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업그레이드]양창수 전 대법관님께 답합니다

지난 6월 25일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도 노동조합에 가입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에 앞서 <주간경향>은 5월 12일자인 1125호에서 이 사건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심리 중인 사실을 단독으로 취재, 주요 쟁점에 대해 심층보도했습니다. 특히 기사에서는 이 재판이 10년 가까이 지연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임기 6년 동안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퇴임한 주심 양창수 전 대법관의 책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기사가 인터넷에 게재된 직후 양 전 대법관(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은 “재판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 “악의적인 왜곡”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비난” “쉽사리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의하는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주간경향>은 이 사건 선고를 계기로 양 전 대법관의 항의와 지적을 독자에게도 공개하고 반론하기로 했습니다. 독자들의 평가를 통해 사법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기를 기대합니다. 메일 전문은 <주간경향>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존경하는 양창수 전 대법관님께

대법관님의 메일을 받고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대법관님께서 보내신 서한에 대해 어떻게 답하는 게 가장 좋을지 가까운 법조인들과 상의했습니다. 특히 대법관님께서 마음이 상하지 않을 방법을 찾으려 대법관님의 서울대학교 교수 시절 제자들과도 얘기했습니다. 여러 조언이 있었지만 결국은 제가 결정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저는 출입국관리법 위반자 노동조합 사건이 길지 않은 기간에 선고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올해 안에는 선고될 것이고, 대법원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가을에는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판결이 선고되고 나면 정중히 답장을 올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예상보다도 빠른 지난 6월 25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2대 1의 판결로 노동조합 설립을 허용했습니다.

제가 이 사건을 처음 취재한 것은 2012년 겨울입니다. 대법관님께서 사건을 적시에 처리하지 않는다는 법원 내부의 제보를 받았습니다.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법관들의 평가를 들었습니다. 대법원 공보관실에 3년 이상 장기 미제사건 목록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2013년 2월 12일자로 정보공개를 청구했고 2월 22일 목록을 받았습니다.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입니다. 그 결과 2013년 1월 31일 기준으로 3년 이상 미제는 민사 44건, 형사 19건, 특별 13건 등 모두 76건이었습니다. 주심별로는 양 전 대법관님이 대법관 12명 가운데 34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번에 선고된 노동조합 사건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를 상당 부분 작성했지만 막판에 선임재판연구관의 설득으로 중단했습니다.

“평생 교수로 살아오신 분의 신중한 사건 처리방식을 이해해 달라. 이걸 비판한다면 우리 같은 법관 출신만 대법관을 하라는 얘기밖에 안 된다. 이 기자가 줄곧 주장해온 것이 대법관의 다양성 아니냐.”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고위 법관의 설명이었기에 받아들이고 기사화를 단념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미제사건들은 진척이 되지 않았고, 양 대법관님께서는 2014년 9월 6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셨습니다. 대법관님의 퇴임식을 보면서 주요 사건들의 성격이 이미 희석되고 변질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가 정을병이 1974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단편 ‘육조지’에서 “판사는 미뤄 조진다”고 한 말을 실감했습니다.

지난 4월 이 사건이 전원합의체에 올라갔다는 정보를 듣고 외국인 노동자 노동조합 문제에 관한 학계와 법조계의 논의를 정리해 소개했습니다. 사실 저는 사건의 지연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습니다. 2013년 선임연구관의 설득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과정보다는 앞으로 선고될 사건의 본질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해 지연 문제에 관해서는 아주 짧게 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대법관님께서 “악의적인 왜곡”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비난” “쉽사리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이상, 저는 대법관님께 또 독자들에게 답변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됐습니다.

본지 보도 후 외국인 노동자 노조 허용
대법관님께서는 메일에서 “2011년인가에 받았던 재판연구관의 보고서로 말미암아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는 대법관이 사회 또는 법의 모습에 영향이 큰 법 문제에 대하여 확신도 없는 판결을 해야만 사건을 제대로, 성의 있게 다루는 것입니까”라고도 하셨습니다. 우선 보고서를 받은 시점으로부터도 3년 동안 더 검토를 하시다 퇴임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후임 대법관이 취임한 지 10개월 만에 선고가 됐습니다. 대법관 13명 가운데 12명이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대법관님의 말씀에 비춰보면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문제의 재판연구관이 양 대법관님을 기만하며 태만하게 일을 했거나,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현재 전원합의체가 확신도 없이 판결한 것입니다. 그동안 쌓여온 연구가 하필 후임 대법관이 들어오자마자 보고가 됐다거나, 대법관들이 숙고하던 것을 마침 이번에 결론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대법원 연구관은 100명이 넘습니다. 이들은 ‘대법관의 노예’라고까지 불립니다. 지시받은 보고서를 3년 동안 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판사가 있었다면 호되게 질책해 당장 쫓아내셔야 했습니다.

대법원 판결은 주심이 마음먹으면 선고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한명숙 뇌물사건에 대하여 주심 대법관이 그 임기 동안에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어도 ‘사건을 너무도 함부로 다루었다’고 하셨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이른바 한명숙 사건은 2013년 9월 상고돼 1년 10개월째 심리 중입니다. 주심은 2017년 2월 퇴임하는 이상훈 대법관입니다. 이 대법관이 퇴임 때까지 사건을 미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전에 이미 적절한 시기를 넘긴 것이 분명합니다.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대법관님 말씀이 옳으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 가지 말씀 올리자면 노동조합 사건과 한명숙 사건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한명숙 사건은 형사사건이며 따라서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됩니다. 어느 누구라도 확정판결 전까지 무죄인 것은 헌법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유죄가 선고되는 순간 그 벌을 고스란히 받습니다. 선고가 늦어져봐야 더 고령에 복역할 뿐입니다. 반면 노동조합 재판은 행정부의 결정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수십만의 노동자가 생존의 권리를 확인해달라고 요구한 사건입니다. 한명숙 사건이 어떤 쟁점을 두고 다투는지 몰라도, 현재로서는 소위 대세효가 있는 사건은 아닙니다.

노동조합 사건 선고가 지체되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혹시 패소할 사건이었다고 가정하면 결론이 지연돼 손해볼 것은 없지 않으냐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노동조합 불허가 정의였다면 대법관은 양심을 믿고 선고했어야 합니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출입국관리법 위반자의 노동조합이 불법이라면, 그렇다고 신속하게 선언을 해주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길바닥으로 나서든, 법을 바꾸는 운동을 하든, 한국을 욕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든 했을 겁니다. 대법원은 지난 8년 동안 수많은 인생의 선택지를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대법관님은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의 법적 판단 또는 사건 처리가 혹 어떠한 정치적 입장에서 볼 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특히 뒤에 남는 인터넷자료 등으로 일반 사람이 언제든지 쉽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된 언론보도를 통하여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비난을 하는 것은 법원 또는 법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문제로서 쉽사리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장을 거듭해서, 메일을 받은 자리에서 스무 번쯤 읽었습니다. 전직 대법관에게 이런 메일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대법원 사건, 대법관 소유물 아닙니다”
대법원 사건은 대법관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시민의 고통과 한숨, 땀과 눈물이 서린 운명입니다. 사람의 행복한 시절은 아주 짧습니다. 대법관의 임기는 더욱 짧습니다. 그래서 대법관에게는 사건을 적절한 시기에 빠르게 매듭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대법관 개인의 견해를 관철하기 위해서나 이론적 정합성을 위해 시험하거나 회피할 연구사례가 아닙니다. 저는 대법원의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사건 처리에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를 정치적 목적에 바탕한 비판으로 단정하시고, 근거가 없는 비난이라고 하신 것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더구나 게으른 탓에 법에 관해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기자 3년차에 법원에 나가면서 공소장과 판결문 같은 것들을 처음 보았습니다. ‘구 공판’이라는 말을 몰라 서울중앙지법의 우배석 판사이던 고교 동창을 찾아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습니다. 이후로 딴에는 좋은 법조기자가 되겠다고 잠을 줄여가며 법률서적을 읽었습니다. 지난주에 이사를 하면서 보니 책장에는 법률서적들이 이미 소설과 시집을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감명 깊었던 책 가운데 하나는 대법관님께서 서울대 교수 시절에 쓰신 <민법입문>입니다. 지난밤에 새벽까지 스탠드를 켜놓고 줄친 곳들을 찾아가며 읽었습니다. 대법관님께서는 이렇게 조언하셨습니다. “법 공부는 일생에 걸쳐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사연과 욕망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면서 시련과 모색을 쌓아감으로써 조금씩 전진하여 가는 ‘성인의 공부’이다.” 저는 지난 10여년간 법조기자로 살아왔습니다. 머리가 아둔하고 사람됨이 부족해 유능한 기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아픔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라는 대법관님의 말씀만은 항상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올리는 답장으로 대법관님께 더 많은 것을 배우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께 여러 가지 여쭙고 배우고 싶은 것이 많으나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습하고 더운 여름이지만 항상 강건하시고 연부역강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