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부재, G-제로 시대 열린다”

유라시아그룹, 세계 10대 리스크 발표… 북한 등 우발적 충돌 가능성

2018년 벽두부터 세계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요동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핵버튼’ 발언으로 맞부딪혔고, 트럼프의 예루살렘 선언에 뿔난 중동은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다. 중국 시진핑 주석의 힘은 점점 강해지고, 유럽의 브렉시트 협상은 첩첩산중이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20년간 가장 예측하기 힘든 위기가 있는 한 해를 꼽으라면 2018년이 될 것이다.”

미국 리스크 컨설팅업체인 유라시아그룹은 올해를 이같이 전망하며 “2008년 금융위기 수준의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올해가 여느 해보다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힘의 공백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낡은 질서의 퇴장은 확실한데 새 질서는 채 정립이 되지 않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강조하면서 고립주의를 채택, 세계 리더 자리를 스스로 반납하면서 이 같은 현상은 더 빨라졌다. 세계 중심국가가 사라진 ‘G-제로’(G-Zero) 체제는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 유라시아그룹의 진단이다.

유라시아그룹은 1998년 설립된 리스크 컨설팅 업체다. 이들은 매년 ‘톱 리스크’ 보고서를 낸다. 보고서는 10대 리스크를 담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글로벌 기술 냉전’ 심화

유라시아그룹이 올해 꼽은 최고 리스크는 세계 질서의 공백이었다. 보고서는 ‘중국은 공백을 사랑한다’고 표현했다. 누구도 세계 질서를 주도하지 못하는 G-제로 시대가 중국에는 기회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G-제로’는 미국과 중국을 일컫는 G2나 주요 선진국 7개국을 의미하는 G7, 주요 20개국을 뜻하는 G20과 달리 세계 질서를 이끄는 리더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보고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이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는 기회가 됐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이 틈을 타 무역과 투자, 기술, 가치 등에서 새로운 모델을 세워가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있다고 이들은 분석했다.

보고서가 두 번째 꼽은 리스크는 우발적 충돌이었다. 세계의 리더가 없는 G-제로 시대에는 국지적으로 오판에 따른 우발적 충돌이 훨씬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다고 이들은 우려했다. 특히 위험한 변수로 사이버 테러와 북한, 시리아, 러시아, 테러리즘 등을 꼽았다. 보고서는 북한에 대해 “지정학적인 우발적 사고를 일으킬 위험이 가장 큰 나라”라며 미사일 시험발사를 주목했다. 북한이 미사일로 다른 나라를 직접 공격하는 자살행위는 하지 않겠지만 일본 상공으로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의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에서 군사훈련이 잦아지고, 그러다 영공 침해 등이 급증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국지적 대결이 발생할 수 있다고 이들은 지적했다. 특히 미국과 주변 동맹국 간 믿음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도 우발적인 행동 확률이 높아진 원인으로 이들은 봤다.

세 번째 리스크는 ‘글로벌 기술 냉전’이다. 과거 냉전이 미국과 구소련 간의 대결이었다면 이제는 미국과 중국 간 경쟁이다. 두 나라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초고속 네트워크 등 첨단기술 주도권을 놓고 ‘사상 최대’의 대결을 벌일 것으로 전망됐다. 이미 중국은 첨단산업 부분에서 미국에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인프라는 중국이 앞선다. 2017년 기준 500대의 슈퍼컴퓨터 중 미국은 143대를, 중국은 202대를 갖고 있다. 인터넷 사용자 수도 미국이 2억4600만명인 반면 중국은 7억7300만명으로 세 배가량 많다. 아마존, 페이스북, 구글을 텐센트, 알리바바, 바이두가 목전까지 추격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에 몰린 멕시코도 갈등요소다. 멕시코는 대미(對美) 무역의존도가 높아 재협상에 실패하면 상대적으로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멕시코가 오는 7월 치를 대선도 변수다. 유력주자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즈 오브라도르 전 멕시코시티 시장은 대미무역 강경론자다.

중동발 이슈도 있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5년 맺었던 이란과의 핵협정을 파기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이란은 핵협정을 이행하지 않으면 핵개발을 재개하겠다고 반발한다. 이란은 3년 전 미국을 비롯한 주요 6개국 및 유럽연합(EU)과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을 체결한 뒤 국제사회의 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고농축 우라늄 개발을 포기했다. 만약 핵협상이 파기된다면 세계는 새로운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보고서는 전망했다.

“2008년 금융위기 수준 위기 올 수 있다”

정치조직과 관료사회, 언론 등에 대한 신뢰 약화는 또 다른 리스크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포퓰리즘 등 반체제 성향이 확산되면서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신뢰가 약해졌다. 민주적 조직체계는 시민들의 신뢰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신뢰 상실로 인해 사회적 충돌이 잦아지고 내부적인 혼란이 일상화될 수 있다고 보고서는 우려했다.

과거보다 한층 범위가 확산된 보호무역주의인 ‘보호무역주의 2.0’도 새로운 리스크다. 과거에는 농업, 화학, 금속, 기계 등의 분야에서 일자리와 국내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폈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디지털 경제, 지적재산권 등으로 보호무역의 범위가 넓어졌다. 또 새 보호무역주의는 관세 등을 동원한 과거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비관세 장벽을 이용한다. 한층 복잡해진 보호수단을 둘러싼 논란만큼 국가 간 갈등의 소지도 커졌다.

유럽연합과의 ‘이혼’을 앞둔 영국은 유로존에 리스크를 더하고 있다. 영국과 유럽연합은 3월부터 브렉시트 2단계 협상에 들어간다. 향후 무역협정 등을 논의할 2단계 협상은 브렉시트의 조건을 다룬 1단계 협상보다 더 어렵다. 국내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가 자칫 낙마라도 하면 혼란은 더 커질 것으로 유라시아그룹은 내다봤다.

리더의 부재는 동남아와 아프리카에도 리스크를 높이고 있다. 동남아에서는 이슬람의 힘이 커지고 혐중국과 혐소수민족, 인도의 국가주의 등이 분출하고 있다. 말리, 남수단,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주변국들도 무차별 테러를 앞세워 아프리카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 그간 질서를 주도해 왔던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케냐, 에티오피아 등 주요국들의 힘이 약해진 탓이다. 이 같은 위협이 커지면 역내 투자를 하려던 투자자들을 이탈시켜 동남아와 아프리카의 성장세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전망은 ‘붉은 청어’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고 유러피안그룹은 밝혔다. 붉은청어란 잘못된 예측으로 유도할 수 있는 변수를 말한다. 보고서는 “뮬러 특검의 러시아 스캔들 조사가 트럼프 대통령을 겨눌 경우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며 “독일, 이탈리아 등 선거를 앞둔 유로존과 경제위기에 빠진 베네수엘라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