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는 가장 바꾸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서구형 아파트에 살아도 바닥은 따뜻해야 하고 김치는 부엌 뒤에서 바로 꺼내 먹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 한국인의 삶이다.
한반도 최초의 아파트는 1930년 일본 기업이 서울 충정로에 직원 숙소로 지은 것이다. 광복 이후로 한정하면 1959년 종암아파트가 건립됐고 1962년에는 대한주택공사가 마포 일대에 최초의 대단지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대한 인식도 노동자의 집단거주지에서 중산층의 고급주택으로 바뀌었고, 1980년대의 부동산 투기 열풍 덕분에 아파트는 재산 축적과 증식의 확실한 지름길이 됐다.
오늘날 한국인의 약 3분의 2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새로 공급하는 주택도 아파트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파트가 한국의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현상은 앞으로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는 원래 서양의 주거문화에 뿌리를 두고 만든 것이었으므로 한국인이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자니, 뭔가를 얻는 대신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런 문제들은 초창기 마포 아파트 단지에서부터 불거져 나왔다. 서구식 생활에 가까워지겠다는 기대를 안고 입주한 이들은 이내 하나둘씩 불편을 호소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난방과 장류의 보관 문제였다.
전통 가옥에 살던 한국인들은 온돌로 바닥을 데우는 난방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초창기의 아파트는 서양식을 그대로 들여왔기 때문에 벽에 설치한 라디에이터로 공기를 데워 대류시키는 난방 방식을 채택했다. 바닥은 싸늘하고 공기는 쉬이 건조해지는 이런 난방은 한국인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구들장 없는 온돌
생활의 근대화를 주창하던 이들은 서양식 난방이 온돌 난방보다 열효율이 높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등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당장 내 등이 따뜻한 게 중요한 사람에게 공학자가 계산한 열효율 같은 숫자를 들이밀어 봐야 별 소용이 없었다. 새로 짓는 아파트들은 사람들의 불만을 반영해 한국인이 선호하는 난방을 최대한 구현하고자 했다. 아파트에 층층이 구들장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온돌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 위해 여러 가지 궁리가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선을 보인 연탄보일러를 활용하면 방바닥에 온수파이프를 깔고 연탄불로 데운 온수를 방으로 순환시켜 바닥을 데울 수 있었다. 들어가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실상 온돌과 같은 효과를 내는 셈이었다. 이 연탄보일러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바람이 불면서 ‘새마을 보일러’로 이름을 슬그머니 바꿔 보급됐고 석유보일러가 연탄을 대체할 때까지 꽤 널리 사용됐다. 이 때문에 1970년대 지은 아파트 중에는 층마다 복도 끝에 각 가구의 연탄아궁이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구조를 한 것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닥에 온수를 순환시켜 온돌과 같은 효과를 내는 난방 방식을 발명한 것은 외국인이었다. ‘낙수장’으로 유명한 현대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였다. 라이트는 일본의 부호 오쿠라 기하치로(1837~1928)의 설계 의뢰를 받고 1914년 겨울 도쿄를 방문했는데, 오쿠라의 ‘조선식 별채’(사실은 경복궁의 동궁 건물을 뜯어다 지은 것이다)에서 차를 마시며 온돌 난방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라이트는 ‘눈에 보이는 난방시설도 없지만 갑자기 봄이 된 것처럼’ 따뜻해지는 이 경험에 깊이 감동하고 이후 자신이 설계하는 건물에 온수파이프를 바닥에 까는 난방 방식을 종종 활용했다. 이 기술이 뒷날 한국에 역수입되면서 아파트의 ‘온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장독대와 김치는 어디에?
식생활에서의 큰 문제는 김치와 장류의 보관이었다. 아파트에는 마당이 없으므로 김칫독을 묻을 곳도, 장독을 늘어놓을 곳도 없었다. 장독을 고이 아파트까지 챙겨 간 입주민들은 궁여지책으로 베란다에 장독을 늘어놓았지만 베란다에 지나친 하중이 실리는 데 따른 안전 문제가 제기됐다.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비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베란다에서 햇빛을 받으면서 김치나 장이 금세 시어 버리는 것도 문제였다.
요즘의 감각으로는 장류와 김치를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지만 근대화와 서구화가 같은 것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개발주의자들은 생각의 방향이 달랐다. 박정희 정부의 서울 개발 계획을 진두지휘해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현옥(1926~1997)은 1969년 ‘장독대 없애기’를 목표로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은 공동주택의 취지에 맞게 생활습관도 바꿔야 하는데 집집마다 장독을 갖고 들어가 장을 담가 먹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서울시에서 장류공장을 짓고 서민들을 위한 장류를 싸게 공급할 테니, 아파트로 이사 갈 때는 장독은 버리고 홀가분하게 장류를 사 먹는 새 시대의 생활로 갈아타라는 것이었다. 김현옥은 이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김치도 공장에서 만든 것을 사 먹을 수 있도록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청사진도 밝혔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장류와 김치를 사 먹게 되었다. 하지만 김현옥과 같은 성급한 근대화론자들이 추진한 정책이 성공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삶을 무시한 탁상공론은 현실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고, 80년대 후반까지도 아파트의 베란다에는 장독대가 건재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온도 변화의 영향을 덜 받고 김치를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보온 스테인리스 김칫독 같은 틈새 발명품이 선을 보여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김치전용 냉장고가 발명되면서 김치 보관 문제는 극적으로 출구를 찾았다.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기존의 냉장고 외에 한 대 더 가전제품을 들일 수 있는 소비여력을 갖춘 가구가 늘어났다. 이를 감지한 금성사(LG전자), 삼성전자, 만도위니아 등이 앞다퉈 김치냉장고를 출시했다. 이들은 아파트 거주 중산층을 표적으로 삼고 아파트 반상회 등에서 입소문 홍보에 주력했다. 그 전략이 먹혀들면서 10년 안팎이 지나자 김치냉장고는 한국인의 새로운 필수 가전제품이 되었다.
의식주는 사소한 것 같지만 인간의 일상 감각에 깊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바꾸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국가가 서구화와 근대화를 부르짖으며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해도 개인의 일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서구형 아파트에 살아도 바닥은 따뜻해야 하고 김치는 부엌 뒤에서 (이제는 거의 사온 것이기는 하지만) 바로 꺼내 먹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 한국인의 삶이다.
<김태호(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