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맛 본 벤투호, 더 이상 변명은 곤란하다

축구 전문가들은 벤투호가 순항하려면 몇 가지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먼저 벤투 감독이 추구하는 지배 축구의 완성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달콤한 허니문은 끝났고, 독이 든 성배만 남았다. 파울루 벤투 감독(50)이 추구하던 ‘지배 축구’가 출범 5개월 만에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부다비에서 좌초했다.

파울루 벤투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1월 25일 열린 2019년 아시안컵 카타르전에서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 AP연합뉴스

59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조별리그부터 불안했던 한국은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카타르와의 8강전에서 0-1로 패해 2004년 중국 대회 이후 15년 만에 4강에도 오르지 못한 채 짐을 쌌다. 벤투 감독은 지난 1월 27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자리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벤투 감독을 둘러싼 여론도 달라졌다. 팬들은 일단 선수단을 환영하며 감쌌지만 감독이 전권을 쥐고 있는 전술과 선수 기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패배하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다”던 벤투 감독은 말 그대로 혹독한 경험을 하고 있다. 과거 대표팀 감독은 독이 든 성배라며 탄식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벤투 감독이 계약기간이 보장된 2022년 카타르월드컵까지 완주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지배 축구? 가뭄 축구!

한국 축구의 8강 탈락 원인은 선수들의 기량이 아닌 잘못된 전술 탓이라는 지적이 많다. 벤투 감독은 지난해 9월 부임한 이래 볼 점유율을 높이면서 공격 횟수를 늘려 상대를 압도하는 ‘지배 축구’를 표방했다. 과거 한국 축구의 선 굵은 축구와는 정반대로 오밀조밀한 패스로 상대의 빈 틈을 찌르는 전략이다. 벤투 감독은 이 전술로 아시안컵 직전에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새해 첫 평가전(1월 1일·0-0 무)까지 A매치 7경기 무패(3승4무) 행진을 질주했다. 상대 중에는 칠레(2-1 승)와 우루과이(0-0 무), 코스타리카(2-0 승) 등 남미와 북중미 강호들이 포함됐기에 기대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벤투 감독이 아시안컵에서 만날 상대들에 대한 대비책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아시아권에서 한국을 상대하는 팀들은 대부분 밀집수비에 이은 역습으로 맞선다. 벤투 감독이 추구하는 지배 축구는 공은 오래 갖고 있어도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릴 한 방이 부족했다. 대회 내내 한국의 공격은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볼 점유율(평균 69%)과 패스 시도(평균 668.2개)는 분명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그러나 좌우 풀백이 공격적으로 올라갔을 뿐 상대 견제를 피해 중앙으로 공을 돌리거나 뒤로 백패스하는 과정이 반복됐을 따름이다. 빈 틈을 노리는 날카로운 세부 전술이나 빠른 역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팬들도 뻔히 예상할 수 있는 같은 전술이 반복되면서 경기를 치를수록 공격은 더욱 무뎌졌다.

아시아 최고라고 자부했던 한국 선수들의 기량도 좀처럼 효과를 보지 못한 것도 충격이었다. 상대의 거친 견제에 긴장한 탓인지 경합지역에서 어처구니없는 패스미스를 반복해 공격의 흐름을 놓치는 일이 빈번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3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쏟아낸 손흥민(27·토트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은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손흥민이 소속팀 일정으로 대표팀에 뒤늦게 합류해 첫 경기였던 1월 12일 중국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 풀타임에 가까운 89분을 소화하면서 잠깐 경기력이 살아났지만, 이후 2경기에선 그의 체력이 방전돼 무기력한 경기력을 노출했다. 한국이 조별리그 3경기를 포함해 16강과 8강 등 총 5경기에서 의미없는 점유율만 높인 채 6골에 그친 이유다. 팬들은 가뭄에 콩 나듯 골이 나온다며 ‘가뭄 축구’라는 별칭을 붙였다.

축구 전문가들은 벤투호가 순항하려면 몇 가지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먼저 벤투 감독이 추구하는 지배 축구의 완성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우승을 노리는 팀이라면 준비한 계획이 흔들릴 때를 대비한 대체전술인 플랜B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벤투 감독이 “지금의 스타일을 유지하고 싶다”고 거부한다면 스페인이 자랑하는 ‘티키타카(빠른 패싱 게임을 추구하는 공격전술)’나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빗장수비로 상대 공격을 사전에 차단해 안정적인 경기운영을 꾀하는 전술)’처럼 시대를 지배한 전술로 만들어야 한다.

2019 아시안컵에서 귀국길에 오른 나상호·기성용과 부상으로 경기를 뛸 수 없었던 이재성·황희찬 선수(왼쪽부터 차례로) / 경향DB

전술의 플랜B 필요

또 같은 전술이라도 매 경기 같은 선수가 아니라 다른 선수가 나와도 같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아시안컵처럼 기성용(30·뉴캐슬)이나 이재성(27·홀슈타인 킬), 황희찬(23·함부르크) 등 핵심 전력이 부상으로 쓰러진다고 색깔을 잃는다면 카타르월드컵 본선행 티켓도 장담할 수 없다. 벤투 감독은 최소한 13~14명이 아닌 18명, 이상적으로는 23명의 선수단을 모두 주전급 전력으로 가동할 수 있는 선수풀을 확보해야 정상을 노릴 수 있다. 박항서 베트남 감독(60)이 일본과의 아시안컵 8강전을 앞두고 “일본은 조별리그 우즈베키스탄전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16강전의 선수 구성이 골키퍼만 빼고 전부 달랐다. 바뀐 선수들의 면면도 전부 유럽 명문팀 소속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벤투 감독도 할 말은 있다. 부임한 지 5개월차인 사령탑이 한국 선수들의 기량을 일일이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2018년 러시아월드컵과 자카르타·아시안게임 멤버들을 중심으로 대표팀을 꾸렸고, 선수들의 기량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변명도 아시안컵까지 통할 뿐이다. 오는 9월부터 시작되는 카타르월드컵 2차 예선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본선까지의 순항은 기대하기 어렵다.

벤투 감독의 선수 발굴 노력은 ‘런던 세대’의 은퇴로 더욱 급박해졌다. 당장 아시안컵을 끝으로 2010년대 한국 축구를 지탱했던 구자철(31·아우크스부르크)과 기성용이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구자철과 기성용은 2012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사상 첫 올림픽 메달 획득에 힘을 보탠 선수들이다. 두 선수의 A매치 출전 기록만 합쳐도 186경기에 달할 정도로 대표팀 비중이 상당하다. 특히 2015년 호주 아시안컵부터 주장을 맡아 러시아월드컵까지 동료들을 이끌었던 기성용의 이탈은 벤투 감독에게도 큰 타격이다. 벤투 감독은 “기성용이 우리 전술에 중요한 선수지만, 그 선수의 빈 자리에도 익숙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또래인 이청용(31·보훔·A매치 87경기)은 아직 은퇴 의사를 밝히지 않았으나 그 역시 거취를 고민하고 있어 가용 전력은 더 줄어들 수 있는 상황이다.

벤투 감독은 황인범(23·밴쿠버) 등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멤버를 중심으로 연령별 대표팀과 K리그에서 새 얼굴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 권창훈(25·디종)은 아킬레스건 부상을 털고 일어나 복귀골을 터뜨리는 등 맹활약을 펼치고 있어 조만간 대표팀의 부름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럽에서 매섭게 성장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1군 데뷔에 성공한 백승호(22·지로나)와 이강인(18·발렌시아)도 후보군이다. 벤투 감독과 김학범 도쿄올림픽대표팀 감독(59)이 유기적인 협업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먼저 23세 이하에서 적극적으로 실험한 뒤 대표팀에 승선하는 구도가 유력하다. 김 감독은 “이강인은 도쿄올림픽대표팀 후보군에 있는 선수”라고 말했다.

런던 세대는 끝… 선수를 찾아라

벤투 감독이 카타르월드컵을 향해 순항하는 것은 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한축구협회의 철저한 뒷받침도 절실하다. 아시안컵 내내 고민거리였던 선수들의 체력 관리나 부상 방지, 부상 회복을 도울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벤투 감독은 지난해 12월 아시안컵 최종 명단을 발표한 뒤 대회가 끝날 때까지 23명의 선수가 경기를 뛰기는커녕 다 같이 모여 제대로 된 훈련조차 한 번 못했다. 부상에 신음하는 선수가 속출했다. 훈련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가벼운 부상은 차치하더라도 귀국길에 오른 선수(나상호·기성용)만 2명, 경기를 뛸 수 없는 선수가 2명(이재성·황희찬) 등 4명이 다쳤다. 그나마 나상호(23·도쿄)는 대회 직전에 빠진 터라 대체 선수가 합류했지만, 기성용과 이재성은 대회 도중이라 카타르와의 8강전에는 20명의 선수만 경기를 뛸 수 있는 상태였다. 벤투 감독은 “우리 팀에 부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문제”라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부상은 예측할 수 없는 ‘천재(天災)’에 가깝다지만, 그 부상을 줄일 수 있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문제다. 의무팀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하면서도, 정작 그 처우와 계약과정을 세밀하게 신경쓰지 못했다. 최소한 이번 대회처럼 의무팀 트레이너가 대회 시작 전과 도중에 이탈하는 촌극이 반복돼선 안 된다. 협회 내부에서도 이번 대회를 계기로 허술한 의무 시스템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팀 닥터(주치의) 선정 방식과 의무 트레이너 처우 개선 등의 종합적인 검토 및 보완 작업도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김판곤 국가대표 감독선임위원장은 “도중에 대표팀을 떠난 의무팀 직원과 관련해 관행적으로 접근하다보니 실수한 부분이 있다”며 “이번 대회를 마치고 장기적 관점에서 대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민국 스포츠경향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