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보수의 발목은 박근혜가 잡는다

아스팔트 우파에 기댄 수구 반공세력 결집… 합리적 온건부수 표심은 갈 곳을 잃어

청와대에서 나와도 정치는 계속된다.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 이틀 만에 자택으로 돌아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메시지는 사실상 ‘탄핵 불복’이었다. 국정농단에 대한 대국민 사과도, 흥분한 지지자들을 달래는 메시지도 없었다.

끝까지 분열만을 남긴 그의 발언 이후 ‘박근혜 호위무사’를 자처한 친박계 의원들이 꿈틀대고 있다. 폐족의 길을 가는 대신 박 전 대통령의 명예회복과 정치적 부활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앞으로 3심이 남아있고, 그 역사적인 판결은 우리가 승리할 것”(홍문종 자유한국당 의원)이라며 장기전을 예고했다. 헌재의 파면 선고 승복이 당론인데, 이마저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14일 “대통령을 끝까지 지키겠다”면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애국 보수의 재건’을 출마 이유로 내걸었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 불복 선언으로 구여권인 자유한국당의 입장도 난감해졌다. 당명까지 바꾸고 대선 전 전열 정비에 나섰는데, 이 상태로라면 ‘도로 친박당’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 자명하다. 박 전 대통령의 그림자를 가능한 한 빨리 털어내고 개헌을 중심으로 한 반문(반문재인) 연대로 대선판을 재편하겠다는 지도부 구상에도 변수가 생겼다. 당내 갈등에도 다시 스파크가 터졌다. 비박 잔류세력의 2차 분화 가능성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결국 대선 전 보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여전히 박근혜 전 대통령인 셈이다.

탄핵국면에서 자유한국당은 '태극기 집회'로 상징되는 아스팔트 우파에 대한 적극적인 구애 전략을 펼쳤다. / 연합뉴스

보수도 대변 못하는 보수정치

보수정치세력은 이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사면초가 상태다. 2012년 대선에서 보수 결집으로 끌어낸 51.6%의 지지는 박근혜 정권 4년 만에 증발했다. 51.6%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첫 과반 득표이자 최고 득표율이었다.

시계를 더 과거로 돌려 2007년 대선 전에는 이명박·박근혜 두 후보의 지지율 합이 60%를 넘어섰다. 2007년 1월 1일 발표된 주요 신문사 여론조사를 보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40%가 넘는 독보적인 선두를 달렸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17~20%로 그 뒤를 이었다. 현재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희정 충남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3명의 민주당 후보 지지율 합이 60%에 이르는 것과 흡사하다.

정당 지지율도 처참한 수준이다. 한국갤럽의 3월 셋째 주(14~16일) 여론조사 결과(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를 보면,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12%, 바른정당은 4%에 그쳤다. 줄곧 한 자릿수에 머물던 바른정당 지지율은 정의당(5%)에도 추월당했다. 두 정당의 지지율을 합쳐도 더불어민주당 지지율(46%)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유권자의 정치 지형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기점으로 달라졌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이념성향 비율은 진보(36.9%), 중도(29.1%), 보수(26.3%) 순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기 전인 지난해 11월 이전엔 자신을 ‘보수’라고 답한 이들이 30% 선을 유지했지만, 11월부터 자신을 ‘진보’라고 답한 이들이 ‘보수’ 응답을 앞서는 역전현상이 발생했다. 물론 이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많은 여론 분석가들은 탄핵정국을 계기로 보수가 스스로를 보수라고 말하길 꺼려한다고 본다.

주목할 점은 자신의 이념성향을 ‘보수’라고 답한 응답자의 40%(자유한국당 31%, 국민의당 9%)만이 보수정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 유권자 비율이 26% 남짓인데, 두 정당 지지율은 합쳐봐야 16%다. 보수정당이 보수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현재 보수정치의 위기는 여기에 있다.

후보는 넘쳐나지만 누구 하나 눈에 띄지 않는 게 현재 두 보수정당의 상황이다. 자유한국당에서 출사표를 던진 주자만 9명에 달하지만, 지지율은 대부분 0%대에 멈춰 있다.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 남경필 경기지사도 유의미한 스코어를 내지 못하고 있다. 유력한 보수 후보가 없는 전례 없는 대선구도다.

‘아스팔트 우파’로 될까

한때나마 10% 안팎의 지지율을 보였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3월 15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보수진영은 더욱 패닉 상태에 빠졌다. 황 대행의 출마를 염두에 두고 당내 경선 컷오프 후 추가등록이라는 특례조항까지 만들었던 자유한국당은 그의 불출마 선언 직후 특례규정 자체를 취소했다. 황교안을 통한 보수층 결집 시나리오는 반기문 카드에 이어 또다시 무용지물이 됐다.

보수주자들 사이에서는 그나마 가장 앞서 있던 황 권한대행의 지지율은 대통령 탄핵에 극렬하게 반대했던 ‘아스팔트 보수층’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보수를 완전히 궤멸시켰다”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말처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보수의 큰 조각이 무당파나 중도로 떨어져 나간 이후 남은 것은 태극기 집회로 상징되는 이들 ‘아스팔트 우파’다.

자유한국당은 탄핵정국에서 이들을 향한 노골적인 구애전략을 취해 왔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여론조사 수치로는 15~18% 수준으로 나타나는 강경보수에 기댄 것이다.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파면이란 메가톤급 변수에도 결코 지지를 철회하지 않을 집토끼들이다. 미미한 지지율에 허덕이던 당내 대선주자들이 은근슬쩍 탄핵 반대집회에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하며 차츰 이들을 자극하는 원색적인 발언을 쏟아냈고,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 영입 이후 이뤄지던 쇄신작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국 지도부가 나서 좌파 집권을 막기 위한 ‘범보수 대동단결론’을 선전했고, 다시 수구의 깃발 아래로 몰려갔다. 태극기 집회를 띄우며 민심 역전이라는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그래봐야 결국 18%(3월 첫째 주 탄핵 반대 여론조사)였다.

다만 이 전략은 결국 보수 강경파를 자유한국당 아래 집결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보수 적통’을 자임하는 바른정당으로의 지지층 이탈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박근혜의 아스팔트 지지층에게 유승민 의원은 ‘배신자’로 여겨진다. 유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이자 친박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경북지역에서의 ‘비호감도’가 73%에 달하는 상황이다.

친박과 거리가 먼 홍준표 경남지사가 헌재의 파면 결정을 “마치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연상하게 하는 광장의 촛불 영향을 받았다”면서 “부끄러운 판결문”이라고 깎아내린 것 역시 이들의 지지를 이어받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동시에 홍 지사는 “탄핵은 끝났으니 이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머릿속에서 지우고 우파는 총집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 상황은 우파 정치인이 딛고 있는 딜레마다.

수구보수의 자승자박

아스팔트 우파의 등에 올라탄 보수정치는 오랜 기간 계승돼온 반공보수주의 동원정치의 재현이기도 하다. 탄핵정국을 계기로 70년간 한몸이나 다름 없었던 반공보수와 온건보수는 갈라섰다. 이미 보수정치가 분화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보수의 한 축은 반공보수라는 손 쉬운 동원정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궁지로 몰릴수록 ‘계엄령 선포’까지 주장하는 아스팔트 우파와 결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등 위에 올라탔다. 소수이지만 지분이 확실한, 가장 손 쉬운 전략을 취한 셈이다.

하지만 탄핵을 기점으로 달라진 것은 이제 안보 이슈, 개발주의로 상징되는 박정희 신화 등 ‘확실한 표’를 끌어올 수 있는 의제들이 용도폐기됐다는 점이다. 지난달 있었던 북한 김정남 피살사건은 탄핵 여론에 의미있는 영향을 주지 못했고, 박근혜 정권 후반기 국정교과서 논란은 중도보수 유권자들의 등을 돌리게 했다.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진 보수정권 9년 동안 보수의 가치를 설득할 어떤 대안적 의제도 담론도 없었다. 박정희만을 보수의 판매전략으로 내걸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보수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탄핵정국을 ‘박정희 패러다임의 붕괴’로 설명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박상훈 정치발전소 소장의 대담을 묶은 책 <양손잡이 민주주의>에서 최 교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집회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로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 운영원리이자 사회의 지배가치로 작동했던 박정희 패러다임의 붕괴를 꼽는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지난해 11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특히 최 교수는 보수여당의 분열과 비박계 보수의 탄핵 합류에 주목하며 “반공 강경보수에서 계몽적 온건보수로의 전환은 보수가 한국 사회와 정치에서 소멸하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자기 변화와 결단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소장 역시 촛불시위가 남긴 가장 큰 민주적 효과로 “한국의 정당체계가 1990년 3당 합당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을 꼽는다. “향후 보수가 한국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퇴행시켰던, 과거와 같은 ‘냉전 반공주의에 기초를 둔 비이성적 정치 동원’ 대신 다른 이념 내지 사회적 기반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압박에 노출된 것, 이른바 비박일지라도 그런 변화를 통해서만 ‘정치적 시민권’을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냉전-반공-권위주의의 특징을 갖는, 강경보수가 주도했던 그간의 정당정치는 끝나고 민주적이면서도 사회 통합적 역할을 하는 보수만이 인정되는 정당정치”를 기대한다.

다만 분화된 ‘온건 보수’가 얼마나 확장력을 가지고 보수의 주도권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찍힌다. 이번 대선이 진작부터 ‘문재인이냐, 아니냐’의 전개 양상을 보이면서 보수정당의 집권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보수정당 입장에서도 올해 대선은 붕괴된 보수 내부의 주도권 싸움에 가깝다. 삼성동 자택 골목으로 친박들이 몰려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수 내부의 주도권을 틀어쥐어야만 내년도 지방선거에서 재기를 기대할 수 있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대통령 탄핵으로 수구적인 냉전보수세력이 많이 약화되겠지만, 이들이 청산되고 합리적 보수가 보수세력을 주도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보수정치가 궤멸 상황에 놓였다고 해서 보수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바른정당 등 온건보수가 이른바 ‘샤이 보수’의 존재에 기대를 걸듯, 대통령 파면이라는 지극히 특수한 상황에서 보수층의 표심이 현재 갈 곳을 찾지 못해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이번 대선의 핵심 변수다. 보수의 개혁은 가능할까. 탄핵의 봄, 한국의 보수정치는 이제 그 출발선 위에 섰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