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노래]‘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19살 내가 유일하게 기대었던 노래

1987년 12월 대선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폐인처럼 살았다. 전쟁터에 나갔다가 혼자만 살아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해 6월항쟁의 결과로 성취한 직선제 개헌 이후 대선을 앞두고 서울지역의 고등학생들이 모여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연합’을 만들었다. 나도 ‘공정한 대선 보장과 교육민주화’를 외치며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했다. 당시 우리들은 5·16을 국정교과서에 수록된 그대로 ‘혁명’으로 배웠다. 그러나 거리는 매일 최루탄 냄새로 뒤범벅이었고, 한여름 날씨에도 창을 열 수 없는 교실에서 공부해야만 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대학생활이란 낭만이 아니라 학생운동과 민주화 시위로 날밤을 지새우는 장소였다. 어째서 저런 일들이 생기는 것인지 궁금했기에 우리는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알게 된 세상은 충격이었다. 광주 5·18을 알게 되었고, 그 뿌리가 5·16 군사쿠데타였음을 깨우치게 되었다.

우리는 순진했다. 사람들이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면, 그들도 우리처럼 충격을 받고 세상이 그로 인해 뒤바뀌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 마음으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거리에 나섰다. 그러나 12월 대선의 결과는 참혹했다. 우리는 명동성당에서 쓰디쓴 패배, 믿었던 세상의 붕괴를 맛보았다. 무엇보다 나는 세상이 온통 더럽고 불쾌하게 여겨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하골방에서 홀로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다가 그마저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 성남의 새벽 인력시장이나 동네 입구의 인력사무실에 나가기 시작했다. 차가운 새벽, 인력시장은 적나라한 장소다. 매일매일 노예처럼 날 호명해 줄 승합차나 트럭을 기다렸다. 육체적으로 고달픈 것이 정신적으로 고달픈 것보다 그나마 견딜 만했다. 피곤에 절어 죽은 듯 잠드는 날에는 그나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른바 ‘민가(민중가요)’가 백화쟁명하던 시대, 이미 많은 투쟁가들이 있었고 알고 있었지만, 열패감에 상처받은 마음은 사상적 투철함에 복무해야 할 것 같은 투쟁가들이 가슴을 후벼파듯 아팠다. 신나는 대중가요는 고문실 저편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DJ의 공허한 지저귐처럼 너무 밝고 허황된 이야기였다. 어둡고, 어두웠던 그 시절, 아침저녁에나 간신히 한 줄기 햇빛이 들던 작은 쪽창 하나가 내게 허락된 빛의 전부였던 지하실에 스스로를 유폐해놓고 여차하면 죽어버리자는 마음을 품고 간신히 살아가던 이제 막 19살의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노래가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수록된 조경옥의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였다.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해맑은 빛이 흐르고/ 내 가슴 지나는 바람 모두/ 따스한 향기 머금게 하소서 (……) 뿌연 안개 그 그늘 속에/ 외로움으로 남은 이/ 거친 바람 속에 미움으로 사는 이/ 노래하게 하소서 노래하게 하소서.” 처음엔 지나던 길 어딘가 문 열린 성당에서 대학생 누나가 부르는 듯 고즈넉한 목소리에 끌렸고, 나중엔 “거친 바람 속에 미움으로 사는 이 노래하게 하소서”란 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나는 이 노래를 부른 사람과 노랫말을 지은 사람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지난 2005년 나는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다. 노랫말을 지은 이는 나의 대학원 은사 김창남 교수(성공회대 신방과)이고, 노래를 부른 사람은 그 분의 아내인 조경옥 선생이다. 청춘의 한 시절을 온통 미움으로 살았던 이에게 당신들이 내밀었던 노래의 손길이 지금의 내가 있게 해주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수줍게 고백해본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내 인생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