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가전시장, AI플랫폼 전쟁

인공지능 서비스의 플랫폼 지분을 놓고 구글과 아마존 대결

독일 베를린에서 지난 8월 31일~9월 5일까지 열린 유럽 최대 가전박람회 ‘IFA 2018’ 현장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바꿔놓을 우리의 미래가 성큼 다가섰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 덕에 기존에 사람이 버튼을 눌러 작동하던 가전제품들은 이제 음성인식으로 동작하고, 집은 사용자의 위치정보를 인식해 실내온도와 조명을 비롯한 환경을 자동으로 조절한다. 이처럼 스마트 가전을 움직이는 ‘인공지능’ 서비스의 플랫폼 지분을 놓고 구글과 아마존의 경쟁도 본격화되고 있었다.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에서 열린 ‘IFA 2018’에서 선보인 ‘스마트홈’ 개념 부스에 관람 인파가 모여들고 있다./최민영 기자

“드디어 인공지능을 본격적으로 가전제품 안에 넣는 회사들이 늘어나는 분위기네요. 유럽 업체들은 그간 ‘무관심하다’ 싶을 정도로 스마트 가전 개발이 느렸거든요.” 현장을 둘러본 국내 가전업체 관계자가 말했다. 지멘스, 아에게(AEG)를 비롯한 여러 유럽 가전업체들은 제품에 현재 인공지능 비서 시장 세계 1위인 아마존 알렉사와 2위인 구글 어시스턴트를 동시에 탑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전업체는 하드웨어인 제품을 만들고, 여기에 IT공룡들의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넣는 방식이다. 2개를 동시에 넣는 건 사용자가 어느 쪽이든 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올해까지는 아마존 알렉사가 탑재된 제품 수가 많았지만 내년 IFA에서 인공지능의 승자는 구글이 될 것으로 관계자들은 내다봤다. “구글의 음성인식 및 언어인식 기술은 정말 탁월해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 영역을 빠른 속도로 넓히고 있는데, 아마존 알렉사는 아무래도 속도 면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 가전업체, 양사 인공지능 동시 탑재

세계 가전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국내업체인 삼성은 ‘빅스비’, LG는 ‘씽큐’라는 자체 AI플랫폼을 개발·투자해 왔지만 현재의 구도를 보자면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LG가 자사 제품에 구글 등 타사의 인공지능도 사용할 수 있도록 ‘오픈’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삼성 역시 타사와의 협력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전시장 주요 브랜드의 부스를 돌아봤다. 대부분 인공지능 스피커를 통해 음성으로 주방과 거실의 가전제품을 작동하는 시연이 펼쳐졌다. “오케이, 구글, 지금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추천해줄래.” “알렉사, 요즘 TV에서 뭐가 재밌는지 추천해줘.” 이처럼 인공지능으로 가전이 연결되면서 기존에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아날로그’ 가전들의 제품 간 경계는 희미해지고 있다. 사물인터넷과 GPS 기술을 결합하면 사용자가 집에 들어서는 순간 스마트폰에서 재생되던 음악이 거실의 스피커에서 재생되고, 다시 주방으로 이동하면 냉장고의 스피커에서 재생되는 식이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세탁기나 오븐, 식기세척기의 작동을 제어하고, 냉장고의 스마트보드를 이용해 스마트폰에 문자를 보낼 수도 있다. 운동기구와 냉장고를 연동하면 나의 운동량에 맞춰 냉장고가 추천해주기도 한다.

삼성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IFA 2018’에서 선보인 스마트홈 부스에서 관계자가 TV 화면으로도 냉장고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을 소개하고 있다./최민영기자

LG, 오픈 정책… 삼성도 “타사와 협력 가능”

문제는 ‘개인정보 보호’다.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그만큼 많은 개인정보가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TV프로그램, 실내온도와 조도, 집을 자주 방문하는 이는 누구인지, 반려동물은 몇 마리인지 등의 정보가 고스란히 구글을 비롯한 AI플랫폼 회사에 넘어갈 수 있다. 소비자들이 이 같은 ‘개인정보 보호’에 민감하면 아무래도 스마트 가전을 팔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제조사 입장에서는 시장을 확대하려면 소비자들의 사생활이 보호돼야 한다.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 부문장인 김현석 대표가 IFA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AI가 발달하고 많은 데이터가 수집되면 과연 나의 사생활은 보호되는지, AI의 발전으로 우리 생활이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며 “인공지능은 무조건 좋은 게 아니며, 다양한 부작용도 가능한 만큼 그에 대한 정책 수립과 소비자 배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보안회사 어베스트(Avast) 시큐리티의 홍보대사이자 전세계 체스 챔피언인 게리 카스파로프도 IFA 인터뷰에서 AI 발달에 따른 편의성과 개인정보 보호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소비자들은 그들이 공유하는 데이터를 인지하고, 최선의 보안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 갈수록 더 기술에 몰입되는 만큼 기술을 맹목적으로 신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홈’은 이미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김 대표는 “미국에서는 최근 건축업자들이 집을 지을 때 인공지능이나 사물인터넷 같은 솔루션을 처음부터 집어넣는 비즈니스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있다”며 “우리가 가진 훌륭한 디바이스를 묶어서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최근의 트렌드를 전했다. 보수적인 유럽의 프리미엄 가전업체 밀레는 이번 전시회에서 스마트폰과 연동해 작동하는 세탁기를 내놨고, 리페르는 스마트 냉장고로 바꿔주는 센서 디바이스를 선보였다. 업계 관계자는 “유럽의 프리미엄 가전업체들은 ‘가전’으로 출발한 경우가 많고, 오래 쓰고 튼튼한 가전의 본질에 집중하는 보수적 문화가 있는 반면, 한국의 경우 가전과 반도체 등을 사업군으로 동시에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스마트 가전으로 융합하는 게 더 빠른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스마트 가전 시장이 확대되려면 기술을 생활에 수용하는 데 빠른 ‘밀레니얼’ 세대가 주고객층이 돼야 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거실이나 주방의 개념과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연을 보기 전까지는 ‘스마트홈’의 개념이 뭔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번 IFA에서 강화된 스마트 키친 라인을 선보인 지멘스의 롤랑드 하겐부허 가전부문 CEO는 “소비자들은 경험해보지 않은 주방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판매에 있어서 조금 어려운 점이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최민영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m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