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 1호기 해체, 탈핵 원년 될까

6월 18일부터 영구정지…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찬반 논란

40년 전이다. 1977년 6월 19일, 국내 첫 원전인 고리 1호기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2007년 설계상으로 30년이라는 수명을 다했다. 하지만 다시 10년간 운전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9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운영변경 허가안’을 의결하면서 고리 1호기는 오는 18일 밤 12시에 문을 닫게 됐다. 고리 1호기가 문을 닫는 날 정부가 원전 관련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힐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원전 찬반 진영 간 대립각이 날카로워지고 있다. 그래서 고리 1호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2017년 6월은 한국 원전정책의 가장 큰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6월 8일 오전, 8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핵 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탈핵공동행동) 회원들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주장은 간단했다. 대통령에게 약속을 꼭 지키라는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을 비롯해 계획 중인 원전 백지화, 노후 원전인 월성 1호기 폐쇄, 탈핵에너지 전환 로드맵 수립 등을 공약했다. 탈핵공동행동은 “핵산업계, 원자력학계 등 탈핵정책 실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이는 국민의 뜻과 전혀 다르다”며 “문 대통령의 탈핵 약속은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염원하는 모든 국민들과의 약속이고, 후손들을 위한 약속”이라고 밝혔다.

한국YWCA연합회가 7일 부산 기장군 고리원자력본부 홍보관 앞에서 '탈핵 문화제'를 열고 신고리 5·6호기 건설의 백지화를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탈핵단체, 문 대통령 공약 이행 촉구

전날에는 전국에서 모인 한국YWCA연합회 회원 400여명이 신고리 5·6호기 건설현장을 코앞에 둔 부산시 기장군 고리원자력본부 홍보관 앞에서 탈핵 문화제를 열고 “신고리 5·6호기 백지화는 더 이상 늦출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탈핵단체들은 애초 문 대통령이 원전 공약을 반드시 이행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원자력업계와 학계 등 원전 옹호론자들이 거세게 반격해오면서 자칫 문 대통령의 공약이 후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어 목소리를 더욱 높이고 있다.

한국원자력학회와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 한국원자력산업회는 탈핵공동행동이 기자회견을 한 날 서울대에서 ‘고리 1호기 퇴역 기념 심포지엄’을 열고 원자력이 필요한 이유 9가지를 담은 ‘대국민 설명서’를 발표했다. 원전은 지진에 강하게 설계돼 안전하며, 미세먼지·온실가스 걱정이 없다는 게 골자다. 이들의 주장에는 문재인 정부의 원전정책이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이 깔려 있다.

포문은 에너지 관련 학과 교수 300여명이 열었다. 이들은 6월 1일 성명을 내고 “소수의 비전문가가 속전속결로 내놓은 제왕적 조치”라며 새정부의 원전 로드맵을 깎아내렸다. 때마침 원전 운영 주체인 한국수력원자력 노조도 “일방적인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시도를 철회하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내놨다.

원자력계뿐만 아니라 일부 지역주민들도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지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위원장이 원전 관련 부처의 합동보고에서 “신고리 5·6 호기는 전체 원전 안전성 등을 깊이 있게 논의·검토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원자력업계에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보류로 해석되기도 했다.

때문에 5·6호기 건설 중단을 외쳐온 탈핵단체들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졌다. 탈핵단체들은 원자력계의 주장을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환경운동연합은 성명을 내고 “문 대통령 공약 중에 에너지 정책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고, 온갖 여론조사에서 신규 원전을 중단하라는 여론이 높다는 것이 확인된다”며 “가동 중인 원전을 닫겠다는 것도 아닌데 신규 원전 중단에 대해 일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대선 기간 문 대통령의 정책 소개 사이트인 ‘문재인 1번가’에서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분야가 탈원전·친환경 공약을 담은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 정책’이었다.

원자력계는 “원자력 필요” 대국민성명

원자력계는 천문학적인 원전 매몰비용과 전기요금 인상, 전력수급 차질 등을 이유로 탈핵정책을 반대한다. 이에 대해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최근 몇 년간 전력수급은 설비 과잉, 효율성 저하가 문제될 정도로 전력예비율이 높다”며 “과거의 관성에 빠져 탈핵·탈석탄을 하면 전력수급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현재 전력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신규 원전 건설 중단과 노후 원전 폐쇄는 비정상을 정상화하고 국민 안전을 지키는 최소한의 조치”라고 말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역시 원자력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 원내대표는 “계획대로 건설돼도 2021년에나 가동될 신고리 원전을 놓고 공사가 중단되면 당장 전력수급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엄청난 전기료 인상이 생기는 것처럼 비상식적 논란을 부추기려 한다”며 “에너지 기득권 세력의 방해공작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의 탈원전 정책에 원자력계가 반발하고 있지만 새정부의 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정기획위 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건설 중단을 검토한다는 게 아니라 건설을 중단한 후 (안전성 등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라며 “대통령 공약은 변함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 위원장이 “원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라고 강조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고리 1호기가 운명을 다하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시선은 부산으로 쏠리고 있다. 탈핵단체들은 고리 1호기가 문을 닫는 날 문 대통령이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등을 선언해 올해가 ‘탈핵 원년’이 되길 바라고 있다. 원전 밀집지역인 부산에서 이런 선언을 하는 게 상징성이 크다는 판단에서다. 고리 1호기는 18일 불이 꺼지지만 이날이 일요일이어서 공식 폐로 행사는 월요일인 19일에 열린다. 이날 문 대통령의 발길이 어디로 향할지 주목된다.

<고영득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god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