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우리에게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임동확 시집 ‘매장시편’은 시인이 겪은 80년 5월에 대한 진혼곡이자 살아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노래다. 몸으로 쓴 시. 몸의 기억을 토해 낸 시들은 중음신이 되어 광주를 떠돌고 있는 원혼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것이다. 내림굿을 받은 무당처럼 써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누구도 그 말만은 삼가 왔지만
우리들 모두 숨겨진 가해자라는 것을
살아 있음이 결코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임동확 <아무도 그 말만은 하지 못했다> 중

36년이 지났다. 일제 강점 기간과 겹치는 시간이다. 올해만 넘기면 적어도 변절이나 타협을 하지 않은 채 그럭저럭 살아온 셈이 된다. 한순간의 이익이나 명예 때문에 제 자리가 아닌 데를 기웃거리지 말자, 일생의 치욕을 만들지 말자는 마음으로 임동확은 36년을 살아왔다.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국문과 2학년 임동확은 ‘사월의 동산을 적시던 은밀한 등꽃 향기’에 취해 있었다. 때로는 혁명가가, 때로는 시인이 되고 싶은 꿈 많은 청년이었다. 그 해 광주에도 봄은 왔고 꽃도 피었으며, 햇살은 눈부셨다. 5월 17일까지는.

임동확 시의 뿌리는 1980년 5월 광주다. / 박상미

5월 18일. 공수부대의 군화 발자국 소리와 함께 광주는 순식간에 학살 현장으로 변했다. 스물한 살 임동확은 광주 시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몸으로 겪었다. 상상한 적 없기에 악몽에도 등장 못할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자 어느새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장갑차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눈앞에서 어린 친구들이,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평생 치유될 수 없는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같이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죽은 이들에게 그는 가해자로 남았다. 스스로 가해자의 삶을 택했다.

임동확 시집 ‘매장시편’을 읽으면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풍문으로만 떠돌던 소문의 실체를 시의 언어로 만나게 된다. ‘매장시편’은 시인이 겪은 80년 5월에 대한 진혼곡이자 살아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노래다. 몸으로 쓴 시. 몸의 기억을 토해 낸 시들은 중음신이 되어 광주를 떠돌고 있는 원혼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것이다. 내림굿을 받은 무당처럼 써야만 했다.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작시로 묶은 첫 시집 ‘매장시편’에서부터 마지막 시집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까지 임동확 시의 뿌리는 5월 광주다.

‘피 흘리는 전쟁’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광주를 떠날 수 없었고, ‘피비린내 가득한 거리’를 견딜 수 없었지만 끝까지 광주를 지켜야 했던 그는 항쟁이 끝난 후 교도소에 수감된다. 출소 후에는 ‘3년 동안을 군대생활’로 메웠다. 그 후에는 ‘해남 대흥사 암자에 은거’하다가 ‘9년 만에 대학 졸업장마저’ 손에 쥐었다. 하지만 그 때 광주에서 ‘사랑의 전부’를 보았고, ‘사랑의 최후’를 목격했다고 말한다. ‘모두가 주인이 된 거리의 시가행진’을 여전히 기억하고, ‘그날의 궐기대회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믿고 있다. 광주의 주인이었던 자들은 누구도 죽지 않았다. ‘아무도 지지 않은 채 푸른 은행나무 이파리로 흔들리고 있음’을 그는 오늘도 확인하고 있다.

그 후 시인으로 살면서 시로서 살아남은 자의 빚을 갚고 있다. 80년 5월 광주의 현장을 증언해내는 것만이 가해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고해성사였다.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 전남도청에 남아 저항하던 시민군을 체포해 연행하고 있다. / 정남영 <경향자료사진>

35년 후, 임동확이 받은 편지.
오빠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저씨, 선생님, 시인님 등 여러 호칭을 생각해 봤지만 그냥 오빠라고 부를게요. 왜냐하면 2014년 오늘이 아니라 1980년 5월의 전남대학교 2학년생인 오빠에게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장시편’의 시 속에서 오빠의 친구들과 이웃들과 어린 청소년까지 5·18 민중항쟁으로 죽어간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었던 것일까’라는 시에 나오는 여고생은 교복을 입은 채 헌혈하러 가다가 어느 길모퉁이에서 죽었고, 깃발 든 어린 중학생은 넷째 날 죽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날 내가 그 길을 지나고 있었다면 나 또한 교복을 입은 채 주검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이런 사람을 못 보셨나요’라는 시에는 더 안타까운 주검도 있었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고, 죽은 날짜도 알 수 없고,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주검들 말입니다. 오빠는 이런 죽음 하나하나를 일기장에 기록하면서 “내 묵은 일기장 속에선 언제나 썩은 피 냄새 같은 악취가 났었네”라고 시에 쓰셨습니다. 2년 있으면 나도 오빠와 같은 나이인 대학 2년생이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오빠나 오빠의 책속에 나오는 청년들처럼 자유니 민주니 역사니 하는 것들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보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나 ‘매장시편’을 읽으면서 지금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도 불의와 맞서 싸우다가 죽어갔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폭력이나 총칼로 꺾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저도 5·18 민중항쟁의 숭고한 뜻을 고민해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그날의 진실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매장시편’ 속의 수많은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부분발췌)
-2014년 5월 18일. 김포외국어고등학교 조혜인 올림.

이 편지를 받은 날, 스물한 살 임동확으로 돌아가 울지 않았습니까.
“울었습니다.(웃음) 그날의 현장에 선 기분이었습니다. 특히 ‘4·16 대재난’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그랬습니다. 과연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묻는 아침이었기에 그저 환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조혜인양의 편지는 2014년에 5·18 민중항쟁 서울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5·18 기념 서울 청소년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빚을 많이 갚으셨습니다. 19세 소녀가 ‘매장시편’을 읽고 5·18 민중항쟁의 숭고한 뜻을 고민하게 되었다면요.
“‘매장시편’은 80년 광주 5월이 이대로 묻힐 수 없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썼습니다. 그 속에서 인류 보편적 이상과 가치를 찾고자 했던 나의 시적 목표가 들어 있는 연작시들입니다. 저는 여전히 80년 5월을 쓰고 있고, 앞으로도 그때를 쓸 것입니다. 빚진 자일 뿐, 빚 갚은 자가 될 순 없습니다.”

80년, 전남대 국문과 2학년 임동확의 얘기를 해보지요. 스물한 살 청년은 문학회 회장 등 전남대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교수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대자보도 직접 썼다구요.
“그때 제가 전남대 ‘용봉문학회’ 회장이었어요. 박몽구 시인 등 복적생 선배들과 함께 당시 구속되어 있던 <김지하 문학의 대낮>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또 군사정권 하에서 만들어졌던 ‘학도호국단’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민주적인 학생회를 만들기 위해 조직된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 기획부 차장으로 활동했지요. 여기서 일하면서 ‘교수님들에게 드리는 글’을 썼는데, 많은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5·18 이전 도청에서 열린 ‘민주화 성회’에 참석해 주셨죠.”

군부세력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전남대 정문 앞에서 모이자는 약속을 했지만, 운동권 지도부들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 같습니다.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세력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전남대 정문 앞에서 모이기로 했고, 바로 그 날이 5월 18일이었지요. 한동안 집에 못 내려가고 학교에서 지내다가 잠시 광주에서 가까운 집에 갔을 때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집을 나서려는데 아버님이 마당을 비로 쓸고 계셨어요. 아버님께 말씀드렸죠. ‘역사의 배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약속을 지키게 해주세요. 대신 어떤 경우라도 다치지 않고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설사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늘 평소 자식들의 편에서 이해하고 응원해주었던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전남대 정문으로 가서 시위대에 합류했습니다.”

군이 시민을 향해서 발포를 한 게 21일이었던가요.
“21일에 군은 시민을 향해서 첫 발포를 했습니다. 그건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국민을 지켜주어야 할 국가가 국민과의 약속을 깨고 국민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가장 기본적인 약속을 국가가 먼저 깬 것이죠.”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까.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잔인한 폭력에 맞선 것은, 결코 거기에 굴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자존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무엇이 되어’라는 시에 보면, ‘둘째 날, 나는 미처 피하지 못해 중앙초등학교 담벼락을 넘었다/ 행여 그 학교에까지 쫓아와 수색할까 봐 이층 복도에서 관망하다 황급히 5학년 몇 반 교실로 뛰어들어갔을 때/ 공포에 질린 어린 여자애들이 지르던 비명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들려 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날의 얘기를 더 들을 수 있을까요.
“5월의 거리에서 장갑차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시위대를 이끌었고, 곤봉을 든 공수부대에 쫓겨 중앙초등학교로 들어갔어요. 다친 다리를 끌고 교실로 갑자기 뛰어든 저를 보고 여자아이들은 더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죠. 공수부대가 포위하고 있어서 학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새벽이 되어서야 학교 담벼락에 붙어 있는 개인병원으로 숨어들어갔어요. 의사가 저를 자취방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어요. 환자복을 입히고 위장을 해서 앰뷸런스에 실은 다음 공수부대를 피해서 자취방에 데려다 주었어요. 자취방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와 계신 거예요. 광주는 공수부대가 포위한 상태였고, 모든 교통수단이 끊긴 상황이었는데, 제가 죽지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 자전거를 타고 광주 근교에서 전남대학교 앞까지 오신 거였어요. ‘다쳤구나…. 학생들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다 차단됐다. 이제 집으로 가자.’ 다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에 우선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사실 심리적으로 저는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무엇이 혼란스러웠나요.
“집단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어요. 시위대의 제일 앞줄에 서서 싸우다보니까, 우리가 다같이 하나가 되어서 달려들면 총을 든 공수부대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공수부대가 조금만 가까이와도 뿔뿔이 흩어지는 거예요. 앞으로 나갈 때는 전체인데 흩어질 땐 왜 개인인가. 계속 고민했어요. 이 상태로는 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괴로움은 훗날 제 시와 학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우습게도 끝까지 진지를 사수한 생존자로 알려졌다/ 나는 사실 끝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 눈과 귀를 막은 채 불타오르는 전쟁터/ 동료의 죽음과 울부짖음을 외면했다/ 나는 솔직히 비겁자였다. 부어오른 편도선과/ 발목의 부상을 핑계 삼아 전선을 벗어났었다’고 시에서도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시 광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하루 만에 다시 돌아갔죠. 아버지는 말없이 보내주셨어요. 광주 외곽까지 공수부대에 포위된 상태여서 광주로 진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외부에서 무기를 구해서 광주로 진입하는 시민들과 만나서 합류했어요. 학생인 걸 숨기기 위해서 현대건설 노동자 잠바를 하나 주워 입고 도청 진입을 시도했지만, 모든 길이 차단돼서 도청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밖에서 시위를 이끌었죠. 그 마음의 빚이 너무 심해서 오랜 시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단 하루의 공백을 두고 비겁자라고 자탄하는 건 자기 검열이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그 후에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되고 구속되셨지요.
“그대로 끝낼 수는 없었어요. 80년 10월, 추수감사절을 계기로 몇몇 친구들과 제2의 5·18 항쟁을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쳐서 검거되었습니다. 5·18 관련자들을 집단 구금했던 상무대 영창에 있었는데, 제 역할을 못하고 잡혀왔다는 생각에 죽고 싶었습니다.”

자책으로 스스로를 고문했군요. 물리적 고문은 어떻게 견뎠습니까.
“담당 형사가 ‘왜 그랬냐?’ 물어요. 내가 왜 그랬을까, 스스로에게 자문했어요. 답은 하나였습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랬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했죠. ‘배후가 누구냐’ 또 묻길래 ‘내 양심’이라고 답했어요. 다른 방에선 심하게 고문당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저는 안 맞았습니다. 그 형사가 제 말에 공감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도 괴로웠을 겁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모호할 때 심리적 고통은 배가되지 않습니까.
“그도 광주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를 고문해야 하는 건 직업인인 그에게 배당된 임무였겠지요. 그도 괴로웠을 겁니다.”

전남대학교 교수실에서 체포됐다고 들었습니다. 교수가 형사에게 학생 임동확을 인계한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은 못하겠어요. 다음에 합시다.”

수배자들을 숨겨주고 신고하지 않는 게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믿었다는 광주 시민들의 증언을 읽었습니다. 교수가 그런 게 맞습니까. 그것만 확인하고 싶습니다.
“형사가 교수에게 협조해달라고 끈질기게 회유를 했겠지요. 교수가 ‘얼굴 한 번 보세’ 연락이 와서 교수 연구실로 찾아갔습니다. 당연히 교수를 믿었어요. 그런데 그곳엔 형사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교수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시인은 딸들에게도 80년 5월에 겪은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시로만 말하고, 나머지는 가슴에 묻고 살아가려 했는데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렸다며 괴로워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항쟁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청년 임동확을 움직인 힘은 무엇일까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보면, 5월 광주에서 살아남은 증언자들이 한결같이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 또한 그랬어요. 고등학생인 내 남동생도 그 친구들도 시민군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는데도 광주 시민들이 끝까지 저항한 것은 무슨 특별한 용기나 신념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임동확 시인의 시에는 참혹한 절망과 더불어 강렬한 희망의 목소리가 스며 있습니다. ‘희망사진관’의 한 부분을 시인의 목소리로 듣고 싶습니다.
“여전히 우릴 살아 불타게 하는 것들은/ 저 스러질 듯 서 있는 현실의 희망사진관 너머/ 아직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는 낯설음 속에/ 모든 희망들이 추문이 된 바로 이 세월의 그리움 속에/ 끝내 지워지지 않을 무모한 절정의 섬광들로 빛날 뿐.”

‘잊지 말아다오, 희망은 흔들림 없이 어느 곳을 향해 가기보다 대책 없이 어디론가 흘러가면서도 끝내 제 길로 들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그래, 저 난폭하고 무자비한 시간의 횡포들조차 때로 사랑의 불꽃이 되고 사유의 촉수가 되는 것을 믿기에, 나는 예전처럼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구절도 떠오릅니다. 우리에게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희망’이든 끝까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희망’이야말로 우리들 삶과 세계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이니까요.”

광주에서 ‘사랑의 전부’를 보았고, ‘사랑의 최후’를 목격했다고 시에도 쓰셨는데요. 광주 민주화 항쟁은 시인 임동확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광주 시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인간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프랑스혁명보다 뛰어난 혁명이었죠.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혁명입니다. 외국 같으면 그런 상황에선 약탈이 일어납니다. 놀랍게도 광주 시내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도 도덕성을 발휘한 거죠. 5월 정신을 높이 사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지금 5월 정신에 빚진 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그는 지금,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묻어 두겠다는 기억을, 아물어 가는 상처를 마구 헤집어 놓았다. 36년 전 기억을 오늘로 모조리 호출해 놓았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스물한 살 임동확이 되어 금남로를 뛰어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5월의 정신에 빚진 나는, 그에게도 빚을 지고 말았다.

<박상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