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오락실은 아이들에게 컴퓨터에 대한 친근함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1980년대 경험한 전자오락실을 소프트웨어와 자신이 첫 대면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놀이는 과학으로 가기 위한 길목에 놓여 있었다.
조기원의 시 ‘풍자시대에서-video의 꿈’(1989)은 17인치 모니터를 소재로 1980년대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의 애인은 전자오락실에서 갤러그 10만점을 역사적으로 돌파하고 있었다.…………치지직 칙…………경찰은 결코 여러분과의 충돌을 원치 않습니다.” “도시재개발 사업이란 허울좋은 이름 아래 도시 빈민들의 생존권이 무참히 악 치지직 칙……….”
모니터에 점멸하는 세상사의 이미지를 파노라마처럼 상영해 풍자적 효과를 노린 시다. 전자오락 ‘갤러그’에 탐닉하는 애인과 공권력에 무참히 짓밟히는 철거민들의 모습이 “치지직 칙”이라는 기계적 소음을 통해 연결된다.
이 시기 전자오락을 접한 사람이라면 작품에 등장한 게임 ‘갤러그’가 반갑게 느껴질 것이다. 2000년대 ‘스타크래프트’에 비견할 만한 1980년대의 국민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대학가 앞에 막걸리집과 서점을 몰아내고 전자오락실이 대거 들어섰다. 대학생들도 거리의 투쟁만큼이나 전자오락에도 몰두했었다. 1983년 고려대 앞에는 전자오락실만 20여개가 넘었다. 통기타와 생맥주가 1970년대 대학가 문화의 특징이라면 1980년대는 전자오락이 그 아성을 넘본 셈이다. 더구나 전자오락은 나이를 불문하고 영향력 있는 놀이문화였다. 본격적으로 전자오락이 한국에 상륙한 시기는 1980년 전후로 판단된다.
1978년 ‘브레이크 아웃’이나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심상치 않은 인기를 보이더니, 1982년 ‘갤러그’가 등장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전자오락실이 대유행하기 시작한다. 당시 오락실 게임의 8할이 ‘갤러그’였다. 탁구대 생산 감소와 서점 감소 사태의 원인을 전자오락실에 돌리는 신문 독자투고가 많았다.
1980년대 대학가에 퍼진 새 오락문화
1979년 서울시내 900여곳이었던 전자오락실이 1982년 3570여곳으로, 1983년에는 급기야 6000여곳으로 확대되었다. 전국적인 통계는 집계가 불가능하다. 전자오락이 인기를 끌자 청소년 교육을 걱정해 ‘전자독버섯’, ‘컴퓨터에 빼앗긴 영혼의 활자’ 등의 우려가 터져나왔다. 국무총리 산하 사회정화위원회가 거리질서를 명목으로 전자오락실을 단속해 폐쇄했으나 줄기는커녕 늘어나기만 했다.
새로운 오락문화에 대해 사회 전체가 당혹스러워했다.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전자오락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최초 이의제기는 사실 교육문제가 아니다. 2차 석유파동의 여파 속에서 전자오락실만이 절전하지 않는다고 여론의 야단을 맞았다. 또 다른 이의제기는 전자오락실에서 훼손된 동전이 유통되는 문제였다. 10원짜리의 한 쪽을 갈아 50원짜리로 인식시키는 일이 잦았다. 오락실 업주의 입장도 곤란한 것이지만 사회적으로 동전 훼손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 시기 오락실은 오락기를 아무 장소에나 갖다 놓는 방식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문방구나 허름한 식당도 오락실이 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오락실은 통제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유기장법에 허가된 전자오락실은 1974년 35곳, 1980년 허가된 곳은 43곳에 불과하다. 일부 유원지 등의 경우를 제외하면 실제 허가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허가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전자오락실이 어떤 공간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허가의 기준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79년 6월 보사부의 유권해석을 통해 지방정부 재량에 맡겼지만, 신규허가는 여전히 요원했다. 1980년대 무허가 전자오락실의 범람문제에 대해 오락실 업주들의 무법성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새로운 테크놀로지 컬처를 왜 기민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는가를 비판해야 한다.
‘갤러그’를 놓고도 어떤 이는 이 게임이 소련인들 같은 공산주의적 호전성을 길러낸다고 논평하는 반면, 어떤 이는 빨간 마후라가 되어 적기를 격추시키는 기상을 길러보자고 논평하기도 했다. 1986년 ‘농민반란’(원작명 いっき, 썬소프트)이라는 게임은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전량 수거되었다. 이 게임이 세무공무원과 농부의 싸움을 다루는 만큼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일본풍 배경으로 나쁜 닌자와 싸우는 할아버지 이야기 정도의 내용이었다. 이는 게임을 플레이 해보지도 않고 넘겨짚어 평가해버리는 사회의 무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정부도 애를 쓰긴 했다. 오락실 업주들의 양성화 요구가 거세지자 보사부는 옆 사무실에 오락기를 설치해 놓고 나름대로 연구했다고 한다.
전자오락기판을 판매하던 청계천 제조업체들이 누적판매 300만대를 앞두고 있었다.(<매일경제>, 1982. 12. 24. 7면) 오락실이 유행한 지 3년도 지나지 않아 이룬 실적인 만큼 놀랍다. 국내에만 300만대의 오락기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라면 납득이 가지 않지만, 청계천의 기술자들이 해적기판을 복사해 동남아 등지로 다시 수출했기 때문에 가능한 수치였다. 이로써 드러나는 사실은 당시 유통되던 전자오락실 기판이 소프트웨어만 외제였을 뿐, 실은 ‘메이드 인 청계천’이라는 사실이다. 청계천의 전자조립업체들은 대량주문을 소화할 만큼 많은 인력과 고급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새로운 게임기가 나오면 5일 안에 초정밀 필름을 입수하여, 칩보드를 풀어서 금성반도체로 다시 구성해 해적기판을 만들었다. 집적회로가 카피되는 과정에서 보드가 상당히 커졌다. 좌우로 회전하게 되어 있던 볼륨조절 보드에 자동차 중고 핸들을 가공해 조립하여 레이싱 게임의 조이스틱으로 사용하게 하는 등 말도 안 되는 수법이었지만, 일제나 미제의 오리지널 게임기의 성능을 거의 그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능력도 보여주었다.(홍일래 대표, 한국 전자상우회 회장(1987~1992)의 증언, <게임문화>, 2012년 6월호) 당시 기술자들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게임기판 제작 실력을 점쳐보기도 했다.
‘메이드 인 청계천’의 인력과 기술
‘갤러그(gallag)’의 원 게임 명칭은 ‘갤러가(galaga)’다. 하지만 당시 청계천에서 주로 복제하던 기판이 해적기판이었기에 하단의 남코사(Namco) 타이틀이 사라지고, 제목도 ‘갤러그’로 표시되었다. 통상 해적판의 경우 오리지널에 비해 조악한 품질로 몇 년이 지나면 작동하지 않거나 비디오나 오디오 출력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갤러그 기판은 갤러가 기판과 비교해 성능이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http://triosdevelopers.com)
초창기 전자오락은 그래픽 성능이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음의 효과와 함께 게임의 묘미를 살리는 경향이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나가게 되는 미사일은 그래픽으로 보자면 볼품없는 작대기지만, 대신 사운드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게임의 재미를 유도했던 것이다. 전자합성음이 안겨주는 매력 때문에 ‘전자오락=뿅뿅뿅’이라는 등식이 생겼다. 대학가에서는 동요 ‘뽀뽀뽀’를 개사해 “아빠가 출근할 때 뿅뿅뿅, 엄마가 안아줘도 뿅뿅뿅”이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오락실업주들은 보란 듯이 스피커를 밖으로 달아 호객행위를 했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에게 전자오락의 사운드는 불쾌감을 주었다. 이제 공장 소음과 자동차 모터소리에 이어 합성 전자음의 소음과 같이 살게 된 것이다.
업자들의 인터뷰에 의하면 연세대보다 이화여대가 더 벌이가 좋았다고 한다. 숙명여대 근처에는 여대생 전용의 오락실도 개설되었다. 이화여대생 강보영은 다음과 같이 인터뷰했다. “작은 브라운관에서 쫓고, 달아나고, 잡히는 과정을 되풀이하면도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과 스릴을 맛본다.”(<경향신문>, 1983. 3. 10. 11면) 이를 여성 특유의 집중력과 연관시켜도 좋을 것 같다. 기존 사회는 전자오락에 열광한 여대생들을 새로운 세대로 규정하는 듯 보였다. 여대생들의 신풍속도를 다룬 책을 내면서 <갤러그 대학의 여대생들>(신원문화사, 1983)이라는 표제를 지어 넣기도 했다. 전자오락의 문제점으로 ‘자폐적 집중력’이 제기되었다. 상호 대화보다는 홀로 게임을 한다고 비판받았다. 새로운 세대는 궁한 담소보다는 점수가 확실히 기록되는 게임이 더 낫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장병림 교수는 전자오락이 기억력, 상상력, 추리력, 숫자감각, 공간지각력 등을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국산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 계획 불발
1983년 7월에는 10대 소녀가 게임기 내부의 동전을 훔치려다 감전사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2중 절연장치가 되어 있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소녀의 호주머니에는 50원짜리 53개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양성화가 시급히 필요했다. 왜색 일색인 게임 내용에 대해서도 점점 반발이 커졌다. 이렇게 게임기의 안전성과 소프트웨어의 왜색문제는 자연스럽게 표준형식 도입과 국산화 논의로 이어졌다. 정부는 1983년 8월 16일 게임기 양성화 조치를 취했다.
게임업계는 정부의 표준형식을 준수하고 특소세를 납부하겠다며 양성화 정책을 반겼다. 또 국내 실정에 맞는 스포츠와 위인을 소재로 한 게임을 개발하기로 약속했다. 손기정, 심청전과 이순신, 애국가를 테마로 한 게임 제작계획을 세웠다. 게임 난이도도 대폭 하향 조정해, 플레이 타임을 10~30분 사이로 맞추겠다고 약속했다. 1984년 삼영전자가 6000만원을 투자해 태극마크가 새겨진 비행체를 조작하는 ‘제7의 전투기’라는 게임을 만들었다고는 발표했으나 이후의 기록은 없다.
정부에서 양성화 정책을 내놓자, 일부 업체는 형식승인 비용과 세금납부에 난색을 표한다. 그들은 게임기판 제작에서 컴퓨터 제조로 눈을 돌렸다. 당시의 기술적 수준에서 게임기와 컴퓨터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이로써 새로 등장하는 개인용 컴퓨터 수요를 감당할 동력을 오락기 기판 제조의 경험에서 수혈 받았다. PCB 제작기술은 산업현장에 쓰일 전자기기들을 개발하는 기술로도 전환되어 갔다. 수심측정기, 산불탐지기기가 만들어졌다. 전자오락실 붐으로 인한 게임기판 제작 경험은 반도체의 대량유통구조 발달을 견인한 것으로 오늘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양성화 정책은 무허가 업체들을 방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컴퓨터 전자제품에 대한 이해가 없어 정교한 기준을 만들지 못하고, 오락기 캐비넷에 대한 통일성만을 간신히 맞췄다. 결국 게임업체가 의욕을 갖고 추진하던 게임 소프트웨어 국산화 계획이 중단되어버렸다. 신제품 개발이 없자 구형 모델만을 재생산한 게임기가 농촌 등지로 퍼져나갔다. 대중들은 같은 게임이 반복되자 싫증이 났다. 1984년에는 기존의 제작업체 2000개가 500여개로 줄었다. 만약 양성화가 안정적으로 진행됐다면,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이순신 게임을 한국 게임사의 시초로 두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1983년 당시 개발하고 있던 32K ROM 기술을 금성, 삼성, 대우, 아남전자, 한국전자, 현대전자 등에 이양했다. 세계적으로 전자오락기판 칩이 64K ROM으로 바뀌는 추세에 따라 수출이 어려워지자 민간으로 기술을 이양했다. 반도체 사업의 발달이 세계 게임사업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자오락실은 아이들에게 컴퓨터에 대한 친근함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1980년대 경험한 전자오락실을 소프트웨어와 자신이 첫 대면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놀이는 과학으로 가기 위한 길목에 놓여 있었다.
1983년 유성은·성진 형제는 소련 첩보위성을 보겠다고 가출했다가 5일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형제는 밤까지 위성을 기다리며 낮 시간에는 전자오락을 했다고 한다.(<경향신문>, 1983. 1. 24.) 아마도 갤러그였을 것이다. 모니터 속 흩뿌려진 도트를 또 다른 밤하늘의 별로 이해한 이들 형제를 갤러그 세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오영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