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서구 여성의 사회 진출 ‘2% 부족’

최고위직 승진 차별 여전, 육아 부담에 일자리 포기도

지난 반세기 동안 여성의 사회 진출은 점차 증가했지만 앞으로는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 2003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호주 시드니 시내를 행진하는 여성들. |연합뉴스

지난해 말 삼성그룹, 현대자동차, LG패션 등이 여성을 임원으로 승진시켜 관심을 모았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각종 고등고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랫동안 ‘금녀의 구역’이던 사관학교의 문턱을 여성이 넘어선 지 오래다. 이 같은 ‘여풍당당’ 현상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우리보다 앞선 서구 사회에서도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경제 전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월 2일자에서 ‘부유한 나라들의 조용한 혁명- 여성들이 차츰 일터를 장악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을 다뤘다. <이코노미스트>는 “앞으로 몇달 안으로 미국의 작업장에서는 여성 인력이 전체의 절반을 넘어설 것이며, 이 같은 지구촌 부국들의 인력구조 변화는 최근 반 세기 동안 이뤄진 괄목할 만한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평균적으로 급여도 남성보다 낮아
그러나 산업현장의 인력구조가 변화해도 사회구조는 변하지 않아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이 피해를 보고 있으며, 다수의 직업여성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직업과 육아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난 반 세기 동안 여성의 사회 진출이 점증했다면 앞으로 반 세기는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 매체가 그린 지구촌 여성의 사회 진출의 명암을 살펴보자.

미국의 노동력 구조에서 여성 인력은 2009년 10월 현재 49.9%를 점하고 있다. 여성들은 세계적 기업인 펩시코,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 WL 고어 등의 경영자로 일하고 있다. 요즘 미국과 유럽에서 대학졸업장을 딴 인원 가운데 60%는 여성이다. 반면에 이탈리아와 일본의 남녀 고용 비율을 보면 남성이 여성보다 20% 높다. 이탈리아의 여성 인력은 지난 10년 동안 크게 늘었으나 여전히 50%에 훨씬 못미친다. 반면에 덴마크와 스웨덴의 여성 취업 비율은 70% 가량에 이른다. 여성은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낮은 급여를 받고 있으며, 여성의 고위 경영층 진출 비율이 낮은 점도 세계적인 현상이다.

물론 최근 한 세대 동안의 변화는 극적이었다. 이전에 여성은 하찮은 일을 했고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요즘엔 여성이 전문직업 인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미국의 경우 51%에 이른다. 이 같은 혁명적 변화는 베티 프리던 등 여성운동가들이 여성들을 향해 “가사노동에서 벗어나라”고 호소하고 남녀차별을 비판한 덕분일 수 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나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등 여성의 정치·외교 분야 고위직 진출도 여성에 대한 편견을 깼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증가한 것이 가장 큰 배경이다. 완력이 필요하던 시절에는 남성이 일자리를 얻는 것이 유리했으나 두뇌력이 필요한 시대에 접어들면서 여성은 취업경쟁에서 남성에 뒤지지 않게 됐다.

여성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그에 걸맞은 공급을 불러왔다. 여성들은 점차 집 밖에서 하는 일을 하고 싶어했고, 그 능력을 갖췄다. 진공청소기와 발전된 가사 도구들은 여성을 전통적인 가사에서 해방시켰다. 피임약은 여성이 결혼과 출산의 시기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나아가 고등교육의 확산은 여성에게 더 넓은 취업 기회를 제공했고 노동시장에서 가치를 높였다. 좋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아이를 낳은 뒤에도 계속 일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대졸 여성들은 점차 일자리를 얻기에 유리한 전공 분야를 공부했다. 1966년의 통계를 보면 미국 대졸 여성의 40%가 교육학을 전공했고, 2%만이 경영 및 관리를 공부했다. 현재 교육학 전공자는 12%, 경영 및 관리 전공자는 50%에 이른다. 2006년 통계에 따르면 여성들은 공학이나 컴퓨터과학 졸업생 가운데 20%를 점하고 있고, 이들 한정된 분야에서만 남성에 비해 약세일 뿐이다.

이 같은 혁명적인 변화는 남녀 모두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최근 실시된 록펠러재단과 타임의 공동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가운데 75% 가량이 이런 변화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대답했고, 남성 10명 가운데 9명이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 것에 대해 ‘불편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여성들은 “열심히 일하면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여성들은 중간간부직에만 올라가도 이들 자리가 이미 남성에 의해 장악돼 있음을 알게 된다. 더욱이 최고위직 승진은 꿈도 꾸지 못할 거리에 있다. 예컨대 ‘포천 500’에 속하는 회사들에는 최고위직의 2%만 여성이 채우고 있으며, ‘FTSE 100’ 주가 지수로 평가되는 기업들의 최고위직 가운데 5%에만 여성이 진출해 있다. 미국에서는 기업 이사진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3% 미만이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여성에 대한 편견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지만 여성들이 엄마 역할과 직업인의 역할 가운데 선택을 강요받는 데서 비롯된다. 아이가 없는 여성은 남성과 거의 동등한 연봉을 받는다. 아이를 둔 엄마는 이들보다 훨씬 적게 번다. 이 때문에 다수의 여성은 엄마 역할을 완전히 포기한다. 스위스에서는 40%의 여성 취업자가 아예 2세를 갖지 않는다.

스위스 여성근로자 40% 출산 포기
영국, 독일, 일본, 스위스 등은 일하는 엄마들에게 시간제 근무를 폭넓게 허용하고 있다. 독일은 아이를 낳는 부부에게 ‘부모수당’을 지급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는 일하는 엄마를 위한 배려를 하지 않는다. 미국은 엄마들을 위한 유급휴가를 규정하지 않고 12주의 무급휴가만 규정하고 있다. 가족 지원을 위한 미국의 공적 지출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낮다. 미국의 출산지원 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0.5%에 불과하다. 이것은 프랑스의 1.3%, 덴마크의 2.7%에 비해 턱없이 낮다.

앞으로 여성 노동력의 증가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에서는 2000년 이래 새로 창출된 일자리 800만개 가운데 600만개가 여성 인력으로 채워졌다. 미국에서는 경기 침체가 시작된 이래 일자리에서 쫓겨난 인력 가운데 75%가 남성 근로자였고, 여성 실업자 비율은 8.6%로 남성 실업자 비율 11.2%보다 더 낮았다. 미국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여성 인력은 15개 일자리 범주 가운데 10개에서 3분의 2 이상을 점하고 있으며, 이 비율은 앞으로 수년 동안 급속하게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내년에는 미국의 대학생이 여자가 남자보다 260만명 더 많을 것으로 예측됐다.

기업들은 여성의 일과 육아를 조화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승진 관행을 개선하기도 한다. 투자 자문회사 언스트&영은 출산을 위해 일자리를 비우는 여성 인력이 출산 후 회사로 돌아오기 쉽도록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있다. 재택근무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독일과 스웨덴의 회사 가운데 90%는 ‘융통성 있는 근무시간’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기업들은 주 단위보다 연간 단위를 기준으로 근무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근로자는 절반이 자택 또는 자택에 인근한 ‘위성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바클레이사는 5년 무급휴가제를 채택했으며, 존루이스사는 반 년 간의 유급 안식제를 시행하고 있다. 새로운 노동력 구조에 맞는 교육 체제도 나타나고 있다. 독일은 1600개 초등학교에 대해 오후까지 어린이들을 관리하도록 하고 있으며, 미국의 일부 학교는 하루당 수업시간을 늘리고 여름방학을 줄임으로써 학생들을 학교에 머물도록 하고 있다.

<국제부·설원태 선임기자 solw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