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물 전성시대]보헤미아 우주인-동유럽 소국 체코 우주비행사의 고백

주변 열강들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느라 부침이 심했던 약소국의 어제와 오늘을 되새김질하는 이 장편은 김희선의 <무한의 책>을 떠올리게 한다.

혜성이 몰고 온 먼지구름이 금성 부근에 틀어박혀 밤하늘의 판도를 바꾼다. 이 성간구름에 무인탐사선을 4대나 보내지만 별 소득이 없자 유인탐사가 계획된다. 생물처럼 꿈틀대며 스스로 응축하는 이 우주먼지를 직접 채취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안전을 우려해 우주개발 선진국들조차 주저하는 사이 동유럽의 소국 체코에서 이 나라 최초의 우주선이자 유인탐사선 얀후스 1호가 발사된다.

야로슬라프 칼파르시가 쓴 <보헤미아 우주인> 한국어판 표지 | 알에이치코리아

체코계 미국인 야로슬라프 칼파르시의 첫 장편 <보헤미아 우주인>에서 위의 배경은 주인공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여행 도중 게와 거미를 합친 형상의 사려 깊은 외계인과 만나지만, 이러한 존재조차 SF적 관심사로 부각되기보다 주인공의 고통스런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 노릇에 충실하다. 작가가 진짜 할 이야기는 따로 있다는 뜻이다. 광물학자에서 졸지에 체코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야쿠프는 탐사여정을 통해 그간 자신이 생각보다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았는지 차츰 깨닫는다.

깨달음을 돕는 복선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정신감응능력이 탁월한 외계인이 우주비행사의 뇌에서 읽어내는 트라우마다. 공산정권에서 고문기술자로 일한 아버지 탓에 개혁개방 후 주인공 가족은 정신적·경제적 핍박에 시달린다. 또 하나는 아내 렌카와의 갈등이다. 야쿠프는 집안의 오명을 씻고자 우주비행사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다. 문제는 아내와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가 집안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내를 끔찍이 사랑한다면서 정작 그녀의 심기를 살피는 데에는 소홀하기 일쑤였다. 이제 렌카는 결혼생활 전반을 되돌아보며 둘의 관계를 재검토한다. 우주비행사의 아내라는 국가적 명예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야쿠프의 이기적 행각은 계속된다. 정체불명의 구름에 더 이상 다가가지 말라는 관제본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고집부리다 우주선을 망가뜨린다. 부국도 아닌 나라에서 국위선양을 위해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었건만 원래 임무대로 구름입자를 채집해 귀환하기는커녕 미세먼지 회오리에 휩쓸려 우주선은 고사하고 자기 생명마저 위험에 빠뜨린다. 운 좋게 인근 러시아 우주선에 구조되나 자신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러시아 정치범수용소에 억류되리라는 말에 지구 대기권 재진입 때 난동을 피워 생명의 은인인 세 우주비행사를 황천으로 내몬다. 천신만고 끝에 지구로 돌아온 야쿠프. 그는 과연 연이은 자신의 잘못을 참회할까? 아니면 아내 앞에서 예전 같은 삶이야말로 진짜 행복이라고 여전히 우길까?

장르물 전성시대

상업적 감각이 뛰어난 영미과학소설은 별의별 최신 아이디어와 소재를 다채롭게 제시하지만 종종 매너리즘에 빠진 인상을 준다. 삶에서 우러난 진실함이 절절하지 않아서일까. <보헤미아 우주인>은 다른 동네 과학소설이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을 수 있는지 힌트를 준다. 15세에 미국에 왔으니 쉽게 동화될 법한데, 칼파르시는 마치 지금도 체코의 공기로 숨 쉬는 듯하다. 주변 열강들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느라 부침이 심했던 약소국의 어제와 오늘을 되새김질하는 이 장편은 김희선의 <무한의 책>을 떠올리게 한다. 둘 다 아버지 세대의 잘못과 원죄가 자식 세대마저 불행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옭아맨다. 미국 독자들은 몰라도 체제와 이념이 180도 바뀌면서 부역자와 피해자가 넘쳐났던 역사의 아픔을 공유하는 독자들이라면 소회가 남다르지 않을까? SF 독자뿐 아니라 순문학 독자에게도 선뜻 권한다.

<고장원 SF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