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갈 데 없는 남미 난민들의 ‘엑소더스’

지난해 남미 주요 9개국에 유입된 베네수엘라인은 62만9000명이나 된다. 콜롬비아 난민도 2016년 기준 34만명이고,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출신 난민 신청자도 2017년 중반 기준 21만5000명에 달한다.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난민의 자녀들이 지난 8일(현지시간) 브라질 로라이마주 보아비스타의 한 체육관 바닥에서 매트리스만 깐 채 누워 있다./보아비스타AP연합뉴스

동물원이 정글로 변했다. 먹이가 없어 서로를 잡아먹는다. 사람들의 처지도 별로 다르지 않다. 평균체중이 2년 새 19㎏ 줄었다. 화폐는 휴지가 됐고, 곡물부터 컴퓨터까지 페이스북 등을 통해 물물교환된다. 당뇨병 환자는 인슐린을 못 구해 죽어가고, 역사책 속의 결핵이 다시 창궐한다. 최근 외신들이 전하는 베네수엘라의 살풍경이다.

유엔난민기구는 지난 2월 베네수엘라 국가 탈출이 “매우 역동적”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3월엔 남미 각국에 난민 수용을 촉구했다. 세계식량계획도 최근 콜롬비아로 몰려든 베네수엘라인들의 기아문제를 지적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위기와 국가 탈출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최근 외신과 국제기구 등이 새삼 이 문제를 주목하는 건 상황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대륙 전체의 난민 위기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가난할 수 없던 나라’의 비극

베네수엘라는 한때 ‘가난할 수 없는 나라’로 불렸다. 천혜의 자원, 그 중에서도 석유 매장량은 세계 최대 수준이다. 석유만 내다 팔아도 모두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다. 실제 베네수엘라 재정수입 대부분이 석유 수출에서 나온다. 기반시설을 정비하거나 산업을 육성할 필요도 없었다. 생필품과 공산품은 풍족한 외화로 수입하면 됐다. 기득권이 독점하던 부를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국민 모두에게 분배하면서 빈부 격차도 완화됐다.

문제는 2013년 그가 사망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배럴당 100달러에 달하던 유가는 20달러로 폭락했다. 국가 재정이 쪼그라들었지만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막대한 공공지출을 유지했다. 재정압박을 타개하려 늘린 화폐 발행량은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외화는 동나고 자국 통화는 휴지 조각이 되면서 생필품 수입에 차질이 생겼다.

미국 등의 경제제재가 시작된 지난해부터는 달러를 빌릴 수도 없게 됐다. 인플레이션은 6000%까지 치솟았고, 국민의 90%가 빈곤상태에 처했다. 식량난으로 국민 4분의 1이 하루 한 끼나 두 끼밖에 먹지 못했다. 영양실조는 사라졌던 결핵을 다시 등장시켰다. 그럼에도 마두로 대통령은 국제기구의 원조조차 거절했다. 대신 “토끼는 반려동물이 아닌 고기”라며 ‘토끼 먹기 운동’을 전개했다.

탈출은 ‘엑소더스’ 단계로 접어들었다. 남미 주요 9개국에 유입된 베네수엘라인은 2015년 8만5000명에서 지난해 62만9000명으로 2년 새 7배 이상 폭증했다. 콜롬비아에만 지난 한 해 55만명이 몰려들었다. 로힝야 난민 70만명, 독일에 망명신청을 한 시리아 난민 60만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았다. 유엔은 110만명 이상이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것으로 추산한다. 전례가 없는 규모다.

베네수엘라 난민만 있는 게 아니다. 콜롬비아에서는 내전으로 650만명의 실향민이 발생했고, 해외로 떠난 난민도 2016년 기준 34만명에 달한다. 2016년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이 무장을 해제했지만 그 틈을 범죄조직들이 파고들면서 원주민들은 계속 터전에서 쫓겨나고 있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출신 난민 신청자도 2017년 중반 기준 21만5000명에 달한다. 살인, 폭력 등의 범죄를 피해 미국과 캐나다로 떠나던 이들은 최근엔 코스타리카, 멕시코, 파나마, 과테말라 등으로도 향한다. 아이티에서도 2010년 대지진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가난과 범죄를 피해 나라를 떠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베네수엘라를 탈출하는 난민들이 2월 21일 산 안토니오에서 시몬볼리바르 다리를 통해 콜롬비아 쿠쿠타로 향하고 있다./산안토니오AP연합뉴스

로힝야·시리아에 가려진 심각한 위기

문제는 이들이 정착할 만한 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중남미 국가 상당수는 1984년 카르타헤나 선언 이후 대개 난민 친화적 정책을 확대해 왔다. 그러나 받아줄 형편이 못 된다. 대개 자원수출에 기대는 경제구조이다보니 국제경기 침체에 하나같이 직격탄을 맞았다. 내전과 마약·조직범죄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곳도 적지 않다.

콜롬비아는 내전 때보다 경제가 안정됐지만 당장 전직 반군들의 재정착에 쓸 돈도 부족하다. 50만명이 넘는 난민을 감당할 형편이 못 된다. 4만여명의 베네수엘라 난민이 들어간 브라질은 이들의 단기 체류를 허용할 방침이지만 역시 돈이 문제다. 중남미 최대의 경제규모를 자랑했으나 수년째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때문에 미국과 유럽연합(EU)에 난민대책 관련 금융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아이티 등은 자국민들이 난민이 되는 상황이다. 2015년 시리아 난민 수용의사를 밝혔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도 수백여 명 정도만 임시 수용하는 데 그쳤다. 노령화에 따른 인력수급 차원에서 이민자를 받는 칠레나 난민 우호정책의 역사가 오래된 에콰도르 정도가 그나마 환대한다. 그러나 한계를 넘는 건 시간문제다. 지난 한 해에만 칠레에 10만여명의 아이티인이, 에콰도르엔 23만명이 넘는 베네수엘라인들이 몰려들었다.

무엇보다 난민 상당수를 흡수하던 미국이 문을 닫고 있다. 이민자를 내쫓으면서 오히려 난민 양산에 일조한다. 2016년에만 24만명의 불법 이민자를 내쫓았다. 지난해와 올해엔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아이티, 온두라스 출신 이민자들의 임시보호지위(TPS)도 종료했거나 종료할 예정이다.

난민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며 하루를 연명하고, 운동장이나 공원 등에서 매트리스만 깐 채 노숙을 한다. 인심은 점점 더 사나워진다. 지난 19일엔 브라질 난민 수용시설이 습격을 당했고, 이틀 뒤엔 사망자도 발생했다. 유엔난민기구는 이들이 법적 지위를 갖추지 못해 착취와 인신매매, 폭력, 성폭행, 차별, 외국인 혐오 등에 노출돼 있다고 경고한다. 처지가 나아질 거란 희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반이민 정서나 극우 민족주의 같은 정서적 이유보다도 실질적인 이유가 문제 해결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은 “중남미 어느 국가도 이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만, 유엔조차도 로힝야와 시리아 문제에 헌신할 때와는 태도가 다르다”고 말했다.

<박용필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phi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