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심각한 ‘국기문란’ 더 심각한 ‘정략적 활용’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의 피해자인 김종익 전 한마음 KB 대표는 얼마 전 지하철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한 젊은 여성이 김 전 대표에게 주먹질을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김 전 대표는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그 여성은 계속 김 전 대표를 따라오며 욕설을 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여성의 행패에 김 전 대표는 결국 경찰을 불러 상황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김 전 대표는 그 사건이 아무래도 자신을 향한 ‘백색테러’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꺼려지고, 길을 가다 다른 사람과 눈만 마주쳐도 겁이 났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또한 김 전 대표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요즘 너무 ‘애국세력’들이 많으니 가급적이면 대중교통은 이용하지 마시라고 조언을 했다.

7월 25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의혹 규명을 위한 시민사회 시국회의’ 전국연석회의에서 참석자들이 철저한 국정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은 이명박 정부 때 있었던 대표적 ‘국기문란’ 사건이다. 최근까지도 고통을 겪고 있는 김 전 대표의 사례는 국가권력이 불법을 자행한 ‘국기문란’이 일반 시민의 삶을 어떻게 훼손시키고, 사회적으로도 얼마나 깊은 후유증을 남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국무총리실은 불법적인 권력을 휘둘렀고, 불법의 배경에는 ‘종북·좌파’에 대한 감시라는 합리화가 있었다. 김 전 대표는 이 사건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종북·좌파’라는 낙인이 찍혔고, 직장을 잃었으며,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다.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을 ‘종북·좌파 감시’라는 프레임으로 합리화시키면서 정치지형은 진영논리에 따라 빠르게 양극화했다. 지하철에서 김 전 대표에게 폭행을 행사했던 여성처럼 정치적인 입장이 다른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권력기관의 불법 자행 사회적 깊은 그늘
이명박 정부에서 잉태된 국기문란이 박근혜 정부 들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정원의 불법적인 대선 개입과 이를 물타기하려는 NLL 포기 발언 논란 등 현재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형태는 다르지만 그 틀은 동일하다. 여전히 국가 권력기관은 불법을 자행하고 있고, 이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종북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다. 불법의 주체가 국무총리실에서 국정원으로 바뀌었고, ‘종북·좌파’ 낙인이 ‘NLL 포기 발언’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 또한 비슷하다. 권력기관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거리를 두고 있는 반대세력에 ‘종북’이라는 낙인을 찍고, 이 낙인은 사회를 다시 진영논리에 따라 빠르게 양극화시키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과 비슷한 사건이 박근혜 정부에서도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정치에까지 관여한 ‘국기문란’ 사건은 이를 제어할 의회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건처럼 그에 따른 사회적 파장과 그늘을 깊게 남길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국정원법은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고 있고, 국정원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고 있다. 현재 검찰 수사 및 국회에서 국정조사가 진행 중인 국정원 대선 개입은 명백한 국정원법 위반일 뿐만 아니라 선거법 위반사항이기도 하다. 국가기관이 스스로 법을 어기고 훼손하는 것만큼 국기를 어지럽히는 것도 없다.

국기는 사전적으로 ‘나라를 이루거나 유지해 나가는 기초 또는 그런 터전’을 가리킨다. 국가기강으로 볼 수 있다. 국기의 토대는 법이다. 국가기관이 법을 지키기는커녕 법을 무시하고, 자의적 또는 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국가는 정상적인 국가로 볼 수 없다.

국가 존립의 사회적 합의 자체가 도전받는 엄중한 사태다. 국가기관이 법을 무시한다면 그런 기관에 권력을 부여해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이에 대한 각계의 반발과 비판이 쏟아지자 남재준 국정원장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문서등급을 낮추고 이를 공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국정원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또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정원장) 파면·해임 사유로 충분하다”며 “정보기관의 사명은 중요 정보를 관리하는 것이지 이를 공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이 국정원법에 규정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은 국정원 홈페이지의 보도자료 목록에도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최근 국정원이 발표한 보도자료 목록을 살펴보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논란에 대한 ‘국정원 대변인 성명’ ‘허위사실을 유포한 진선미 의원 고소’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결정’ ‘정보위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열람 관련 국정원 입장’ ‘민주당 추가 의혹 제기에 대한 설명’ ‘감금피해 국정원 여직원, 민주당 관계자 고소’ 등의 내용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국정원의 보도자료에는 정치적인 메시지만 있는 셈이다.

7월 22일 새누리당 황진하·조명철 의원과 민주당 전해철·박남춘 의원이 경기도 성남시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을 방문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원본 최종 검색을 마친 뒤 대통령기록물열람실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국기가 어지러워진 데는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 노골화됐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남재준 국정원장의 파면이나 해임 등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일체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 배경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고 짐작하게 되는 근거다. 국가기강을 지켜가야 할 대통령이 국가기관의 국기문란 행위에 대해 외면하고 눈 감는 것 자체도 국기문란 행위라는 비판마저 나온다.

이종수 교수는 “국정원이 대통령 직속기구인 만큼 대통령의 민주적 의지에 따라서 사회적 발전과 궤를 같이할 수도 있고, 퇴행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의 퇴행은 박근혜 대통령의 민주적 의지가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인 셈이다.

국정원이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작동하는 만큼, 국정원을 감시·견제해야 하는 또 다른 권력은 의회다. 행정부 권력인 국정원의 ‘국기문란’에 대응할 주체는 의회권력인데,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독일 등의 선진국에서는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의회 통제 시스템이 발전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로 치면 국회 정보위원회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정보위원회는 국정원이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될 수 있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됐다. 하지만 서상기 정보위원장이 앞장서서 ‘NLL 포기 발언’ 논란에 불을 댕기고, 회담록 ‘발췌록’ 열람에 앞장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사건에서 정보위원회는 그 취지에 걸맞은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견제기능 해야 할 의회도 제역할 못해
국기를 흔드는 것은 국정원뿐만이 아니다. 정문헌과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 등이 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정상회담 회의록을 입수한 뒤 대선에 활용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선 전에 국정원이 가지고 있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 등에게 유출된 의혹을 들며 “이는 그 당시만 해도 비밀등급으로 분류된 문서였기 때문에 분명히 위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국회의원들까지 국기문란에 가세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국기문란을 정략적으로 활용한다는 데 있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 의혹에 대해 국정조사가 실시되고 있지만 새누리당이 정략적으로 오도하고 물타기하면서 정작 국정원 정치 개입 금지라는 본질이 정략의 그늘로 묻히고 있는 게 현실이다.

노 전 대통령의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 논란을 제기하고, 민주당 진선미·김현 의원의 국정조사 특위 위원 사퇴를 요구하며 공전시킨 게 대표적이다.
이종수 교수는 “이번 국회가 여대야소이다보니 의회가 국정원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여소야대이건 여대야소이건 그런 우연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의회가 행정부의 권력기관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무력화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7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녹음기록물 등 국가기록원 보관 자료 제출’의 건을 재석 2/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했다. | 김영민 기자

국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야당마저 이번 사건에 있어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지난 6월 30일 민주당이 당론으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열람’을 택한 것은 두고두고 정치적 패착으로 남는다는 지적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민주당이 정파의 이익을 좇느라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라는 법의 취지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런 만큼 민주당이 국정원을 향해서 ‘국기를 어지럽혔다’고 말할 명분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는 야당 또한 회의록 열람을 당론으로 채택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적 이익을 저버릴 수 있는 집단임을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라는 게 국익의 차원에서 보관되고 보존되는 게 목적인 중립적인 것이었다”며 “국회에서 그런 원칙들이 합의되지 않았고, 야당 또한 이를 정쟁의 도구로만 바라봤다”고 지적했다.

당연히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어야 할 회의록이 실종된 것은 낯 뜨거운 국기문란의 결정체나 다름없다. 국가기록원은 몇 년 동안 회의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회의록 실종사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 없이 서로간에 책임공방만 벌이는 이전투구에 전념했다.

정치권에서 풀어야 할 숙제가 검찰 수사로 넘어간 것은 현 정치의 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진실 규명보다는 그것 자체가 정략이기 때문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찰이 또 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테고, 검찰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진실을 파헤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호중 교수는 검찰 수사로 이번 사안이 넘어가게 되면서 검찰의 입지만 더 강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검찰이 이런 사건들에 대해 수사를 하면 정치권을 가지고 놀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면서 “이런 정치적 사안에 대해 검찰이 어떤 식으로 할지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회의록 실종은 국기문란의 결정체
정권에 의해 촉발된 국기문란 사건이 정치권에서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면서 사회적인 불만의 에너지만 쌓일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여론조사기관 <리서치뷰>가 7월 22일 전국 만 19세 이상 휴대전화 가입자 1000명을 대상으로 공개조사를 실시한 결과 ‘정상회담 회의록이 없다’는 국가기록원의 답변에 대해 58.3%가 ‘정부·여당을 위해 숨기고 있을 것’이라고 응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상회담 회의록을 찾을 수 없거나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는 국민이 이처럼 많은 것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정부와 여당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려 했다’는 공세를 처음 시작한 정문헌, 서상기 의원에 대해서는 63.6%가 ‘의원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조사됐다. 하태훈 교수는 국기문란 사건이 해결되지 않고 쌓이다보면 한순간에 심각한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하 교수는 “이명박 정부 때 미네르바 사건 등으로 사람들이 많이 위축되어 있어서 현재 반대의 목소리가 잘 나오지는 않는다”면서도 “하지만 만약 경제문제가 더 어려워진다면 그것이 매개가 되어서 폭발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국기문란은 위험하다. 하지만 국기문란보다 더 위험한 것은 국기문란을 수수방관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