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중산층에도 ‘등급’이 있다

소득수준과 가치관 따라 예비 부유층, 전형적·무관심형·생계형 중산층으로 세분

“당신은 중산층입니까?”

한 가족이 강변으로 소풍을 가 바비큐를 즐기고 있는 모습.

미국의 한 언론은 중산층을 ‘소득은 먹고살기에 충분하지만 퇴근길에 피자 한 판 사거나, 영화를 보거나, 국제전화를 걸기 위해 돈을 쓸 때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프랑스에서는 외국어를 할 줄 알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와 악기가 있으며 자신만의 요리가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에 따르면 ‘중위 소득의 70~150%에 해당하는 계층’이 중산층이다. 지난해 상반기 우리나라 도시근로자 가구의 소득을 기준으로 할 경우 중위 소득은 월 283만 원. 따라서 한 달 소득이 200만~499만 원인 가구가 중산층으로 분류된다. 이는 외형적으로 99㎡(30평형대) 아파트와 2000㏄ 중형차를 소유한 도시근로자로 대변된다.

우리 사회는 중산층을 자본주의와 경제성장, 민주주의와 사회안전망의 중추로 인식하는 등 정치·사회적인 관점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최근 사회문제, 이데올로기 혼란, 양극화 등으로 ‘한국사회의 주춧돌’로서 중산층 복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선 주자들도 저마다 “중산층이 70%인 나라” “4000만 중산층 시대를 열겠다”며 ‘중산층 복원’ ‘중산층 확대’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2006년 삼성경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8년간 중위 소득 계층(평균 소득의 50~150%) 비율은 5.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하위층 비율은 3.7%, 상위층 비율은 1.7% 증가했다. 또한 소득 양극화로 중산층 내에서도 소득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득 상위 30~50% 가구의 월 평균 소득은 하위 30~50%의 소득의 1.6배 이상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8월 29일 삼성경제연구소에선 중산층에 관한 흥미로운 보고서를 내놨다. ‘4인 4색의 중산층 소비시장’이라는 보고서의 핵심은 “중산층이라고 다 같은 중산층이 아니다”, 즉 중산층의 양극화된 소득 구조와 소비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6년 ‘한국종합사회조사(KGSS)’ 자료를 통해 전국의 만 18세 이상 남녀 중 1600명을 만나 국내 중산층의 세분화 작업을 시도했다. 월 평균 가구 소득이 200만~499만 원에 속하는 가구를 중산층이라고 정의했을 때, 응답자의 가치관과 가구 소득을 기준으로 군집분석한 결과 중산층은 ▶ 돈, 일을 중시하는 성취 지향적 가치관을 지닌 예비 부유층(월 평균 가구 소득 420만~499만 원) ▶ 일, 건강, 가족을 고르게 중시하는 균형적 가치관을 보유한 전형적 중산층(월 평균 가구 소득 350만~419만 원) ▶ 돈에 대한 관심이 적고 사회적 성취와 발전에 대한 관심도가 낮은, 내부 지향적 가치관을 지닌 무관심형 중산층(월 평균 가구 소득 270만~349만 원) ▶ 돈, 건강 등 기본생활의 1차적 니즈에 치우친 저소득 경계 소비층인 생계형 중산층(월 평균 가구 소득 200만~269만 원)으로 세분화됐다.

예비 부유층은 매스티지의 주고객

먼저 중산층에서 가장 상위인 ‘예비 부유층’은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추종하고 사회적 교류가 왕성한 경향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월 평균 가구 소득 450만 원의 고학력(60%가 대졸 이상) 소비층으로, 20대와 미혼, 맞벌이 비중이 높고 주로 대도시나 그 주변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좋은 직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신생활을 즐기면서 자기계발에 돈을 아끼지 않는 미혼여성인 ‘골드 미스’도 이에 해당한다. 최순화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 계층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보다 나를 위해 살고, 나를 위해 소비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편”이라며, “해외 문화 와 브랜드에 대한 관심과 수용도가 높아 트렌드를 주도하고 매스티지[대중제품(Mass Product)과 명품(Prestige Product)을 조합한 신조어로 비교적 가격이 낮은 명품을 의미] 브랜드의 주요 고객이자 최근 금융권에서 펀드와 주식투자 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계층”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의 경우 대부분 루이뷔통 제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 중산층용 중저가 공략에 나선 혼다의 CR-V, 포드의 몬데오, 폭스바겐의 골프 등 수입차를 보유하기도 한다. 최근 개장해 하루 1만 명 방문, 7억~8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의 주고객층도 여성이다.

‘전형적 중산층’은 스스로 대한민국 평균 소비층이라고 생각하고, 가족애와 세대간 친화를 중시하는 계층이다. 월 평균 가구 소득 384만 원, 균형감각을 지닌 소비 집단으로 30~40대 부모와 성장기 자녀로 구성되며, 주로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개인보다 가족애, 세대간의 친화를 중시하면서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여가 및 소비생활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1주일에 1회 이상 가족과 여가활동을 즐기는 비율이 75%이며 결혼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 이들은 주로 자녀를 통해 IT, 가전, 패션, 자동차 등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관심형 중산층’부터는 개념이 판이하다. 최 수석연구원은 “이들은 스스로 하층에 속한다고 답한 비율이 27%에 달할 정도로 상대적인 열등감과 상실감에 젖어 있으며, 생활만족도가 낮은 현대 사회의 지치고 우울한 계층”이라며 “월 평균 가구 소득 300만 원의 40~50대 부모와 청소년 이상 자녀로 구성되며, 주로 대도시 주변과 소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은 일에 대한 관심과 의욕이 부족한 체념형 소비층”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주의에 대해 빈부격차, 부정부패 등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물질적 풍요라는 긍정적 시각도 노출하고 있는 계층이다. 이들은 성능·가격 등을 꼼꼼히 따져보기보다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이나 브랜드를 관성적으로 재구매하는 소비층으로 나타났다.

생계형은 전통적 가치 중시

월 평균 가구 소득 224만 원의 저소득 경계 소비층인 ‘생계형 중산층’은 소도시나 시골에 거주하며 가격에 민감한 보수적 소비성향을 보인다. 생필품 위주의 소비에서는 벗어났지만 소비의 폭은 제한적. 자신을 위한 소비에 적극적인 50대 고소득 계층(New 50s나 Wealthy 50s), 이른바 ‘신중년층’에 비해 경제적 여유가 현저히 떨어지고 제품·소비에 대한 정보와 경험이 부족한 실버 소비층이 주류로, 특히 조사 대상자의 85.7%가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지켜져야 한다’고 응답하는 등 전통적인 성역할을 고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는 1960년대 이후 개방과 세계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중산층이 두터워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실제 1984년부터 외환위기 이전까지 한국의 소득 양극화 지수는 높은 경제성장률과 임금상승률에 힘입어 개선 추세를 보였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후유증으로 한국의 소득 양극화는 미국보다 낫지만 일본보다는 악화된 실정이다.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금융·노동 분야의 구조조정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도시와 지방 간 임금 격차가 커지고 수출 증대에 따른 투자와 고용 증대, 그리고 소비 증가로 이어지는 경제 선순환 고리가 약화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잘 나가는 20%’는 압축성장의 열매를 향유하는 반면 ‘희망 없는 80%’는 압축성장의 뒤안길에서 절망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최 수석연구원은 “중산층의 가치관은 상류층과 비슷하지만 실제 생활수준은 상류층에 뒤떨어진다”며 “그 때문에 스스로 중산층이라는 인식이 약하며, 사회·경제 전반에 대해 저소득층과 별반 다름없는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반적으로 식사 후 “맛있게 먹었니?”라고 묻는 ‘안정적 중산층’에서 “배불리 먹었니?”라고 묻는 ‘위태로운 중산층’으로 하락하는 추세라는 지적이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