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이 안 갚은 돈, 하청이 갚아라

에스콰이어 협력업체들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 폐해로 날벼락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에 물빛호수공원이 있다. 공원 주변에는 상가들이 늘어서 있고, 호숫가는 가을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제법 북적인다. 2차선 도로를 건너니 다른 풍경이 보인다. 허름한 창고형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구두업체 에스콰이어(EFC)의 2차 협력업체인 신양산업이다.

신양산업 입구에 들어서자 공기부터 달랐다. 강한 구두가죽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신양산업의 박상익 대표(57)는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 어느 정도 볼일을 마무리한 박 대표가 기자를 공장 안으로 안내한다. 그는 완성된 구두 밑창 하나를 들고 말했다.

“이거 보이시죠. 이게 구두 안에 들어가는 인솔(안쪽 밑창)이라고 하는 건데, 사람으로 치면 척추에 해당하는 겁니다. 인솔이 모양을 딱 잡고 있어야 신발 모양이 유지되는 거죠.”

공장 내부는 고등학교 교실 2~3배가량 넓이였다. 구두 제작과정에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기계들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넓은 공간에 일하는 사람은 8명뿐이어서 썰렁한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기계는 먼지만 머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10월 1일 경기도 광주시 신양산업에서 한 노동자가 구두 밑창을 다듬고 있다. | 백철 기자

박 대표는 제화업계에서만 40년 가까이 일했다. 2007년 에스콰이어를 퇴직한 이후부터 신양산업을 운영했다. 에스콰이어에서 퇴직하면 에스콰이어 협력업체로 진출하는 게 코스였다. 전직 동료들처럼 그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한창 때는 25명을 고용해 연간 약 150만 켤레를 생산했다.

본사가 상환 못하면 하청업체에 청구
그러나 에스콰이어가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면서 그에게도 먹구름이 몰려 왔다.

2009년 창업주 일가는 사모펀드 ‘에이치앤큐 아시아퍼시픽’에 지분 전체를 매각하고 경영에서 손을 뗐다. 주인이 바뀌었지만 에스콰이어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최근 2년간 100억원대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할 정도로 경영은 악화됐고, 급기야 지난 8월 1일부로 에스콰이어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본사가 어려워지면 협력업체들도 어려워진다. 가장 큰 거래처가 끊기면서 지금은 한 달에 고작 3000~4000켤레의 구두를 생산하는 것이 전부라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받아야 할 대금 2억700만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에스콰이어가 기적적으로 회생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2억여원을 고스란히 날릴 수밖에 없다.

박 대표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건 이것만이 아니다.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외담대) 제도의 맹점으로 인해 본사가 갚아야 할 돈을 대신 갚게 생긴 것이다.

외담대는 일종의 3자 자금회전 방식으로 2001년 한국은행에서 어음거래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 도입했다. 본사는 협력업체로부터 물건을 받고 대신 외상매출채권을 발행한다. 이 채권을 받은 협력업체는 은행을 통해 채권지급일에 자금을 받거나, 그 이전에 채권을 담보로 잡히고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제도 자체는 본사와 협력업체 모두 윈·윈하는 방식이다. 보통 외상매출채권의 만기일은 어음보다 길기 때문에 본사 입장에서는 자금부담이 덜하다. 협력업체도 회사 사정에 따라 널뛰기하는 어음할인율보다 비교적 안정적인 은행 대출금리로 원하는 때에 자금을 받을 수 있으니 좋다.

문제는 외담대 제도에 상환청구권이라는 독소조항이 있다는 점이다. 상환청구권은 은행이 본사로부터 결제대금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 협력업체로부터 대금을 회수할 수 있게 한 제도다. 대기업인 본사가 튼튼하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에스콰이어처럼 본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곧바로 협력업체에 불똥이 튀게 된다.

2008년부터 상환청구권 문제가 대두되자 금융감독원에서는 워크아웃이 진행 중인 기간에는 협력업체의 외담대 상환을 유예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지난해 5월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스콰이어는 워크아웃이 중단되고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태라 에스콰이어 협력업체들은 적용을 받지 못한다.

“납품한 물건값 은행에 빼앗기는 꼴”
에스콰이어 협력업체들의 법률 대리인인 법무법인 태우에 따르면, 에스콰이어 본사가 발행한 외상매출채권의 규모는 약 330억원이다. 이 중 160여개 협력업체들이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것은 289억원 정도다. 일부 협력업체들은 은행에 빚을 갚을 길이 막막해 사실상 ‘도주’ 상태에 있다고 전해진다.

박상익 대표는 “본사에 물건을 이미 다 보냈는데 이제 와서 은행에 그 대금을 빼앗기는 꼴이다. 중소기업인들을 범죄자로 내모는 이런 제도는 하루빨리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에스콰이어 협력업체 대표자의 대부분은 박 대표와 같은 에스콰이어 출신들이다. 이미 회사를 떠난 몸이지만 애사심만큼은 현직 직원 못지않았다. 그런데 협력업체 대표들은 에스콰이어로부터 외담대 제도의 위험성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에스콰이어의 한 협력업체인 ㅇ제화는 2012년 3월 에스콰이어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결제방식을 외담대 방식으로 바꿔달라는 말을 들었다. 어음보다 훨씬 현금화하기 간편하다는 설명에 ㅇ제화는 큰 의심 없이 결제방식을 바꿔줬다.

당시 에스콰이어는 서울 성수동 사옥까지 팔 정도로 자금사정이 좋지 못했다. 에스콰이어가 발행한 어음은 사채시장에서도 유통시키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외상매출채권은 은행에서 바로 현금화할 수 있기 때문에 협력업체들로서는 결제방식을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ㅇ제화 측은 “본사에서도, 은행에서도 외담대 제도의 좋은 점만 설명해줬을 뿐, 상환청구권처럼 협력업체들에게 불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ㅅ업체 관계자는 “외담대에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경우 우리가 변제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면 결제방식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ㅅ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인터넷뱅킹을 통해 외상매출채권을 현금화할 때 약관에 동의하지 않으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했다. 이 약관에 상환청구권이 들어 있었다는 것은 일이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사실상 에스콰이어 본사는 협력업체들이 보내온 330억원어치 물건값을 치르지 않은 채 회사 경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법무법인 태우의 서지숙 팀장은 “에스콰이어의 대주주인 에이치앤큐에 연대책임을 묻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은행의 ‘도덕적 해이’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외담대 때문에 중소기업이 줄도산하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 2008년 신성건설 법정관리 사태 때 외담대 340억원을 갚지 않아 350여개 협력업체가 도산했다. 2012년 건설업계 위기 때는 1000억원이 넘는 외담대가 지급되지 않아 수백개의 협력업체들이 위기를 겪었다. 애초에 은행에서 외담대를 받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한 에스콰이어 협력업체 관계자는 “결과가 어찌됐든 은행은 한푼도 손해보지 않는다. 본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부실대출이 이뤄졌는데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신양산업이 납품하던 1차 협력업체는 은행에 빚을 갚을 방도가 보이지 않자 잠적했다. 신양산업에는 물품대금 대신 완제품 구두가 떠밀려졌다. 포장까지 마친 구두 수백 켤레가 신양산업 창고에 몇 달째 쌓여 있다.

박상익 신양산업 대표는 “저걸 팔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자리만 차지하고 골치가 아프다”며 “지금 없는 경제를 살릴 게 아니라, 현재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먼저 살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