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노래]김호철 작사·작곡 <파업가>파업현장에서 만난 검은 장갑의 청년

파업현장에서 만난 검은 장갑의 청년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린 나선다.
승리의 그 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이 두 쪽 나도 지킨다.
파업투쟁으로 뭉친 우리,
구사대 폭력 물리친 우리
파업투쟁으로 뭉친 우리,
해방 깃발 아래 나선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린 나선다.
승리의 그 날까지. 승리의 그 날까지!

한 손에 검은색 가죽장갑을 끼고 있던 청년이 자기소개 순서가 되자 장갑을 벗고 손을 쳐들었다. 오른손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잘려 나가고 없었다. 참가자들 중 몇 사람은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청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처럼 사고를 당해 손가락이 잘린 사람은 그나마 산재로 인정이 됩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공장에 다니다가 골병 든 노동자는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해 산재보험 처리가 되지 않습니다. 일하다가 직업병 걸린 노동자들에게 제발 관심 좀 가져 주세요.”

의경으로 복무했던 그는 이른바 사복체포조인 ‘백골단’ 출신이었다. 제대한 뒤 경찰 채용시험을 준비하며 잠시 일하던 공장에서 기계에 손이 끼이는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얼마 뒤 나는 상담소 내 책상 옆에 작은 책상을 하나 더 들여다 놓고 그 청년을 새 식구로 맞았다.

6개월쯤 같이 일하다가 “내가 이런 곳에서 책상이나 지키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면서 사직서를 내고 떠난 청년은 노동운동단체에서 새 일을 맡았다.

몇 달 뒤, 감전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터졌다. 회사 앞마당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영정을 앞세운 상여 행렬이 정문을 나섰지만 전투경찰 대오가 절대로 ‘노제’를 허용할 수 없다며 행렬을 막아섰다.

“투쟁~! 투쟁! 단결투쟁!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이 두 쪽 나도 지킨다.”

머리띠를 두르고 만장을 치켜든 노동자들이 파업가를 외치며 달려나가 전경들과 뒤엉켰다. 순식간에 이는 고함소리…. 아, 그때 나는 뿌연 흙먼지 속에서 분명히 보았다. 대열 맨 앞에서 전경의 방패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검은 장갑…. 그날 전경의 봉쇄를 여섯 번이나 돌파하고 기어이 목적했던 공덕동 로터리에 도착할 때까지 전경과 몸싸움을 하는 대열의 선두에서 나는 매번 검은 장갑을 낀 청년을 볼 수 있었다. 노제 중에 멀리서 나를 발견한 그가 사람들 머리 위로 깡충깡충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소장님! 우리가 저지선을 여섯 번이나 돌파했어요! 완전히 깨부쉈다구요!”

내 인생의 노래

그날 이후 신촌에서도, 종로에서도, 미금시의 원진레이온 정문 앞에서도 뽀얀 최루가스 속에서 구호를 선창하거나 사람들에게 ‘전노협 진군가’와 ‘파업가’를 가르치고 있는 ‘검은 장갑’을 볼 수 있었다. 25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파업현장에서 ‘파업가’를 들을 때마다 검은 장갑 청년이 생각난다. ‘해골’과 같은 살벌한 단어를 굳이 가사로 사용할 필요가 있느냐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우리 노동운동은 그렇게 살벌한 ‘파업가’를 외치며 싸워온 수많은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