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안녕 내 청춘, 안녕 내 청춘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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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실버전용 극장 서대문 아트홀 폐관… 노인을 위한 문화공간은 어디로

상영작은 1948년에 만들어진 <자전거 도둑>이었다. 올해 흑백영화 <아티스트>가 아카데미상을 석권했다지만 요즘 누가 이런 흑백영화를 볼까 싶었다. 극장 안은 제법 사람들로 차 있었다. 스크린 바로 앞 몇 줄과 맨 뒤쪽을 제외하면 자리를 채운 관객은 400명 내외. 대부분 60∼70대 노인들이었다. 다른 극장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극장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팝콘 대신 3개에 1000원 하는 구운 가래떡을 간식으로 샀다. 가끔 몇 장면에서 웃음이 터졌지만 그 소리는 나지막했다. 미처 끄지 못한 전화벨이 여기저기서 울렸다. 뒤를 돌아보거나 눈치를 주며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 나이쯤 되면 누구나 자주 깜박한다는 걸 이해한다는 듯이. 2010년부터 노인 전용 영화관을 운영하는 서대문 아트홀의 마지막 모습이다.

극장 운영 어려워도 관객호응은 좋아
지난 7월 11일 48년의 역사를 지닌 서대문 아트홀(옛 화양극장)이 폐관했다. 서울에 남은 마지막 단관극장이 사라진 셈이다. 이유는 재개발 때문이다. 극장 자리에는 25층짜리 대형 관광호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11일 <자건거 도둑> 상영을 끝으로 문을 닫은 서울 서대문 아트홀에서 마지막 영화를 본 노인들이 극장을 나서고 있다. | 김창길 기자



1회 상영이 끝난 12시 반쯤 ‘추억을 파는 극장’의 김은주 대표는 취재진과 관객 앞에서 삭발을 했다. 삭발은 극장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의 뜻이다. 김 대표는 “1만여명 어르신들의 서명을 받았음에도 그 약속을 못 지켰다”고 했다. 

2007년에도 서대문 아트홀은 문을 닫을 뻔했다. 시사회 전용극장 드림시네마(서대문 아트홀의 전 이름) 간판을 달고 영업할 때였다. 건물주가 재개발을 계획했으나 용적률이 낮아 취소했다. 아듀 이벤트까지 마쳤던 극장은 극적으로 살아났다. 당시 건물주로부터 ‘적어도 5년간 건물 사용을 보장한다’는 구두약속을 받았다고 김씨는 주장한다. 리모델링을 마친 2010년 3월 극장은 ‘실버영화관’으로 재개관했다. 그러나 지난해 여름 극장 건물이 팔리고 용적률이 완화되면서 다시 재개발이 추진됐다. 개발업체 측이 건물을 비워달라며 제기한 명도소송의 법적 판결에 따라 폐관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 대표는 서대문 아트홀에 실버영화관을 개관하기 전인 2009년 초 종로 허리우드 극장에 노인 전용 극장을 처음 열었다. 드림시네마의 폐관 행사로 <더티 댄싱>을 상영한 게 계기였다. 영화를 보러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멀리서 찾아왔다. “추억의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며 김 대표에게 2만원을 쥐어준 노부부도 있었다. 김 대표는 “어르신들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젊은 사람 취향에만 맞춘 극장에 노인들이 좋아하는 영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르신들을 위한 극장 운영은 금전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관객 호응은 좋았다. 학창시절 단체관람 또는 청춘시절 옛사랑과 봤던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모였다. 허리우드 극장의 경우 많으면 하루 관객 700∼800명을 넘는다. 서대문 아트홀은 400명 안팎이다. 문제는 필름 가격과 관람료 2000원이다. 필름을 빌리면 되는 최신 영화와 달리 구입을 해야 하는 옛 영화 필름 가격은 3000만원 이상이다. “시나 기업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돈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필름을 구입했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경영은 어렵지만 김 대표는 어르신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관람료를 올릴 생각이 없다.         

서대문 아트홀은 노인들의 안식처였다. 젊은 시절 바쁘게 사느라 미처 극장에서 관람하지 못했던 그 시절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극장을 애용했던 허영길씨(76·남)는 “탑골공원에 가면 노인들이 많지만 모여서 할 거리가 없다”며 “옛 추억을 떠올리며 또래 친구들을 만나니 늙지 않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서대문 아트홀을 운영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의 김은주 대표가 11일 삭발식을 거행하고 있다.

극장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이용자들의 아쉬움은 크다. 남금희씨(75·여)는 허리우드 극장이 처음 실버영화를 상영할 무렵부터 단골이었다. “혼자 알기 아까워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노인들에게 영화관 전단을 건네면 반응이 좋았다”는 남씨는 지금 아예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 “재개발도 좋지만 서울에 남은 마지막 단관극장을 지켜 관광명소로 만들면 좋겠다”는 게 할머니의 바람이다. 

노인들이 일반극장보다 실버극장을 선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단관영화관에 익숙한 세대이다보니 상영관이 여러 개인 멀티플렉스 극장 이용을 어렵게 느낀다. 입장해야 하는 관을 착각해 잘못 들어섰다가 직원들의 비웃음을 산 경험은 멀티플렉스 극장을 꺼리게 된 이유다. 또 다른 매력은 저렴한 관람료다. 별다른 수입이 없는 노인들에게 평일에 적게는 8000원, 관객이 몰리는 주말엔 9000원까지 오르는 일반영화관 관람료는 부담이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과 모여 부담 없이 옛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랑방’이라는 점도 노인들의 발길이 서대문 아트홀로 향하는 이유다.  

자신들의 쉼터를 지키고 싶었던 노인들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저예산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소규모 극장의 폐관을 SNS로 알리듯 노인들은 서명을 통해 극장을 살리려고 했다. “힘들게 어르신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사라지는 건 문제”라며 안타까워하는 김 대표는 자신을 도와준 노인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서울에 실버영화관 2곳만 남아
서대문 아트홀은 폐관하지만 노인을 위한 극장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종로 3가 허리우드 극장과 서울시가 연신내에서 운영하는 ‘청춘극장’의 문은 열려 있다. 허리우드 극장은 서대문 아트홀을 이용하던 관객들이 몰릴 것으로 기대한다.   

서울시는 2010년 10월부터 서대문 아트홀을 빌려 ‘청춘극장’을 운영했다. 현재는 메가박스 은평 8층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다. 그러나 서대문과 종로에 비해 접근성이 낮고 200명밖에 수용하지 못해 공간이 협소하다는 평이다. 서울시는 “서대문 아트홀의 지리적 장점은 알지만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청춘극장을 이전한 것”이며 “대관료와 지하철역에서의 거리 등을 고려해 장소를 선정했다”는 입장이다.

이동연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은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을 위한 문화공간을 노인복지센터 등 복지개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서대문 아트홀의 폐관은 “경쟁력 없는 문화공간이 개발주의에 밀리는 현실을 보여준 사례”로 공공문화정책의 부실을 지적했다.  

<선담은 인턴기자 luvya0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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