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민의 문화의 발견]라이트노벨 영향력 ‘정독’할 시점이다

우리가 새로운 흐름에 대한 연찬 없이 지내는 동안 일본의 라이트노벨 시장은 엄청나게 커졌고 이제는 한국의 서점에서도 상당히 많은 지분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뛰어난 에스에프를 가늠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라면,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을 것 같다. 뭔고 하니 ‘그것이 얼마나 논리적인가’와 ‘지금-여기를 얼마나 잘 형상화하고 있는가’이다. 전자의 경우 ‘<스타워즈>는 에스에프인가 아닌가’를 비롯한 많은 논쟁들이 가르쳐 주었듯 비아냥성 뒷말이 나올 수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에스에프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이라는 물음에 어슐러 르 귄이 늘 거론되는 이유는, 이 노작가가 미지의 우주를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철학적 성찰을 통해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 이를테면 전쟁이나 환경, 인간복제에 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리할수록, 그것이 현실적일수록 상찬을 받고 문학성을 획득한다. 라이트노벨 작가이자 평론가이기도 한 오쓰카 에이지는 <캐릭터 소설 쓰는 법>에서 르 귄과 같은 에스에프 소설가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고 적었다. 비현실적인 소재를 사용하고 비논리적인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기반한 ‘사생’(寫生)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한 대형서점의 라이트노벨 진열대. | 박송이 기자

국내 대형서점을 점령한 라이트노벨
한편 그는 라이트노벨의 기원을 197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한 주브나일(juvenile·청소년) 소설과 10대 소녀 대상의 사랑과 성을 다룬 코발트문고에서 찾았으며 1988년에 등장한 스니커문고(주니어 소설)가 현재 라이트노벨의 특징을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여겼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1990년대에 이르러 양질의 라이트노벨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하자, 오쓰카 에이지는 이 작품들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허구(혹은 가상현실)를 ‘사생’(寫生)한다고 보고, 이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 작품들과 구분하고 있다. 즉, 장르적 범주에서는 같은 에스에프 소설이더라도 ‘현실’에 기반하느냐, ‘허구’(가상현실)에 기반하느냐에 따라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두 방향으로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예로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을, 후자의 예로 타니가와 나가루의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읽어 보면 좀 더 쉽게 감을 잡을 수 있겠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쓰카 에이지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과는 또 다른 ‘게임 같은 소설’에 대한 분석의 이론적 틀을 마련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지난 1092호에서 했던 얘기를 떠올려 보기로 하자.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주인공인 케이지는 ‘다음날 전장에 투입→같은 전투 반복→개죽음→눈을 뜨니 막사 앞→같은 전투를 반복하지만 어제 싸운 경험을 바탕으로 더 강해져 있음→그래도 개죽음→눈을 뜨니 또 막사 앞’을 끝없이 반복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 기반한) 에스에프라고 하기에는 다소 이상하다고 얘기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타임슬립하는 것은 빌 케이지의 의식뿐이기 때문이다.” 즉, 의식(기억)은 계속해서 이어지지만, 오늘 전투력이 레벨업되었더라도 어제로 타임슬립하는 순간 몸의 기능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고 봤다. 하지만 케이지의 무한루프를 게임적 리얼리즘에 기반한 에스에프로 본다면 어떨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크게 유행했던 게임 가운데 <스트리트 파이터Ⅱ>가 있었다. 류와 켄을 비롯한 캐릭터 여덟 명을 골라 플레이할 수 있는 대전형 격투 게임인데, 종래의 게임들이 1레버 2버튼을 쓰던 것과 달리 <스트리트 파이터Ⅱ>는 1레버 6버튼을 사용해야 하는 등 조작법이 복잡했다. 당연히 이 게임을 처음 플레이했을 때는 시작과 동시에 정신없이 얻어맞은 다음 ‘GAME OVER’라는 문구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캐릭터가 허망하게 죽음을 맞자 오기가 생긴 나는 다시 동전을 넣고 처음부터(리셋)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적에게 한두 번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신속하게 개죽음을 맞는 운명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대전 시작→개죽음→다시 동전 투입, 리셋→같은 대전을 반복하지만 아까 싸운 경험을 바탕으로 더 강해져 있음→그래도 개죽음→다시 동전 투입, 리셋’의 과정이 수십 번 반복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캐릭터를 조작하는 데 익숙해졌고, 복잡한 커맨드(동작을 지시하는 명령)를 통해 마침내 필살기를 구사하여 간단히 적을 물리치기에 이르렀다. 이 대목,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루프와 흡사하지 않나. 그렇다면 <엣지 오브 투모로우>와 원작인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은 ‘게임의 비유’로서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게임 같은 수법에 전면적으로 의거하면서, 역으로 그것을 이용해 이야기 속에서 ‘게임적=메타 이야기적’ 경험을 불러들이는 것을 시도한 소설”인 것이다.

한국소설 경쟁력이 약해진 이유는?
책 한 권을 통째로 요약하려니 설명이 어려워졌는데, 게임적 리얼리즘이니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니 하는 게 뭔지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실은 나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오쓰카 에이지든 아즈마 히로키든, 누군가가 라이트노벨처럼 “가볍고 마이너하며 독자층도 한정된 오타쿠들의 문학”을 진지하게 바라봤고 그 세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왜 지금 (일본의) 젊은 세대가 이러한 이야기(라이트노벨)에 열광하고, 어떻게 그것을 2차, 3차로 확장하여 소비하는가에 대한 분석이 가능해졌으니까. 아즈마 히로키 역시 “하이컬처다 서브컬처다, 학문이다 오타쿠다, 예술이다 엔터테인먼트다, 라는 구별 없이 자유롭게 분석하고 자유롭게 비평해 보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썼다고 한다.

김홍민의 문화의 발견

“라이트노벨? ‘오덕’들이나 읽는 만화 같은 소설이잖아” 하고 치부하고 말면 그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흐름에 대한 연찬 없이 지내는 동안 일본의 라이트노벨 시장은 엄청나게 커졌고 이제는 한국의 서점에서도 상당히 많은 지분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국내 대형서점의 소설 매대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그리고 라이트노벨로 구분돼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라이트노벨은 한국의 독자(아마도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이고 장차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그에 대한 논의가 조금쯤은 필요한 시점이 아닐지.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장르소설도 라이트노벨 같은 흐름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논의도 없다가 뒤늦게 ‘한국의 스티븐 킹을 키워야 한다느니’, ‘한국의 서점 매대가 외국 추리소설로 뒤발되어 있다느니’ 하는 개탄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던 기억이 난다. 9월 1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 소설의 재미와 경쟁력이 떨어진 결과”와 “영상에 익숙한 독자들은 장르소설을 찾는데 그 분야에서 특히 국내 소설의 경쟁력이 약하다”는 대목을 보며 서글퍼 한 이가 나 혼자만은 아닐 것 같기도 한데. 아아 가을인가.

<북스피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