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 대한민국의 미래는 선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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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제작소가 찾아낸 시대정신은 ‘안전한 놀이터’와 ‘지속가능한 삶’

위기.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다. 다들 안다. 조선업 침몰과 구조조정은 앞으로 한국 사회가 맞게 될 급변상황의 신호탄이라는 것을. 위기라는 키워드를 뒤집어놓고 보면 ‘불안’이다. 한국 사회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이다. 어떻게 하면 돌파할 수 있을까.

“남은 시간은 7~8년뿐, 그 뒤에는 어떤 정책도 소용없다.” 올해 상반기, SNS에서 널리 공유된 장덕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소장이 내린 진단이다. 진단은 부양률 데이터에 기반했다. 부양률이란 일하는 사람 100명이 일 안 하는 사람 몇 명을 부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독립민간싱크탱크 희망제작소 이원재 소장과의 인터뷰에서 장 교수가 제시한 데이터에 따르면 현재 45 수준인 부양률은 2050년 95에 달하며, 그 중 75는 노인 부양이다. 다시 말해, 돈 버는 사람들의 소득 절반 가까이가 노인 부양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양률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시점은 7~8년 후다. <주간경향>은 과거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의 급격한 인구 구성 변화가 가져올 사회구조 변화에 대한 전망을 다룬 적이 있다.(1162호·인구절벽 후 절망사회 ‘탈출구’는 없나 등 기사 참조) 경제전문가 해리 덴트는 ‘소비·노동·투자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세상’을 뜻하는 인구절벽(demographic cliff)을 한국 사회가 맞닥뜨릴 시점을 2018년이라고 못 박아 제시한다.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이 15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이 15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한국 사회가 맞이할 ‘파국’ 불가피하나
인구구조는 장기지속 지표다. 다시 말해, 관련 자원배분이나 정책을 바꾼다고 해서 3~4년 사이에 정책 결과물이 나오는 구조가 아니다. 인구구조의 기초를 이루는 출산율이 당장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태어난 구성원이 사회·경제활동에 참여하는 15년이나 20년 후에야 변화의 결과가 반영된다. 결국 한국 사회가 맞이하게 될 파국은 불가피한 것일까.

희망제작소는 ‘시대정신을 묻는다’라는 주제로 지난 1월부터 장 교수를 비롯해 각 분야별 전문가 11인을 인터뷰해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한국 사회의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인터뷰 내용은 화제를 모았다. 선망국(先亡國)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의 인터뷰도 화제를 모았다. 선망국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어본다면 ‘먼저 망한 나라’다. 인터뷰에서 조한 교수는 “어차피 선진국 개념도 의미가 없어지는데, 언제까지나 선진국 뒤만 쫓을 일이 아니다”라며 “한국은 이미 굉장히 앞서나가는 선망국”이라고 말한다. ‘선망국’으로서 한국에서 청년문제나 세대문제와 같은 문제를 푸는 해법을 찾아낸다면 그것이 인류에게 나름대로의 희망을 제시하는 일이 아니냐는 되물음이다.

희망제작소가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던진 공통질문은 세 가지다. 첫째,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둘째, 이대로 갈 경우 5~10년 후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떠할까. 셋째,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난 사람들의 성향은 정말 다양했다. 이분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보면 자본주의적 근로관계나 시장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분도 있었고, 이런 질서의 급진적 해체를 주장하는 분도 있었다. 인터뷰의 취지는 컨센서스, 공통으로 담고 있는 진단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의 말이다. 6월 15일, 서울시청에서 시대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이 결과 발표 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 직전, 이 소장을 만나 인터뷰했다.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개념은 사실 굉장히 큰 이야기이고 철학적 개념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라면 이미 뉴라이트가 전유하는 개념이 돼버렸다. 시대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희망제작소라는 민간연구기관의 차원에서 보면 2006년에 설립돼 올해로 창립 10주년이 되었다. 설립 배경을 보면 민주화라는 큰 이야기가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산업화라는 거대담론에서 나온 의제들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보고, 좀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 실험을 해보자는 취지였다. 말하자면 지난 10년간 축적한 미시적인 의제 설정을 거시적으로 정리한다면 어떤 어젠다로 묶을 수 있는지 들여다 본 것이다.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 본다면 민주화와 산업화 이후 보수에서는 선진화나 정보화와 같은 어젠다를 이야기했고, 진보는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를 내세웠는데, 2012년 대선 이후에 그 논의가 실종이 된 것으로 봤다. 지난 총선도 전국선거인데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진단이 실종됐다고 판단했다.”

컨센서스 도출은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11명 전문가들의 서로 다른 진단들의 텍스트들을 모두 모은 다음 텍스트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식과 의미를 뽑아낸다. 일종의 텍스트 마이닝 기법이다. 단지 공통인식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들의 선후관계를 찾아내 제시하는 방식이다. 분석은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가 맡아 진행했다.

이를테면 북한과의 적대적 공생, 성장주의, 재벌과 부동산이라는 과거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주요 키워드는 다시 ‘박정희’라는 지표로 회귀된다.

박정희와 IMF, 한국 사회 과거규정 모델
11인 전문가 진단을 통해 희망제작소가 찾아낸 과거는 2개의 모델이 겹친 형태였다. 하나는 국가 주도 성장지상주의의 모델로, 다른 이름으로 하면 박정희 모델이었다. 다른 하나는 IMF 모델이다. 이 모델의 다른 이름은 격차기반 성장지상주의 모델이다. 성장지상주의를 공통으로 하지만 미묘하게 서로 다르다. 국가 주도 성장지상주의에서 사회적 가치는 가부장적 획일주의였다. 위에서 기획하고 결정하면 아래는 모두 다같이 따라야 하는 모델이었다. 국가가 자원을 배분하는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에 국가에 가까이 가야 자원을 배분받고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정경유착’이나 소 팔아 고시공부시키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나온 것이 이 시기다.

IMF 환란 이후의 사회는 조금 다르다. 주도자가 국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 이 모델에서 사회적 가치는 사회구성원 간 격차가 커지면 더 나은 보상을 획득하기 위해 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이런 경쟁이 사회적 효율성을 높일 것이라는 데 기반을 둔다. 이것은 공식가치다. 국가 주도나 격차기반 사회나 모두 개인들은 다른 선택을 했다. ‘시장 뒤에 숨어 경쟁을 피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다. 격차기반 사회는 ‘공무원시험 열풍’, ‘자격증 전성시대’로 특징지어지는 시대다. 이 사회에서 협력과 연대는 불필요하다. 혼자 경쟁하는 것이 더 가볍고 안전하며 생존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향가치는 ‘각자도생형 성장지상주의’라고 희망제작소는 결론 내리고 있다.

15일 서울시청 시민청 동그라미방에서 열린 희망제작소의 ‘시대정신을 묻는다’ 결과 발표 간담회. / 정용인 기자

15일 서울시청 시민청 동그라미방에서 열린 희망제작소의 ‘시대정신을 묻는다’ 결과 발표 간담회. / 정용인 기자

두 모델 모두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성장 실패의 원인이 됐다고 이 소장은 말했다. “박정희 모델은 시간이 흐르면서 특권층을 만들어냈다. 특권층은 획일주의로 사회를 지배하고, 지대를 획득하려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런 경향은 자본주의의 성장기반인 창의성을 억압한다. 글로벌 IT혁신기업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창의성이 점점 더 중요한 성장요인이 돼가면서 이 모델은 원래 의도했던 경제성장도 달성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조선·해운업 부실화 과정은 박정희 모델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IMF 모델’의 한계도 뚜렷하다. 경쟁을 통한 효율화를 추구했지만 생존경쟁이 승자 독식으로 이어지면서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사다리를 걷어차는, 다시 말해 격차를 고착화시키려는 경향을 드러내게 된다. 새로운 기업이 나타나기 어려운 재벌 중심 경제체제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심화 등이 빚은 결과다. 결과적으로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성장정체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희망제작소가 잠정적으로 제시하는 대안은 ‘공동체 주도의 지속가능 발전 모델’이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사회성장’이다. 경제성장이나 국가성장이 아니다. 제도나 국가는 사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그쳐야 한다. 가치를 주창하고 구현하는 주체를 국가나 정치권력에서 사회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고, 기업에서도 가치를 구현하는 쪽을 사회의 자발적 결사체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성장, 국가성장 아닌 사회성장 돼야”
결과 발표 간담회에서 희망제작소 측은 시대정신의 키워드로 ‘안전한 놀이터(playground)’와 ‘지속가능한 삶’을 제시했다. ‘안전한 놀이터’라는 것은 다른 이름으로 하면 ‘안전한 시장’이다. 생산활동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생존의 위협 없이 창조적인 시도를 하며, 대화와 협력을 통해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하도록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목표다.

안전한 놀이터라는 것이 우리가 향후 5~10년 사이에 지향해야 할 시대정신으로서 선뜻 와닿는 개념은 아니다.
“안전한 놀이터라는 개념에는 경제적인 부분뿐 아니라 문화적인 부분도 포괄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들어 있다. 놀이터는 다시 말해서 시장이다. 그런데 현재의 ‘시장’은 첫째 공정하지 못하고, 둘째 실패자에게 안정적이지 못하다. 실패해도 시장에서 재기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이것을 중심으로 보면 국가가 해야 할 일이 나온다. 안전한 놀이터라는 것은 목적이 아니고, 공동체가 일과 생활을 균형되게 펼칠 수 있도록 스스로 만들어가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안전한 놀이터라는 것이 일종의 메타포처럼 들린다.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지금처럼 가서는 빠른 시일 내에 한국 사회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전망을 보여줬다. 안전한 놀이터를 만들면 해결될 문제일까.
“연결되는 문제라고 본다. 미성년자에 대한 지원 같은 것은 지금보다 단순화해서 명확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한다면 미성년자, 아동에 대한 지원을 부모나 가족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성년자 개인에게 하는 것으로 체계를 바꾸면 된다. 현재 북유럽에서 하는 방식인데, 그렇게 되면 미혼모 가정이든 혼자 시설에 있는 사람이든 다 지원대상이 된다. 지원 받을 수 있는 연령의 상한선을 만 12세로 할지, 15세로 할지, 아니면 18세로 할지는 합의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 일정 나이까지는 국가가 모든 것을 담당한다는 개념이다. 부모나 시설이 그 아이를 지원하는 경우, 국가가 해야 할 ‘의무’를 위탁하는 것으로 보는 식으로의 인식 전환이다. 이렇게 큰 틀을 바꾸면 ‘안전한 놀이터’를 구성하는 여러 문제의 해결책이 보인다. 고용보험을 강화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고용보험률의 누진성을 올리는 대신 실업급여를 대폭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실업급여를 지금의 6개월에서 2년간 70% 지원으로 올리면 고용불안도 굉장히 줄어들 수 있고, 그 기반 위에서 창업도 늘어날 수 있다. 이를테면 임금차별은 국가가 강력한 잣대를 들이대면 해소할 수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면 된다. 이번 인터뷰에서 장하성 교수도 지적한 이야기다. 이런 것들을 다 갖춰서 안전한 시장, 안전한 놀이터를 만들어내면 그 안에서 역동적인 새로운 혁신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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