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식의 사회]헬조선, 회피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 민생 돌보기보다 계파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정치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상류층의 갑질 횡포, 각종 사건·사고가 끊일 줄 모르는 학교와 군대, 친일 청산에 실패한 부끄러운 역사…

청년 문제는 언제나 조심스러운 글쓰기 주제이다. “청년이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던 우석훈 교수 등의 호소가 운동권 출신 선배 세대의 꼰대질이라며 거부당하면서 더욱 그랬다. 한때 청년들을 열광시킨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던 김난도 교수 같은 힐링 멘토들마저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냐?”는 조롱과 냉소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는 사이에도 청년들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3포 세대, 5포 세대라는 말조차 이제는 옛말이다. 꿈과 희망마저 포기했다는 7포 세대도 모자라 점점 포기해야 할 것이 늘어간다는 N포 세대라는 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해버렸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앞으로 다가올 온라인 네트워크 시대의 주인공이라며 N세대라는 찬란한 이름으로 불리던 바로 그 세대였다. 그런 그들이 이윽고 온라인 네트워크 시대가 본격화된 현재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N포 세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꿈과 희망마저 포기했다는 7포 세대
N포 세대 사이에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헬조선’이라는 말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지옥(hell) 같은 한국’이란 뜻이다. 유사어로 ‘불지옥반도’, ‘개한민국’, ‘망한민국’이라는 말도 쓰인다. 극한으로 몰린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저항을 상징하는 죽창 그림을 대문에 내건 헬조선 웹사이트까지 등장했다. 이쯤 되면 광복 70주년이라고 빌딩마다 대형 태극기를 내건 채 화려한 불꽃 축제로 대대적인 애국 마케팅에 나섰던 정부의 노력마저 무색해질 지경이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춘 세대이면서도 동시에 건국 이래 최고의 고용절벽에 부닥쳐 있는 N포 세대의 분노와 좌절을 반영하는 새로운 문화 코드로 헬조선이 급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지옥이라 묘사하고 있는 한국의 모습이 단지 고용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 민생 돌보기보다 계파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정치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상류층의 갑질 횡포, 각종 사건·사고가 끊일 줄 모르는 학교와 군대, 친일 청산에 실패한 부끄러운 역사 등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헬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분노와 좌절의 화살이 겨누어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N포 세대의 눈에 비친 이런 지옥의 모습이란 전혀 새롭고 느닷없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랜 기간 우리 사회가 고질적으로 끌어안고 있던 아주 익숙한 문제들, 온갖 부조리의 결정체가 바로 헬조선이다.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그저 우리 사회에 지금까지 만연해 있던 크고 작은 문제 덩어리들을 총칭하기 위해 탄생한 신조어다. 지난 6월 8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스펙 깨기 채용박람회’에 참석한 청년 구직자들이 마스크를 쓴 채 채용공고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지옥’이라는 말도 사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리 낯설지 않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청소년 시절 살벌한 입시지옥을 거치며 성장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출퇴근길 교통지옥 속에서 하루하루를 시달린다. 오죽하면 지하철을 두고 지옥철이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이다. 또 결혼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1년에 두 번 어김없이 찾아오는 명절지옥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이렇듯 애초에 지옥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지옥은 진작부터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헬조선 현상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섬뜩하기까지 한 헬조선이란 단어는 그저 우리 사회에 지금까지 만연해 있던 크고 작은 문제 덩어리들을 총칭하기 위해 탄생한 신조어일 뿐이다. 그리고 이 무수한 문제 덩어리들 속에서 그들 말에 따르면 흙수저 물고 태어난 N포 세대의 인내심이 드디어 임계점을 넘어서기 시작했음을 말해주는 징후가 바로 헬조선 현상이라 하겠다.

헬조선, 개인의 문제 아닌 구조의 문제
헬조선 현상을 두고 일각에서는 조국에 대한 비하 풍조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지긋지긋한 종북논리를 들이대며 “대한민국이 그렇게 싫으면 북한으로 넘어가라”는 생뚱맞은 목소리까지 들린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청년층의 집단자학증으로 세대 갈등이 증폭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헬조선 현상의 표면에 드러난 모습이 아닌 이면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오히려 긍정적 가치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N포 세대가 헬조선을 이야기하며 자주 즐겨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노오력’이다. ‘노력’을 길게 늘인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인데, “우리가 노력은 엄청 많이, 엄청 오래 해봤거든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전히 개인적 노력만을 강조하는 기성세대의 고루함에 대한 거부, 그리고 과도한 스펙 경쟁만으로는 결코 암담한 고용절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자각이 동시에 배어 있는 표현인 셈이다. 더 이상 N포 세대는 내가 부족해서 헬조선에 빠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거꾸로 헬조선이 나를 이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다고 생각한다. 헬조선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 나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N포 세대 사이에 집단적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물론 헬조선 현상 속에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중요한 숙제가 남아 있다. 헬조선을 극복의 대상이 아닌 회피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통해 헬조선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표명한 대다수 N포 세대가 그 다음으로 찾는 단어는 ‘탈조선’이다. 궁극적으로는 지옥 같은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겠다는 의미인데, 심지어 단기 해외여행이나 어학연수를 떠나는 일조차도 탈조선했다고 말한다. 탈조선은 N포 세대가 헬조선을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면서도 아직까지는 이를 불가항력의 상황이라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헬조선이란 구조 안에서 N포 세대가 채택한 유력한 돌파구가 탈조선이라 하겠다.

비상식의 사회

하지만 꿈과 희망마저 포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대다수 N포 세대에게 탈조선이란 어쩌면 또 하나의 포기해야 할 대상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탈조선의 기회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N포 세대보다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헬조선의 기득권 세력에게 훨씬 더 많이 열려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군 면제 등을 목적으로 자녀의 이중국적을 취득하기 위한 원정출산, 입시지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고액의 학비를 마다않고 감행하는 조기유학, 그리고 조세피난처를 찾아 설립된 부유층의 페이퍼 컴퍼니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탈조선은 진작부터 헬조선의 기득권 세력이 독점적으로 누려오던 특권 아닌 특권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N포 세대에게 감히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탈조선은 결코 그대들의 몫이 아니라고. 어쩌면 꼰대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또 감히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헬조선은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교 모바일융합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