%로 시작했지만 설 연휴 결방 전 11화에 이르면 16.5%로 3배 높아졌다. 드라마 시청에 가장 무관심한 층인 20~40대 남성 시청자들을 끌어들인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야구팬들만 <스토브리그>에 열광하는 것도 아니다. 야구와는 큰 관련이 없던 경력의 신임 단장을 비롯해 선수 트레이드와 연봉협상 등 쉽지 않은 프로젝트를 짧은 스토브리그 기간 안에 마무리해야 하는 프런트의 모습은 신선한 오피스 드라마의 성격을 더 강하게 내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을 그려낼 때도 실제 구단에서 벌어지는 막후 이야깃거리들을 잘 반영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스토브리그>는 사실관계를 잘 엮어냈을 뿐 아니라 야구선수들보다는 구단 운영 면에서 시스템 문제까지 지적해 회사생활을 하는 시청자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펼쳐냈다”고 평가했다.

구단서 벌어지는 이야깃거리 잘 반영

KBO 구단들의 협조를 받고 작가와 제작진이 한국야구학회를 참관하는 등 사전 조사가 잘 이루어진 면은 오히려 야구팬들도 쉽게 접근하기 힘든 실제 스토브리그 기간 팀 재건 과정을 그려내면서 빛을 발했다. 처음에 야구 관련 경력이 없는 신임 단장을 프런트 직원들이 무시하거나 배척하려는 모습이나 드림즈의 팀 전체 연봉을 30%까지 삭감하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해가는 모습도 출범 40년을 바라보는 국내 프로야구 역사에서 심심찮게 나왔던 모습이다. 모기업의 자금력에 크게 의존하는 국내 야구팀들이 자금 동원 위기가 오면 해외 대신 국내에서 스프링캠프를 열고, 연봉조정 등의 과정에서 선수보다는 힘 있는 구단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한 모습들도 현실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드라마이기 때문에 현실에선 없는 모습이 극의 재미와 흐름을 위해 들어갔다고 지적되는 부분 역시 있다. 대표적으로 30대 여성 운영팀장 이세영(박은빈 분)이 극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는 모습은 아직까지 여성 운영팀장이 나오지 않은 KBO의 현실과는 다르다. 또 메이저리그와는 달리 국내에선 팀의 간판급 선수끼리 트레이드를 진행하는 사례가 드물었던 점도 드림즈의 임동규(조한선 분)와 바이킹스의 강두기(하도권 분)를 트레이드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배경이 됐다. 다만 실제 KBO에서도 두 차례의 선수노조·선수협 사태 당시 각 팀의 대표선수들을 맞트레이드해 선수들의 단합을 저지한 사례처럼 간판선수들을 맞바꾼 경우가 없지는 않다.

드라마를 연출한 정동윤 PD는 ‘스포츠 드라마는 고전한다’는 속설을 깨고 야구를 주제로 드라마를 만든 데 대해 “처음에 작가가 기획하고 준비한 대본을 받았을 때 야구만 다룬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 제일 중요했다”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와 변화를 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현실에서 눈을 감아버리는 것들을 단장이 와서 헤집고 들춰내며 변화시키는 모습이 대본에 잘 담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배우들도 드라마이기 때문에 현실을 최대한 반영하면서도 실제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면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 여성 최초 프로야구 구단 운영팀장 역을 맡은 박은빈은 제작발표회에서 “국내 프로야구단 가운데 실제 여성 운영팀장은 없었지만 드라마를 통해 여성 운영팀장의 모습을 보여주면 훗날 어린 친구들이라도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드림즈 구단주 권경민으로 분한 오정세도 드라마의 다양한 팬층에 대해 “나도 야구를 잘 모르지만 연기에는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야구팀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현실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를 이겨내는 기쁨을 시청자들도 같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