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속 성 역할, 여성이 주도하다

수동적인 여성상 탈피해 자신을 표현하는 여성을 메인 모델로… 미닝아웃 트렌드 반영

광고 속의 ‘성 역할’을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이 새로운 세대의 ‘젠더리스’ 바람을 타고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기존의 수동적인 여성상을 탈피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여성을 메인모델로 내세우고, 이분법적인 이성애 중심의 관계를 넘어 다양한 성 정체성을 앞세우는 주요 업체들이 늘어나는 중이다. 이는 소비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미닝아웃(meaning-out)’이 젊은 층의 삶의 방식으로 주목받는 오늘의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회적 화두를 던짐으로써 화제를 모으고, 기업에 대한 호감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나이키의 국내 광고는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가수 엠버, 개그우먼 박나래, 프로골퍼 박성현, 가수 청하가 자신의 몸에 집중하며 도전하는 모습을 담아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나이키 제공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털 브랜드인 스와로브스키의 올봄 밸런타인데이 광고에서는 여성이 스토리를 주도한다. 해변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눈가리개를 한 뒤 손을 잡고 이끌어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액세서리를 이미 갖고 있고, 자신이 원하는 남성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를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 불과 3년 전 광고와는 결이 다르다. 2016년만 해도 스와로브스키의 광고 속 여성은 전통적이고 로맨틱한 이성애 공식에 충실하게 연인이 건네주는 선물상자를 받고 기뻐하며 답례하듯 그를 포옹했기 때문이다.

스와로브스키 광고 여성이 스토리 주도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의 올해 초 국내 캠페인은 큰 화제를 모았다.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라는 메시지를 다양한 신체활동을 하는 여성들을 등장시켜 전달하고 있다. 작은 체구 덕에 ‘나래코기’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개그우먼 박나래는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운동에 몰입한다. 휠체어를 탄 여성은 힘차게 코트를 누비고, 주방에 선 여성은 음식 아닌 권투용 마우스피스를 끓여 소독한다. 광고 어디에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 ‘키 크고 날씬한 몸’이라는 여성의 몸에 대한 통념을 넘어선 이들은 자기주도적인 몸을 만든다.

여성의 성적 매력에 초점을 맞추는 뷰티업계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최근 디올의 향수 ‘자도르’ 광고에서 영화 ‘매드맥스’의 배우 샤를리즈 테론은 여러 여성들과 함께 같은 방향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간다. 대부분의 여성 화장품 광고가 이성을 유혹할 수 있는 매력적인 여성이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는 암시를 밑바탕에 까는 것과 조금 다르다. 앞서 디올은 2017년 패션쇼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문장이 프린트된 흰색 티셔츠를 처음 런웨이에 올리면서 ‘미닝아웃’ 트렌드를 주도한 바 있다. 디올의 첫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지난해 무대에서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을까’라는 화두를 옷에 적으면서 예술계 내 성차별을 지적하기도 했다.

여성은 ‘매력적인 성적 대상’이 아니며, 모든 성은 평등하다는 메시지도 최근 주요 브랜드들의 캠페인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탈리아의 패션브랜드 구찌는 최근 성평등을 지지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단결해야 한다는 뜻의 ‘투 개더 투게더(To Gather Together)’ 캠페인을 펼쳤다. 런던, 밀라노, 뉴욕 등지에서 캠페인으로 그린 벽화에는 성별이나 인종, 나이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의 형상 위에 평등을 상징하는 ‘=’(등호)를 얹었다.

기존의 전형적 남성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광고도 화제가 됐다. 미국 P&G의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는 올해 초 1분50초짜리 광고 동영상을 통해 ‘당신이 될 수 있는 최고의 남성’에 대해 물으면서 폭력적인 집단 괴롭힘이나 성희롱 같은 행위를 더 이상 ‘사내들이 다 그렇지’라는 사회적 방관 속에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변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행동을 다음 세대가 본받기 때문”이라는 다소 계몽적인 메시지를 담은 이 광고는 일부 남성들에게 남성성을 비난한다며 반발을 사기도 했다.

크리스털 브랜드 스와로브스키의 올봄 밸런타인데이 캠페인.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를 주도한다./유튜브 화면 캡처(사진 위). 배우 샤를리즈 테론(가운데)과 여성들은 한 방향을 향해 함께 걸어나간다./디올 제공

나이키 ‘키 크고 날씬한 몸’ 통념 벗어

왜 이런 변화들이 최근 잇따르고 있는 것일까.

광고업계가 주요 타깃으로 보는 밀레니얼 이후의 ‘Z세대’가 과거의 전통적인 성역할에 대해 시큰둥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선 나온다. 패션브랜드 구찌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Z세대’를 분석한 자료에서 이들의 특징을 ‘유동성’으로 꼽았다. “Z세대는 자신의 다양한 자아뿐 아니라 가능성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두의 집단적 개성을 아름답게 포용”하는 만큼 ‘남성은 이래야 한다’ ‘여성은 저래야 한다’와 같은 과거의 명제가 고리타분해졌다는 것이다. 최근 2년간 패션업계에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강조하지 않는 ‘젠더리스’ 트렌드가 강세를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성이 수트를 입고, 남성이 레깅스를 입는다. 동일한 디자인으로 사이즈만 다양화한 디자인도 두드러지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요즘은 여성들이 과거와 달리 플로랄 계열보다는 우디, 시트러스 계열의 중성적인 향을 선호하고, 샤넬과 톰포드를 비롯한 브랜드들이 남성 메이크업 라인을 잇따라 출시하는 등 경계는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화제를 모으기 위해서는 소셜미디어에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야 하는 최근의 모바일 환경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질레트’ 면도기 광고의 경우 별다른 마케팅 없이도 유튜브에 영상을 업로드하자마자 소비자들이 이를 공유하고 토론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광고효과를 거뒀다. 일부 불매운동도 있었지만 실제 매출에는 영향이 없었다는 게 P&G 측의 설명이다. 실보다 득이 많았다는 얘기다. P&G 측은 ‘미투’ 운동이 거센 시대에 “더 젊은 소비자들과 의미있는 방식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이 광고에 대해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진심 아닌 ‘상술’로서 페미니즘을 이용한다는 지적도 내놓지만 한 업계 관계자는 “소비자 동향을 가장 먼저 읽는 게 패션과 광고 쪽인 만큼 이 같은 변화는 실제 달라지는 사회의 흐름을 보여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민영 산업부 기자 m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