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야구는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존중’입니다

야구는 존중을 가장 중요시하는 종목이다. 토니 라루사 전 세인트루이스 감독이 얘기한 것처럼 야구 종목 자체에 대한 존중, 상대팀에 대한 존중과 함께 야구 스스로가 존중하고, 사회로부터 존중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야구의 신은 언제나 경기의 상대를 존중하지 않을 때 (패배라는) 벌을 내린다. 나는 이를 아주 어렵게 배웠다. (The baseball gods punish you for not respecting the game and your opponents- I‘ve learned that the hard way.) -토니 라루사 전 세인트루이스 감독, 중에서

야구는 경기를 할 때 모자를 쓰는 종목이다. 햇빛을 가리려는 목적이 아니다. 돔구장에서 경기를 하더라도 수비할 때 같은 모자를 쓴다. 구기종목 중에서 햇빛을 가리려는 목적이 아닌데도 모자를 쓰는 종목은 야구가 유일하다. 스타킹을 신는 것은 물론, 허리띠를 매고 경기를 하는 종목이다. 단체 구기종목 중에 허리띠를 매고 플레이를 하는 종목은 없다. 불편한 스타킹에, 모자를 쓰고, 언더 셔츠라 불리는 ‘내복’을 입는 종목이다. 야구는 시작부터 그랬다. 잘 갖춰 입고 펼치는 신사들의 스포츠였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 유니폼 상의는 정장 때 입는 셔츠처럼 앞에 단추가 달려 있었다.

무척이나 예의를 갖추는 종목이었다. 옷을 갖춰 입는 것만큼이나 상대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종목이다. ‘불문율’이라 불리는 위협구와 복수,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지는 것 역시 상대가 우리 팀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이뤄진다. 큰 점수 차이가 났을 때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만큼 야구가 상대 팀에 대한 ‘존중’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10월 24일 경남 창원 마산야구장에서 열린 '2015 타이어뱅크 KBO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5차전, 두산 베어스 대 NC 다이노스 경기에서 NC 우익수 나성범이 9회초 투수로 등장, 투구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NC가 추구하는 좋은 사람들의 야구
NC 다이노스는 2012년 창단해서 2013시즌부터 1군 리그에 진입했다. 창단 두 번째 시즌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했고, 세 번째 시즌이었던 2015년에는 정규시즌 2위에 올랐다. NC 다이노스의 2015시즌 슬로건은 ‘거침없이 가자’, 캐치 프레이즈는 ‘전력질주’였다. 2014시즌의 캐치 프레이즈는 ‘동반질주’였다. 창단 이후 내건 팀의 목표도 다른 팀과 조금 달랐다. 다이노스 팀 목표는 ‘정의, 명예, 존중’이었다.

또 하나의 슬로건이 ‘좋은 사람들의 야구’다. 승리, 우승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는 목표를 세웠다. ‘정의, 명예, 존중’을 직접 실천하는 데 큰 비중을 두는 팀이다. 구단의 모든 직원은 선수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쓰지 않는다. 사장과 단장 모두 선수들을 부를 때 OOO 선수라고 부른다. 아들뻘의 선수라 하더라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는다. 선수에 대한 존중이 선수 사이의 존중, 팬을 향한 존중, 야구 전체를 향한 존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계산이자 방향이다.

2013년 7월 31일, NC 투수 이재학은 다이노스의 창단 첫 완봉승을 기록했다. 그때 이재학보다 나이 많은 포수 김태군은 마운드로 올라가 끌어안고, 악수를 하며 축하하는 대신 마운드 근처에 올라 허리를 깊숙이 숙여서 이재학에게 인사를 했다. 김태군은 당시 “고맙다는 의미가 담겼다. 팀의 창단 첫 완봉승을 달성한 투수를 향한 존중의 의미도 담았다”고 말했다.

NC 다이노스는 창단 2년째였던 2014시즌,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포스트시즌 배당금으로 약 2억9000여만원을 받았다. 이 보너스는 대개 선수들의 보너스로 지출되는 것이 지금까지 한국 프로야구의 관행이었다. 선수들의 기여도를 3등급으로 나눠서 지급되곤 했다. 그런데 NC 다이노스는 달랐다. 선수단 전체는 물론이고 야구장 관리인, 구장 청소 아주머니 등 비정규직 직원들과도 함께 나눴다. 야구는 존중의 종목이고, 야구를 함께 만들어가는 이들을 향한 존중이 포함됐다. NC 다이노스가 추구하는 좋은 사람들의 야구이기도 하다. NC 다이노스는 2015시즌 2위를 차지했지만 한국시리즈에 오르지 못했다. 정규시즌 3위를 차지한 두산과 플레이오프를 치렀고, 2차전과 3차전을 이겼지만 4차전과 5차전을 내줬다. 전력에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야구는, 특히 단기전은 전력의 크기만으로 승패를 예측하기 어렵다.

5차전 9회초 2아웃, 2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NC 다이노스 김경문 감독은 우익수 나성범을 마운드에 올렸다. 대학 재학시절까지 빼어난 투수였던 나성범은 NC 입단 뒤 타자로 전향했다. 시리즈를 앞두고 가진 청백전에서 몇 차례 마운드에 올라 투수로서 활약을 하기도 했다. 김 감독은 “홈팬들 앞에서 마운드에 올릴 수 있다”고 얘기했던 터였다. 나성범은 안타를 1개 허용했지만 오재원을 내야땅볼로 처리한 뒤 이닝을 마쳤다.

포스트시즌 5차전, 지면 탈락인 경기에서 야수의 마운드 기용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마지막 공격에서 2점을 뒤집을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야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바람에 지명타자가 사라졌다. 나성범 대신 우익수로 김준완을 투입하면서 지명타자 이호준이 라인업에서 빠지게 됐다. 9회말 공격에서 역전 기회를 잡는다면 이호준 타석이 돌아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이호준 타석까지 오지 않았지만 미리 승부를 포기한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고, 한국시리즈에 오르는 기회가 매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면 더욱 아쉬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창원 마산구장을 찾은 NC 다이노스 팬들은 나성범이 마운드에 올랐을 때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나성범이 던지는 1구, 1구에 박수로 화답했다. 팬들은 이날의 승부 결과보다 나성범 등판이라는 신기한 장면에 더 만족스러워했다.

패자의 품격을 보여준 삼성
승부를 중요시하는 많은 야구 관계자들이 ‘야구에서 승부의 중요성을 무시한 결정’이라고 지적했지만, 정작 그 자리에서 야구를 즐겼던 팬들은 그 결정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어쩌면, NC가 보여주는 진짜 ‘존중’을 증명하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절박한 승리에 대한 염원보다 승부의 처절함, 절실함을 잠시 내려두고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선언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들의 야구’는 어떻게 해서든 이기려고 하는 야구가 아니라, 한 시즌의 마지막 경기 마지막 순간, 기대했던 장면을 보여주는 야구라는 설명 혹은 설득.

그래서였을까, NC 팬들이 느끼는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의 아쉬움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듯하지 않았다. 아, 한 시즌 야구 잘 즐겼다라는 시원섭섭함이 묻어났다.

2015시즌 가을야구를 앞두고, 야구에는 불상사들이 벌어졌다. KT 포수 장성우는 SNS를 통해 나눴던 사적인 대화가 공개되는 바람에 물의를 일으켰다. 본심이었느냐 아니었느냐를 떠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알려지는 바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 내용들에는 함께 야구를 하고, 만들어가는 이들에 대한 존중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시와 멸시가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실망해야 했다.

삼성의 투수 3명은 원정 도박 파문에 휩싸였다. 검·경의 수사 여부와 관계없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빠져야 했다. 자신의 돈으로 한 도박이 무슨 문제냐는 주장, 법적으로 어디까지가 문제가 되느냐는 등 여러 가지 논의들이 가능하겠지만, 도박 역시 스스로의 품위를, 야구를 향한 존중을 무너뜨리는 행동들이었다. 두산 베어스 김승영 사장은 “앞으로 한국 야구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단지 야구를 잘하고, 팬들을 위해 이기는 게 아니라 야구에 대한 팬들의 사랑을 어떻게 갚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사장은 “야구가 발전해 온 만큼 사회에 어떻게 돌려주느냐, 어떻게 사회에 공헌하느냐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야구는 존중을 가장 중요시하는 종목이다. 토니 라루사 전 세인트루이스 감독이 얘기한 것처럼 야구 종목 자체에 대한 존중, 상대팀에 대한 존중과 함께 야구 스스로가 존중하고, 사회로부터 존중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엄중한 숙제가 2015시즌이 끝난 뒤 남겨졌다.

5연패를 노리던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에 1승4패로 졌다. 경기에 지고 난 뒤 부랴부랴 서둘러 짐을 싸서 떠나는 대신, 우승팀 두산이 시상식을 하는 동안 더그아웃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패자의 품격이자, 야구가 보여줄 수 있는 존중을 매우 잘 드러낸 장면이었다. 야구가 보여줄 수 있는 존중의 회복이 바로 이 장면부터 시작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용균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