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던진 오래된 질문

식민지 수탈 앞장선 전범기업에 물리력 행사

드라마 <오징어게임> 배우 SNS에 등장해 재조명

1974년 8월 30일 일본 도쿄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 출입구에서 폭탄이 터졌다. 8명이 숨지고 3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테러를 일으킨 단체는 스스로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狼)’ 정보부라고 밝혔다. 이들의 공격은 같은 해 10월 14일 미쓰이물산 본관과 12월 10일 타이세이건설 본사에서 폭탄을 터뜨리며 이어졌다. 이듬해인 1975년 2월 28일에는 하자마건설을 폭파하는 등 폭탄테러를 통한 선전활동을 이어가던 이들은 5월이 돼서야 일본 수사당국에 체포됐다.

에키다 유키코가 2017년 3월 23일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한 장면 / 감 픽쳐스 제공

이 단체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란 이름을 내걸었으나 전원 일본인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자국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30년이 흐르는 와중에도 과거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없이 오히려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리며 인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고 봤다. 전후 급격한 성장을 경험하며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던 일본의 대중적인 정서와도 상반될 뿐더러, 일본 내 좌익운동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를 지난 터라 이른바 운동권 내에서도 이들의 과격한 활동 양상에 대한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럼에도 ‘늑대’에 이어 ‘대지의 엄니(大地の牙)’, ‘전갈(さそり)’ 등 새롭게 나타난 동조자들을 규합해 만든 산하 조직은 여러달 동안 폭파활동을 이어갔다.

<오징어게임>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이들의 공격 대상이 된 미쓰비시중공업은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다. 2018년 11월 대법원으로부터 일제강점기에 동원돼 강제노역한 한국인 피해자와 유족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확정판결을 받고도 피해 배상을 끈질기게 외면해왔다. 확정판결 이후에도 위자료를 지급하지 않은데다 2019년 3월 미쓰비시의 한국 내 상표권 2건과 특허권 6건을 압류하는 강제 절차를 법원이 결정했음에도 불복해 항고와 재항고를 거듭하며 버티고 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식민지 수탈에 앞장선 이들 전범기업을 대상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며 40여년 전부터 일본 내에서 자발적인 여론 환기에 나선 셈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은 일본 내에서는 매국적인 행동으로 지탄을 받았다. 그리고 식민지배 피해국인 한국에서도 정작 이들의 모습은 오랜 기간 조명되지 못했다. 미쓰비시중공업 폭파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인 1974년 8월 당시 한국은 재일동포 문세광이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사건으로 발칵 뒤집혀 있었다. 미쓰비시중공업 폭파사건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2014년에야 한국에선 김미례 감독이 다큐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촬영에 들어가며 이들에 대한 재조명을 시작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영화는 지난해에야 국내에서 첫 정식 개봉을 했으나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관객들과 만날 기회를 잃어버렸다. 독립영화인 탓에 대형 개봉관을 잡지 못하고 주로 소규모 공동체 상영으로 관객과 만났다.

그대로 잊힐 것만 같았던 영화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되살아났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알리 압둘 역으로 출연한 인도 출신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 한장이 네티즌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아누팜이 올린 자신의 방 사진 한켠에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생소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의 영화 제목을 궁금하게 여긴 네티즌들이 영화와 해당 단체를 다시 화제에 올렸다.

“처음 이 단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촬영에 들어가기까지도 수년이 걸렸고, 영화를 준비하고 만드는 기간에도 어떤 관점을 유지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다”고 김 감독은 밝혔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단원들은 일본 안에서는 극도로 혐오받고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금기처럼 돼 있고, 또 무고한 인명을 죽인 잘못이 있기 때문에 무작정 옹호하는 입장으로 이들을 그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김 감독은 교도소에서 장기 복역 후 출소한 단원을 만나거나, 단원들을 옥바라지한 친지나 동지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복원해가는 과정에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들의 폭력을 지지하는가’, ‘그들을 정당화하려고 하는가’ 하고 자문했는데 결국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는 “다만 한편으로는 일본 안에서 이미 40년도 훨씬 전부터 자신들이 직접 저지르지도 않은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는 이들이 있었고, 이들이 반역자로 몰리는 일본 사회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적어도 그들의 행동 취지만은 동감하고 지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 역시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현재진행형”

영화가 이들 단원에 대해 말하는 방식 역시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단원 에키다 유키코는 김 감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들의 행동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에키다는 “패전 후 일본에서 나고 자란 우리도 선조가 아시아인들에게 가한 침략, 억압, 착취의 책임을 자각하고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보상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계승된 이 나라의 평화와 번영도 의심하고 부정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입장이었다”고 썼다. 하지만 영화는 2017년 출소한 에키다가 자신을 지원한 동지들과 고향의 가족을 만나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별다른 평가를 덧붙이지 않는다. 에키다와 그의 주변 인물 역시 옹호나 비난의 목소리 대신 담담하게 재회의 기쁨을 되새기는 모습만 보인다.

이 영화는 일본 각 지역을 순회하며 현재 최북단 홋카이도까지 상영되고 있다. 그러자 우익단체들이 상영을 방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일본 지식인의 고백이 나오는 이유다. 김 감독과 함께 영화를 기획한 후지이 다케시 도쿄외국어대학 교수는 “파괴 이후 만들어진 빈 공간을 채워가는 가능성에 대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역시 어찌 보면 그 부분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기에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했다”며 “이후 그들을 지원하는 이들에게서 전후보상 운동 등의 가능성이 나타나 빈 공간을 채우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단원 9명 중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이는 에키다 유키코와 우가진 히사이치 둘뿐이다. 김 감독이 만날 수 있었던 단원도 이들뿐이었다. 단체 결성 초기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다이도지 마사시는 1975년 체포된 이래 42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2017년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카타오카 도시아키와 구로카와 요시마사는 여전히 복역 중이다. 다이도지 아야코와 사사키 노리오는 또 다른 일본의 과격무장단체였던 일본적군이 1975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벌인 인질극과 1977년 일본항공 항공기 납치사건에서 석방을 요구해 풀려났다. 이후 지금까지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키리시마 사토시 역시 체포되지 않고 일본 경찰이 수배 중이다. 40여년간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 단원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다. 김 감독도 이들이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살아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40여년 전 폭탄과 함께 이들이 던진 질문이 여전히 살아 있듯.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