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없는 사회는 과연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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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카드, 모바일 카드 등 전자화폐 결제 늘어… 회비나 경조사비는 모바일 메신저로

직장인 ㄱ씨의 지갑 속 현금은 1000원짜리 몇 장이 전부다. 동전은 안 갖고 다닌 지 오래다. 신용카드는 석 장 꽂혀 있다. 버스·지하철 이용, 밥값, 커피값 모두 신용카드나 스마트폰에 내장된 모바일 카드로 처리한다. 모임 회비나 경조사비는 모바일 메신저로 보낸다. 지인이나 가족들 생일 선물도 모바일 메신저로 상대방 스마트폰에 보내는 선물 쿠폰을 이용한다. 현금 쓸 일은 거의 없다. 가끔 부모님 용돈 드릴 때나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 낼 때 정도에만 쓰인다.

‘현금 없는 사회’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신용카드, 모바일 카드 등 전자화폐를 통한 결제가 늘어나면서 동전과 지폐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인터넷 전문은행 출범, 핀테크(정보기술에 기반한 금융) 발달 등은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한국은행은 이미 ‘동전 없는 사회’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고, 화폐 제조가 주업무인 한국조폐공사도 새로운 사업 발굴을 모색 중이다. 현금 없는 사회는 과연 올 것인가.

삼성페이의 ATM(자동금융거래단말기) 서비스가 총 5개 은행으로 확대된 가운데 한 이용자가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 삼성전자 제공

삼성페이의 ATM(자동금융거래단말기) 서비스가 총 5개 은행으로 확대된 가운데 한 이용자가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 삼성전자 제공

지난해 신용카드 40%·현금 36% 이용
화폐는 기원전 7세기 무렵 지금의 터키 일대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전까지는 가축이나 곡물 등을 물물교환했다. 하지만 동전을 제조할 구리가 부족해지고 비용이 올라가면서 대안으로 지폐를 만들기 시작했다. 1660년 스웨덴 은행이 최초의 유럽 지폐를 발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성종(996년) 때 주조된 건원중보가 최초의 동전이다. 지폐는 고종 때인 1893년에 나왔다. 1950년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신용카드는 1970년대 말 한국에서도 발급이 시작했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화폐를 등장시켰다. 2008년에는 디지털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이 개발됐다. 이메일 보내듯 1대 1로 비트코인 주소를 가진 사람에게 가상화폐를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사용법이 난해해 대중화에는 실패했다. 이후 해외에서 알리페이, 애플페이 같은 스마트폰에 기반한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가 등장했고, 국내에서도 삼성페이·카카오페이·네이버페이 등이 서비스를 시작했다. 연내 문을 열 예정인 인터넷전문은행 K뱅크와 카카오뱅크는 이자로 현금 대신 서비스 이용권, 모바일 포인트 등을 지급할 계획이다.

현금의 입지는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8~9월 전국 성인남녀 2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급수단별 이용건수 비중은 처음으로 현금을 제치고 신용카드가 가장 높게 나왔다. 신용카드 이용 비중은 2014년 31.4%에서 2015년 39.7%로 늘어난 반면, 현금 비중은 같은 기간 38.9%에서 36.0%로 줄었다. 특히 1만원 미만 소액결제에서 신용카드 사용 비중이 2014년 18.9%에서 22.9%로 증가했고, 인터넷으로 쇼핑할 때 신용카드를 쓰는 비중도 2014년 79.2%에서 지난해 85.1%로 늘어났다. 반면 1인당 현금보유액은 2014년 조사 때(7만7000원)보다 3000원이 줄었다.

한국은행은 2020년까지 동전 없는 사회 도입방안 마련을 목표로 관련 연구를 벌이고 있다. 동전 없는 사회가 도입되면 동전 대신 충전식 선불카드 등 다른 결제수단이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예를 들면 상점에서 현금 1만원으로 9500원짜리 상품을 구입할 때 거스름돈 500원을 받지 않고 가상계좌와 연계된 선불카드에 500원이 입금되는 식이다.

이러한 현상은 외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스웨덴은 2002년 70.7%에 달하던 현금 이용 비중(건수 기준)이 2009년 33.6%로, 7년 만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반면 직불카드 이용 비중은 같은 기간 25.3%에서 43.5%로 높아졌다. 네덜란드, 노르웨이, 호주 등도 비슷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는 과연 올 것인가

‘현금 없는 사회’는 이상적인가
“합법적인 거래에서 현금을 사용한 증거들을 자세히 들여다봐도, 누가 그 많은 50달러와 100달러짜리 지폐를 보유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분명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현금을 비교적 규칙적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공급된 그 많은 화폐물량이 국내의 합법적인 경제활동에서 얼마나 올바르게 유통되고 있는 걸까.”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케네스 로고프는 저서 <화폐의 종말>에서 종이화폐를 폐지하는 것이 모두에게 생각보다 많은 이득을 안겨준다고 주장한다. 로고프 교수를 포함해 종이화폐 폐지론자들은 현금을 폐지하면 탈세, 마약거래, 부정부패 등 범죄를 줄일 수 있고 이를 통해 정부는 세수 증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고액권은 범죄와 지하경제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5만원권 발행잔액은 70조4308억원(7월 말 기준)으로 전체 화폐 발행잔액의 77%에 달하지만 회수율은 50%로 1만원짜리, 1000원짜리 지폐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현금 폐지론을 주장하는 또 다른 근거는 비용이 많이 들어 비효율적이라는 점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호주 등에서 지급수단에 따른 연간 사회적 비용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0.42~0.83% 수준으로 조사됐다. 특히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현금의 사회적 비용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일각에서는 현금 없는 사회가 저성장을 탈피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최근 ‘현금 없는 경제: 의미와 기능’ 보고서에서 “미국에서 현금 사용으로 인해 정부, 소비자, 기업들이 부담하게 되는 비용만 한 해 2000억 달러로, 미국 GDP의 1.2%에 해당한다”며 “현금 사용으로 인한 비효율성만 줄여도 매년 경제가 그만큼 더 성장하는 셈”이라고 밝혔다. 특히 경기부양을 위한 통화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현금 없는 경제가 필요하다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을 막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명목금리를 마이너스 수준으로 낮추는 게 불가피하지만, 현금이 존재하는 사회에선 이렇게 할 경우 사람들이 은행에서 돈을 빼 집안 금고에 보관할 수 있어 의도한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성훈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화폐가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핀테크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잘못된 규제들이 현금 없는 사회로 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반론도 있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보안사고 가능성이다. 한국은행은 ‘주요국 지급수단의 사회적 비용 추정 현황 및 정책적 시사점’ 보고서에서 “전자 지급수단의 확산 및 새로운 지급수단의 도입은 금융정보 보안문제 및 사이버 침해 등 새로운 지급결제 관련 리스크를 초래할 수 있다”며 “이러한 리스크의 증가는 편리하고 새로운 지급수단의 확산을 저해할 수 있으며, 동시에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거래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현금과 달리 전자화폐는 사용자와 거래내역 등이 기록으로 남아 사생활이 노출되고 개인에 대한 감시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로고프 교수 역시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 지폐의 폐지가 고액권부터 단계적·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주영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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