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기본소득은 민주주의의 기초”

카티야 키핑 독일 좌파당 공동대표 “노동자들 힘 발휘 위해 필요” 강조

“국회의원들에게는 자본이나 이해집단의 로비에 굴복하지 말라고 세비를 지급하면서 왜 공화국의 평범한 시민들은 경제적 기반 없이 독립적일 것이라 기대하죠?”

카티야 키핑 독일 좌파당 공동대표(38)가 11일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기본소득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시민’과 ‘공화국’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세비를 지급받는 것처럼 모든 국민이 노동과 무관하게 기본적 생계를 보장받을 때 정치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삶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실업대책’을 넘어서 ‘위협 받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책’이었다.

좌파당은 2013년 제18대 독일 연방 하원 총선거에서 64석을 차지한 원내 제3당이다. 기민당-사민당-기사당 연합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제1야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대정부 질의를 통해 독일 정부의 1900년대 나마비아 집단학살에 대한 사과를 이끌어냈다. 카티야 키핑 대표는 2005년 22세의 나이로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3선 의원이다. 그는 독일에서 기본소득운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지난 7일~9일 서울에서 열린 2016 세계기본소득 총회와 노동당이 초청한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키핑 대표와의 일문일답.

카티야 키핑 독일 좌파당 공동대표가 1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를 찾아 기본소득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지난달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국민투표가 실시됐지만 찬성 23%로 부결됐다. 부결된 이유 중 하나는 ‘스위스는 이미 충분한 복지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유럽은 20세기에 복지국가를 구축했다. 21세기에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일을 예로 들겠다. 독일은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과 비교하면 복지제도가 잘 짜여진 편이지만 지난 10년간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2005년 실시된 ‘하르츠4’ 개혁을 통해 기존의 복지는 해체됐다. 장기실업자가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조치에 따라야만 한다. 노동청에서 제공하는 직업을 수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을 강제하는 사회다. 사회보험과 연금도 개악됐다. 세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간제로 일하는 사람이 노후에 받게 되는 연금은 빈곤선 이하 수준이다. 반면 높은 임금을 받고 집도 몇 채씩 있는 대기업 매니저가 받게 될 연금은 굉장히 높다. 연금은 ‘기여형(자신이 돈을 낸 만큼 돌려받는 것)’ 속성이 높지만 전반적으로 사회복지의 재분배 기능이 약화됐다. 게다가 빈곤선 이하의 사람들에게만 복지를 제공하면서 선별과정에서의 낙인효과로 인한 문제가 크다. 하르츠 개혁은 단순히 복지액수를 삭감한 정책이 아니다. 노동시장에 대해 나쁜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더 많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고, 자신의 존엄을 위협하는 노동이나 나쁜 일자리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쁜 일자리가 확산됐다. 정치에 참여하고 가족생활을 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노조활동이나 집회에 참여하기도 어려워졌다. 삶이 노동에 예속되고 자율성이 떨어졌다.”

좌파당은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1000 유로(독일의 빈곤선은 약 830 유로)씩 지급하는 기본소득 법안을 추구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어떤 변화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일단 개개인은 삶에 대한 걱정이 줄어든다. 이로 인해 사회의 환경, 민주주의의 조건 자체가 바뀔 것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노동시간을 단축할 것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쓰고, 더 많은 시간을 사회봉사에 쓰고, 더 많은 시간을 책 읽는 데 쓰고, 사람들은 더 현명해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본소득이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본다. 우리는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형식적 권리를 갖고 있지만 물질적 뒷받침이 없다면 형식적 권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집회·시위의 자유는 굉장히 중요한 권리다. 시청 앞에서 집회가 열리는데 시청까지 타고 갈 교통수단에 대한 요금을 지불할 수 없다면 이 집회와 시위의 권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기본소득은 그런 면에서 국가가 조성하는 파업기금이라 할 수 있다. 국회의원에게는 자본이나 이해집단의 로비에 굴복하지 말라고 세비를 지급하면서 왜 공화국의 평범한 시민들은 경제적 기반 없이 독립적일 것이라 보는가?”

‘작은 정부’를 구상하기 위해 기본소득이 거론되기도 한다. 모든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대신, ‘학교’나 ‘병원’ 등 공공 인프라를 구축하거나 ‘교사’나 ‘사회복지사’를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을 줄이도록 복지제도를 개편하는 것이다. 핀란드 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이 이런 비판도 받는다. 이런 것도 기본소득으로 볼 수 있을까.
“핀란드 정부가 무언가 구체적으로 한 바는 없지만 독일 좌파당에서 계속 주시하고 있다. 기본소득 개념의 납치(hijack)가 계속 이뤄지고 있다. 핀란드 정부가 말하는 정책은 기본소득이 아니라 우파 포퓰리즘 정책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더라도 유치원을 만들고 운영하는 예산이 삭감돼서는 안 된다. 유치원은 더 늘려야 한다. 유치원이 없다면 시간제 일자리에 종사하는 사람이 혼자 아이를 키우기 어렵다. 엄마를 도와준다는 것 외에 더 중요한 역할도 있다. 바로 가난한 아이와 부유한 아이가 같은 유치원을 다니면서 사회통합을 이뤄내는 것이다. 여기에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엄마는 단지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고 데리고 오는 것 이상은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인공지능 시대의 실업대책으로도 거론된다. 산업사회에서 노동과 민주주의는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는 것이 노동자들이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실업을 인정하고 기본소득으로 생계를 해결하도록 한다면 노동자들의 정치적 힘이 약화되는 것이 아닐까.
“기술혁신을 반대하지 않는다. 기술혁신이 노동시간을 단축한다는 점에서 환영한다. 물질적 생산과 관련된 일자리는 줄어들겠지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소통과 관련한 일자리는 더 많이 생길 것이다. 교육이 대표적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사람들이 덜 일할 테니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좋지 않은 일자리와 관련해 기술혁신이 촉진될 것이다. 일자리의 재분배가 중요하다. 지금 일부는 일자리가 없는데 일부는 초과노동을 하고 있다. 물론 기본소득이 도입된다고 바로 민주주의가 진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소득 제도가 조직노동과 활성화된 진보정당과 결합할 때 민주주의와 사회 진보에 우호적 조건이 만들어진다. 물질적 보장이 약해지면 저항권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다. 노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노동자들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을 마련하려면 막대한 재정이 든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는 데 동의할까.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다. 다수가 원하면 동의하지 않더라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빈곤선 이하로 살겠느냐’고 동의를 받지 않았다. 왜 부자의 세금에 대해서만 동의를 구하는가? 좌파당은 상위 30%가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고 하위 70%가 더 이익을 보는 모델을 구상하고 있다. 물론 상위 30%는 세금을 더 내겠지만 기본소득 정책으로 인한 사회통합 효과를 생각하면 그들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다. 기존의 복지제도 역시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효율성을 위해 건강보험, 연금보험 등을 통합해 ‘시민보험’으로 운영하는 계획이 있다. 스위스의 경우 역사상 국민투표가 가결된 적이 없고 무엇보다 진보적 언론이 없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독일에서 기본소득은 어느 정도의 논의 단계인가. 앞으로의 구체적 계획은 무엇인가.
“정당 중에서는 아직 어떠한 정당도 기본소득을 확고한 당론으로 정한 곳은 없다. 좌파당과 녹색당의 경우 다수 의원이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녹색당은 당 강령으로 채택하려다 찬성 40%, 반대 60%로 부결됐다. 좌파당은 기본소득에 대해 논의한다는 강령이 있으나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가 벌어지지 않았다. 기본소득은 모든 정당이 함께 해내야 하는 만큼 나쁜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 인도, 나미비아 등 유럽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미있는 실험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에도 기본소득이 도입됐으면 좋겠다. ‘한국에서도 하는데 독일은 왜 안 하느냐’고 말할 수 있으니까. 세계적 차원에서 연대하고, 납치된 기본소득의 원래 취지를 되찾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