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토너 ‘오주한’이고 싶은 에루페

2012년 동아마라톤에서 에루페가 기록한 2시간5분37초는 역대 전 세계 4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우승기록이 2시간8분1초임을 감안하면 내년에 열리는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그가 메달을 딸 가능성은 큰 편이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에루페입니다. 한국 이름은 오주한입니다.”

한국 귀화를 추진 중인 케냐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7)는 자신을 한국어로 소개했다. 외워서 하는 서툰 말이었지만 “한국을 사랑하고,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며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자세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에루페는 충남 청양군체육회와 정식 입단 계약을 앞둔 지난 6월 23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그는 “한국에서 열린 국제마라톤 대회에 네 차례 참가했지만, 이렇게 한국을 찾으니 기쁘고 떨린다”며 “귀화 절차를 잘 마무리해 한국인이 되고 싶다. 한국 대표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한국 귀화를 추진 중인 케냐 출신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7)가 6월 25일 충남 청양군청에서 열린 청양군체육회 입단식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연합뉴스

7년 전 한국과 첫 인연, 3년 전도 귀화 추진
에루페는 케냐에서 마라톤 캠프를 운영 중인 오창석 백석대 스포츠과학부 교수(53)와 7년 전 만나 한국과 인연을 맺은 뒤 귀화까지 꿈꾸고 있다. 그는 그동안 한국에서 치른 네 차례 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해 모두 우승했다. 다른 나라에서 열린 국제대회에는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스승인 오 교수의 성(姓)에 ‘한국을 위해 달린다’는 의미로 오주한(吳走韓)이라는 한국이름까지 만들었다. 에루페는 “‘한국을 위해 달린다’는 의미가 마음에 든다. 영어로 러너(달리는 사람)다. 난 언제나 ‘러너’이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에루페는 3년 전 귀화를 추진하려 했지만 2012년 말 도핑 테스트에 걸려 2년 출전금지 처분을 받으면서 무산됐다. 그러다 징계가 풀린 뒤 출전한 지난 3월 서울마라톤에서 2시간6분11초로 우승을 차지한 뒤 다시 귀화할 뜻을 나타냈다.

한국 귀화를 원하는 에루페는 최근 충남 청양군체육회와 계약하고 6월 25일 청양군청에서 입단식을 치렀다. 이석화 청양군 체육회장은 “에루페는 한국육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선수”라며 “에루페가 안정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것”이라고 반겼다.

한국 실업팀에 입단하게 된 에루페는 귀화를 위한 첫 단추를 뀄다. 에루페는 지난 27일 다시 케냐로 건너가 훈련을 재개하고, 오는 10월 11일 열리는 2015 경주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러 재입국한다. 경주대회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대한체육회를 통해 행정적인 귀화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운동선수가 귀화하려면 대한체육회의 추천을 받은 뒤 법무부 국적심의위원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귀화하면 마라톤 선수로는 ‘1호 귀화 선수’가 된다.

에루페는 “한국인이 된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그리고 한국 대표선수로 올림픽에 나가 마라톤 금메달을 따내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서 대회를 치르고, 훈련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얻었다. 한국인이 되어서 한국 마라톤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대한육상경기연맹도 에루페가 침체된 한국 마라톤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가능하면 귀화작업과 대표팀 선발문제가 원만히 해결돼 내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나서길 희망하고 있다.

2012년 동아마라톤에서 에루페가 기록한 2시간5분37초는 역대 전 세계 모든 선수를 통틀어 4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우승한 스티븐 키프로티치(우간다)의 기록이 2시간8분1초임을 감안하면 내년에 열리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그가 메달을 딸 가능성은 큰 편이다.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가 3월 15일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86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 대한육상경기연맹 제공

대한체육회 대표선발 규정도 난관
최경열 대한육상경기연맹 전무는 “이봉주가 은퇴한 후 국제 경쟁력을 가진 선수가 나오지 않고 있다. 그의 귀화는 한국 육상 발전에 좋은 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에루페의 바람이 이뤄질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우선 도핑 테스트 전력에 대한 의혹과 대표 선발절차 등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에루페는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맞았는데 그때 문제가 생겼다”며 “정말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면 2년 만에 돌아와 이런 기록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약물문제는 깨끗하다. 케냐 의사들로부터 소견서도 받았다”고 말했다.

약물에 대한 의혹을 떨친다고 해도 대표 선발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징계 해지 후 3년이 지나야 대표선수로 뛸 수 있다’는 현 대한체육회 대표 선발규정 때문에 현재로서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하다. 에루페 측은 “국제 스포츠기구가 징계를 내린 뒤, 대한체육회가 추가로 징계하는 건 이중 처벌”이라는 여론에 기대를 걸고 있다. 마침 대한체육회가 비슷한 꼴인 수영선수 박태환(26) 문제로 이 규정을 올해 말 혹은 내년 초쯤 손볼 것으로 보인다. 특혜 시비가 예상되긴 해도 박태환과 에루페가 올림픽 메달 후보이고, 이들을 대신할 만한 다른 국내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 선수 육성해야” vs “한국 마라톤 살려야”
에루페는 귀화선수가 한국을 대표하면 안 된다는 정서적인 저항도 극복해야 한다.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은 “외국 선수를 귀화시키면 국내 꿈나무들이 마라톤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고 반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그는 “나도 손기정 선생님(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56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면서 “100년을 내다보고 우리 선수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창석 교수는 “한국 마라톤을 살리자는 취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오 교수는 “나를 매국노, 역적이라는 마라톤 선배들도 있다”면서 “하지만 에루페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한국에 귀화하는 것은 로또 당첨 같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에루페는“내 귀화를 반대하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다른 스포츠와 대륙에서는 국적을 옮기는 게 보편화돼 있다”며 “한국은 선진국이다. 좋은 성적을 내서 내 꿈을 이루게 해준 한국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가 귀화하면 한국 선수들이 잘 뛸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다. 은퇴 후에도 코치가 돼서 한국 마라톤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황민국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