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크렐리는 왜 약값을 55배나 올렸을까

이 젊은 기행꾼은 상도의를 벗어난 행동으로 ‘제약왕’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고삐 풀린 자본이 독과점을 악용해 사람의 목숨을 좌우한다 해도 제재할 수 없는 미국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다.

올해 32세인 마틴 슈크렐리가 ‘미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반 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미국 제약사 튜링 최고경영자인 슈크렐리는 지난해 9월 항생제 다라프림의 소유권을 사들인 뒤 13달러(1만5000원)이던 약값을 750달러(90만6000원)로 55배 가까이 올렸다. 시판된 지 62년 된 다라프림은 에이즈, 말라리아, 톡소플라스마증 등의 치료에 쓰이며 마땅한 대체 약품이 없다.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미국 감염병협회와 에이즈의학협회는 의료윤리에 맞지 않는다며 튜링에 항의서한을 보냈고,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트위터에서 ‘상식을 벗어난 행태’라고 성토했다.

결국 2월 4일 미국 하원은 약값 인상 폭리를 추궁하고 의회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슈크렐리를 청문회에 소환했다. 하지만 이날 그가 보여준 언동은 미국인들의 공분을 더했다. 그는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겠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볼펜을 돌리거나 의원들을 경멸하듯 히죽거리며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했다. 보다 못한 의원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약값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웃음이 나오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민주당 하원의원 엘리야 커밍스는 그에게 “전형적인 탐욕스런 제약사 경영인으로 역사에 남기 싫다면 당신은 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충고했다. 슈크렐리는 전자를 택했다. 그는 청문회가 끝나자마자 트위터에 “이런 얼간이들이 국민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글을 올렸다.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가 개발한 만성 골수성 백혈병(CML) 치료제 글리벡. / 영문 위키백과

미 제약계, 슈크렐리만 ‘나쁜 놈’일까
슈크렐리가 제약업에 발을 들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뉴욕 명문 헌터칼리지를 중퇴하고 헤지펀드 매니저가 된 그는 새로운 돈벌이를 찾다가 제약업에 눈을 돌려 2011년 제약회사 레트로핀을 창업했다. 당시 <포브스> 등 경제지는 그를 “거대 제약사들과 맞서는 용감한 투자자”라며 새롭게 떠오르는 젊은 창업자로 묘사했다. 하지만 호평도 잠시, 자신을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알바니아계 미국인”이라며 유튜브에 기타 치는 장면을 올리고, 200만 달러를 들여 유명 힙합 그룹의 1장뿐인 앨범을 사들이기도 했던 이 젊은 기행꾼은 상도의를 벗어난 행동으로 ‘제약왕’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고삐 풀린 자본이 독과점을 악용해 사람의 목숨을 좌우한다 해도 제재할 수 없는 미국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다.

미국 제약업계는 이 이단아와 선을 그었다. 미국 제약사 리제네론 대표 레너드 슐라이퍼는 “이 남자는 우리와 같은 비즈니스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신 그는 환자들 약값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보험사들에 책임을 돌렸다. 슐라이퍼는 “(슈크렐리의 행동으로) 제약업계에 대한 여론만 악화됐고, 정치인들의 무차별 사격의 대상이 됐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슐라이퍼의 말처럼 미국 제약사들은 여론과 정치인들에게 억울한 매도를 당하고 있는 걸까. 매년 물가상승률을 웃도는 범위에서 약값을 올려 온 제약사들의 관행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대부분의 나라들과 달리 미국은 처방전 약값에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는다. 슈크렐리는 잇따른 기행과 사람들을 모욕하는 언동 때문에 주목을 받았을 뿐, 대부분의 미국 제약사들도 튜링처럼 뚜렷한 이유 없이 약 가격을 올리곤 한다. 지난 1월 CBS 등 미 언론에 따르면 화이자를 비롯한 주요 제약회사들은 올해 약값을 지난해에 비해 최소 1.3%에서 최대 42.3%까지 인상했다. 제약사들은 “높은 연구·개발비용을 충당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비용 회수가 이미 끝난 약제들의 가격도 심심찮게 오르곤 한다.

2월 4일 하원 청문회에는 또 다른 제약사 밸리언트의 임시 최고경영자 하워드 실러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슈크렐리에 밀려 관심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을 뿐, 밸리언트도 지난해 심장질환 관련 약인 니트로프레스와 이수프렐 특허권을 사들인 뒤 각각 가격을 212%, 525%까지 올려 물의를 빚었다.

문제는 불투명한 가격 산정 시스템
문제는 제약사들의 임의적인 가격 인상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뉴욕대 랭곤의료센터의 아서 캐플란 의료윤리국장은 의료전문지 메드스케이프와의 인터뷰에서 “슈크렐리를 불러 청문회를 여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비정상적인 약값을 조장하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당뇨병이나 심장병처럼 비교적 흔한 질병들은 이미 상당수 복제약품이 나와 있다. 미국 내에서 통용되는 약 중 80%가 복제약품이다. 때문에 제약회사들은 매출 증대를 위해 그 숫자가 훨씬 적은 희소 질병 환자에게 약을 비싸게 파는 ‘후리소매(厚利小賣)’ 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

슈크렐리 파동 이후 블룸버그 등 등 미 언론은 제약업계의 불투명한 가격 산정 시스템에 대한 성토를 쏟아냈다. 미국에서 제약사가 판매하는 약의 정가는 공개돼 있지 않다. 익스프레스 스크립츠 같은 제약혜택관리업체(PBM)와 CVS 케어마크 등 제약 유통업체들이 제약사와의 가격 협상을 통해 구매가를 결정한다. 때로 제약사들은 협상 때 마케팅 차원에서 최대 수십%에 이르는 할인을 해주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순익 증대를 위해 정가를 높이는 유인책으로 작용한다.

약 가격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장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10월 바이오젠이 출시한 다발성경화증 치료제 아보넥스 가격이 지난 10년 동안 매년 16% 올랐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약값 인상을 통해 상위 30위에 랭크된 대형 제약회사들의 매출은 지난 5년 동안 61% 증가했다. 미국 물가상승률에 비해 8배나 빠른 속도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로 유명한 노바티스의 글리벡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1월 포브스 보도에 따르면 2001년 출시 당시 1년 투약비용이 2만4000 달러였던 글리벡은 5년 뒤 경쟁사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이 같은 효능을 지닌 치료제 스프라이셀을 출시했음에도 전혀 가격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격은 더 올라 현재는 1년 투약비용이 9만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비싼 약값은 정치권에서도 새로운 현안으로 떠올랐다. 민주당 대선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은 처방약 비용으로 월 250달러의 상한선을 두는 계획을 마련했다. 클린턴의 맞수인 버니 샌더스 예비후보도 비싼 처방약 가격을 낮추기 위한 법안을 발의했다. 관건은 제약사들의 최대 구매자인 미국 의료보호제도 ‘메디케어’가 직접 약값 협상을 벌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003년 메디케어현대화법(MMA)에 추가된 조항은 연방정부가 직접 제약사들과 가격협상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클린턴과 샌더스 모두 메디케어가 제약혜택관리업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 제약사들과 가격을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법안을 추진 중이지만, 공화당은 이에 반대하고 있어 난항이 예상된다.

<김상범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ksb123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