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왜 그들은 ‘사회주의’를 버렸을까

1991년 5월 투쟁, 그리고 소련의 몰락 20년

벌써 20년이다. 1991년, 그해 5월은 뜨거웠다. 노태우 정부 말기였다. 경찰의 진압에 강경대가 사망한 후 주말이면 서울 도심가는 학생과 노동자·시민으로 구성된 시위대가 장악했다. 그리고 분신이 이어졌다. 하지만 변화의 욕구는 금세 사그라졌다. 어떻게 보면 서툴렀다. 군사독재정권의 타도를 외쳤지만 그 후의 ‘대안’은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1991년 5월, 강경대 사망사건 이후 전국의 거리에는 수십만의 학생들이 몰려나와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투쟁은 87년 민주화운동과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해 여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이 지구 반대편 모스크바에서 있었다. 8월 19일 오전 7시. 소련의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소비에트 지도부 선언’이라는 문건을 방송했다. 방송국 앞에는 탱크가 진주해 있었다. 쿠데타다. ‘3일 천하’였다. 쿠데타를 주도한 이들은 체포되거나 자살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 직에서 사퇴했다. 이튿날 소비에트연방은 공식해체되었다. 1922년 12월 30일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70여년 만에 역사의 한 페이지로 돌아간 것이다.

소련의 몰락이 이념 포기의 이유?
사람들의 기억이란 변하기 마련이다. 운동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로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들었다. 이상이고 지향으로 삼았던 사회주의의 종주국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실제 1980년대~1990년대 초반까지 자신의 지향이 사회주의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던 사람은 몇 안 된다. 혹시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하나의 ‘핑계’가 아니었을까.

다른 목소리를 내던 그룹이 없던 것은 아니다. 최일붕 마르크스21 편집자는 당시부터 ‘국제사회주의’ 입장에서 “소련사회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한 변형 형태인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했다”고 주장해왔다. 최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현실사회주의라고 하는 소련사회는 아래로부터 노동자권력은커녕 초보적인 민주적 권리도 없는 사회였다. 당시 소련의 몰락을 환영한다는 자보를 써서 대학가 등에 붙였는데 공식적인 반박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민중당 지도부를 구성했던 이재오 특임장관이나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경우 당이 해체된 뒤, 제도정치권에 적극 뛰어들었다. 운동을 계속한 사람들에게는 ‘변절했다’는 등의 비난을 받았다. 이들이 변신하게 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김문수 지사는 최근 펴낸 언론인 조갑제씨와의 대담집 <나는 일류국가에 목마르다>에서 자신이 사회주의와 결별하게 된 계기를 회고하고 있다. 대학시절 은사였던 안병직 현 서울대 명예교수를 때때로 찾아뵈었는데, 1984년무렵 노동운동단체 ‘서노련’을 결성할 때 안 교수를 찾아갔더니 “그거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당신들(지식인 출신 노동운동가)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안 교수의 주장이었다. “그때 나는 안 교수가 변절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노동자의 삶에 얼씬얼씬 하면서 살아보니 문득문득 그 말씀이 떠올랐다. ‘아 그 말이 결국 맞는가’ 하는.”

당시 문학평론가이면서 <노동해방문학> 주간을 맡았던 조정환 다중지성의정원 상임강사는 “일부 소수이지만 운동 속에서 공개적인 지도부적 위치에 놓이게 되면 실제 본인이 권력진출의 의지를 갖지 않은 경우에도 그쪽으로 기울어지고 동화되는 경향을 보였다”며 “물론 그 전부터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운동 경력을 발판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어떤 분기점이 있다면 1991년 또는 1990년대 초였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소련의 몰락을 어떻게 볼 것인가. 1991년 8월 소련에서 일어난 쿠데타가 불발된 뒤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대자보를 읽고 있는 학생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 이론은 실천의 도구이자 변혁의 방법론이었다. 주로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의 저서가 읽혔지만, 1991년 몰락 이전의 소련이나 동구권 사회주의 교과서도 주요한 이론적 원천이었다. <노동해방문학>이나 <현실과 과학> 같은 잡지는 이론 논쟁의 전쟁터였다. 주로 한국사회의 성격, 이행의 전략과 전술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논란은 치열했다. 이론에서 차이는 현실적 전략·전술에서 차이로 나타난다. 당면한 민주주의 투쟁에서 야당은 연대의 대상일까 아니면 ‘동요하는 보수야당’으로 주 타격 대상이 될까. 1991년 5월, 거리에서 벌어진 투쟁의 이면에서 이 논쟁은 계속되었다.

“한국의 이론 수준,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비합법운동단체에 있었던 모 인사의 증언이다. 익명을 요구한 이 인사는 직접 소련으로 유학을 가서 이론을 공부했다. 한국에서 논의의 근간이 되었던 소비에트 교과서 저자 등을 만나 한국의 논쟁을 소개했다. “깜짝 놀라더라. 한국에 이런 천재들이 있냐고.” 소련유학 당시 그는 거꾸로 된 경험을 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 비합문건을 돌려보는 것처럼 갱지에 타이핑된 하이에크의 저서를 러시아 말로 처음으로 접했다. 그람시나 알튀세르 등 ‘유로코뮤니즘’도 당시 소련 사회에서는 금서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미 당시 소련의 젊은 층에게는 외면받는 형국이었다. 남한에서 온 이 ‘인사’의 관심은 주목을 끌었다. “비유하자면 외국에서 유학온 벽안의 인사가, 우리도 잘 모르는 삼국사기를 줄줄 외우는 것 같은 일이었다.”

90년대 사회주의 인식의 한계는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의 저작들이 읽힌 것은 1980년대 중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정환 강사는 한국의 국지적인 특수한 상황을 강조한다. 1970, 80년대는 급속한 산업화로 노동자의 요구가 분출하던 시기다. 울산과 부천, 부평에 대공장이 세워졌고 철강이나 조선 산업이 발달했다. 어떻게 보면 단어만 ‘남한’으로 바꾸면 맞아떨어질 정도로 혁명 당시 레닌이 묘사한 상황과 똑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 그게 달라졌다. 러시아 황제 ‘차르’와 비교되던 독재정권은 노태우가 ‘민간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고, 김영삼 정부부터 시작한 세계화를 통해 ‘일국 기반의 사회주의 혁명이론’이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 강사는 덧붙였다. “대공장에서는 그 이론들이 여전히 설득력이 있더라도 한계가 명백해진 것이다. 운동을 하는 입장에서도 다른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생겼다.”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돌이켜 놓고 생각해보면 한국의 진보나 학계는 비판이나 저항에는 강한 반면, 대안에 대한 비전이나 길 또는 경로에 대한 부분은 취약한 측면이 있었다”며 “현재 진보학계에서 ‘복지국가’라는 합의가 있지만 시민사회나 정당운동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제도를 만들어낼지에 대한 합의는 여전히 일천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그 당시 논쟁의 한계를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