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셋값 한풀 꺾였다지만…나는 2년마다 떠돌이라네

오를대로 오른 탓에 ‘미친 상승세’ 주춤… “기존 세입자는 누적 상승분 때문에 부담 여전”

서울 강서구에 사는 직장인 정모씨(36)는 올해 1월 전셋집 재계약을 앞두고 전세보증금을 8000만원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또다시 이사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대출을 늘려 2년 만에 다시 이삿짐을 싸게 된 그는 “이렇게 차츰차츰 서울 외곽에서 밖으로 밀려나게 되는구나 싶다”며 “2년 주기 떠돌이 생활을 반복하느니 차라리 대출을 더 받아 경기도에 집을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전세시장 분위기가 예년과 달라졌다. 그간 ‘미친 상승세’를 이어온 전셋값이 올해 한풀 꺾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시장 안정세를 점치는 시각이 대다수지만 여전히 서민들의 체감 전셋값의 장벽은 높다. 상승폭이 다소 누그러졌을 뿐, 전셋값은 이미 오를 대로 오른 탓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택시장에 나타났던 ‘홀수해 징크스’가 올해 들어 처음으로 깨지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이는 짝수해에 비해 홀수해에 전셋값이 큰 폭으로 오른다는 주택시장의 속설로, 금융위기 이듬해인 2009년 전세계약이 크게 늘면서 2년 단위 재계약이 이뤄지는 전세시장에서 홀수해에 이사 수요가 집중된 영향이다.

수직 상승을 이어오던 전셋값이 올해 들어 주춤한 분위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반복되어온 '홀수해 징크스'가 올해 깨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서민들이 체감하는 전셋값의 벽은 여전히 높다. / 사진 연합뉴스

차분해진 전세시장… ‘미친 상승’ 멈추나

하지만 올해는 예외라는 전망이 나온다. 부동산 114 조사에 따르면 지난 1월 한 달간 전국의 아파트 전셋값은 전달 대비 0.06% 상승했다. 상승폭이 지난해 1월 상승률(0.18%)의 3분의 1 수준으로, 2012년 1월(-0.03%) 이후 5년 만에 최저치다. 겨울방학에 본격적인 봄 이사철 전 선점 수요가 나오는 시기지만 예년과 달리 전세시장이 잠잠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특히 서울지역 상승률은 지난 1월 0.07%로, 지난해 1월 오름폭(0.44%)의 6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강동구의 경우 한 달간 1.08% 전셋값이 떨어져 서울에서 가장 큰 폭의 하락률을 보였다. 지난해 위례신도시 및 하남 미사강변도시 입주가 시작되며 전셋값이 약세를 보인 데 이어, 올해도 고덕래미안힐스테이트(3658가구) 등 대단지 아파트 입주가 시작돼 전세물량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학군 수요가 있던 양천구 역시 같은 달 전셋값이 0.21% 떨어졌다. KB국민은행의 부동산 통계를 봐도 지난달 23일 기준 서울의 아파트 전셋값은 6개월 만에 보합(0%)을 기록했다. 지난 4년여간 서울 전셋값이 고공행진을 이어온 것과 대조적이다.

이밖에 경기와 인천은 지난해 1월 0.07%와 0.16%에서 올해 1월에는 각각 0.01%와 0.08%로 오름세가 둔화됐고, 울산(-0.02%), 전남(-0.01%), 충북(-0.04%), 제주(-0.08%)는 올해 1월에는 전셋값이 아예 하락 반전했다.

연초 전셋값 안정세는 늘어난 입주물량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4분기 전국 아파트 입주물량은 9만1913가구로 연중 최대치를 기록했다. 특히 경기도의 입주물량이 3만가구를 넘어섰고, 서울도 1만가구에 가까운 9588가구의 아파트가 준공됐다. 올해 1분기 입주물량도 전국적으로 7만2409가구에 달하는 등 물량공세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의 경우 지난해 4분기와 맞먹는 9000가구가 올해 1분기 중 집들이를 한다.

하반기 들어서는 본격적인 ‘물량 폭탄’이 쏟아진다. 부동산 114 집계에 따르면 오는 7월부터 내년 2월까지 8개월간 월 평균 3만8899가구가 입주하는 등 단기간 물량 쏠림이 예고되는 상황이다. 지난해 월 평균 입주물량(2만4311가구)의 1.6배 수준이다. 특히 이 기간 경기도에서 총 12만5735가구가 쏟아져 전셋값 하락 전망이 나온다.

미국발 금리인상에 따른 시중금리 인상 움직임도 전세시장 안정화에 영향을 미쳤다. 현재까지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동결 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지난해 말 미국 금리인상 전후로 시중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집주인들의 전세 선호 현상이 나타나는 추세다. 2~3년 전부터 이어진 ‘월세 대세론’에도 제동이 걸렸다. 초저금리 기조의 영향으로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전셋값 인상분을 월세로 돌리는 보증부 월세(반전세)가 크게 늘었지만, 하반기부터는 자취를 감췄던 전세매물이 다시 쏟아지는 등 전세거래 비중이 다시 늘고 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 통계를 보면 지난 1월 서울의 아파트 전·월세 거래량 1만3709건 가운데 월세는 총 4591건으로 전체의 33.5%를 차지했다. 2013년 1월에 20.4%에 불과했던 월세 비중은 지난해 1월 37.6%로 크게 뛰어 3월(38%)에 정점을 찍었다가 하반기 들어 다시 30% 초반으로 역주행하는 중이다.<그래픽1> 올해 수도권의 대규모 입주물량으로 전세 공급이 더 늘어나 주택임대시장의 판도가 다시 전세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최근 2~3년간 이어진 집값 상승기를 타고 이른바 ‘갭(gap) 투자’가 성행한 것도 전세물량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갭 투자란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 전세를 끼고 적은 돈으로 집을 구입한 뒤 이를 되팔아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자 방식이다.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며 월세 수익보다 매매 시세차익을 노리는 게 유리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전세금을 목돈으로 해 다른 부동산을 매입하려는 집주인이 늘며 물량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시장에서는 입주물량 증가와 금리인상 등의 요인이 맞물리며 전셋값이 당분간 안정세를 지속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런 흐름은 지난해부터 이어져 2016년 한 해에 전국 아파트 전셋값은 1.9%, 서울의 경우 2.8% 올랐다. 지난 2015년 서울의 아파트값이 평균 10.8% 뛴 것에 비하면 안정을 찾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그래픽2>

여전한 ‘전세의 벽’… ‘깡통전세’도 유의해야

한국감정원은 올해 전국의 주택 매매가는 0.2% 하락하고 전셋값은 0.3%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채미옥 한국감정원 KAB부동산연구원장은 “매매시장의 약보합세와 전세 신규 입주가 꾸준하게 이어지며 전세시장은 큰 폭의 상승 없이 안정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다만 국지적인 입주물량의 증가로 전세물량이 집중되는 수급 불균형 지역이 발생해 지역별 전세시장은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택산업연구원도 올해 전국의 전셋값이 0.4% 상승하는 가운데 수도권의 경우 0.7%, 지방의 경우 0.2%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준공물량 증가가 전셋값 상승 압력을 둔화시키며 임차시장의 가격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지만 일부 지역은 역전세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그래픽3>

다만 이달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봄 이사철을 맞아 수요자가 대거 유입되면 전셋값 안정세가 일시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내년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부활을 앞두고 재건축을 서두르려는 대형 아파트단지의 집단이주가 올해 중 본격화되면 서울지역 전세시장 역시 다시 휘청일 수 있다. 올해 주택시장 냉각과 가계부채 급증에 따른 정부 당국의 ‘대출 조이기’ 정책에 따라 상대적으로 매매보다 임대 수요가 늘어나는 것 역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전셋값이 수직 상승세를 멈추더라도 기존 세입자들의 부담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신혼부부 등 전셋집 신규 계약자의 상황은 한층 낫지만 올해 계약이 만료되는 기존 세입자들은 2015년 이후 2년간 누적 상승분을 보태야 ‘전세 난민’ 신세를 면할 처지다. 특히 서울 아파트의 경우 2015년 평균 전셋값이 6067만원 올랐고, 상승폭이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지난해에도 2378만원 올라 2년새 8300만원이 넘게 올랐다.<그래픽4>

이런 전셋값 폭등으로 지난해 은행권의 전세자금대출 증가액은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해 5대 은행(신한·KB국민·우리·KEB하나·NH농협)의 대출잔액만 34조원을 넘어서 전년(23조6636억원) 대비 10조원 넘게 늘어났다. 2014년부터 본격화된 전셋값 폭증과 매물 부족이 겹치며 세입자들이 은행에서 빌린 자금규모도 커진 것이다.

비싼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서울을 벗어나는 ‘탈서울’ 행렬도 가속화됐다. 지난해 서울시민의 경기권 주택 매입이 경기도 전체 거래량(27만7097건) 가운데 15.4%(4만2680건)로, 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경기권의 신규 아파트 입주물량이 늘어난 영향도 있지만 서울의 아파트 평균 전세가율이 지난달 73.3%에 달하는 등 전셋값이 집값 수준으로 치솟은 탓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사회 초년생인 2030세대 가구의 소득과 이들이 주로 거주할 수 있는 서울지역 하위 20% 아파트 전셋값 상승률 차이가 24배에 달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분석 결과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인 2013년 4월 전국 평균 6800만원이던 1분위 아파트(하위 20%) 값은 지난해 11월 기준 8300만원으로 22% 가까이 올랐다. 같은 기간 인구의 절반이 거주하는 수도권은 44%, 서울은 49% 전셋값이 급등해 20~30대가 가구주인 가구의 월 평균 소득 증가율 2.0%(442만원→451만원)의 최대 24배에 달했다. 소득 증가율에 비해 전셋값 증가율이 훨씬 커 젊은층의 거주비 부담이 그만큼 가중됐다는 뜻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3년 9개월간 아파트 중위 전셋값(일렬로 세웠을 때 한가운데 값) 역시 서울이 49% 폭등해 단순 산출하면 한 달에 278만원씩 올랐는데, 가계 흑자액(소득 중 지출을 뺀 금액)을 고려해 이를 감당하려면 매달 181만원씩 빚을 내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하반기 입주물량 증가와 일부 지역의 집값 하락 전망이 맞물리며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깡통전세’ 우려도 커지고 있다. 통상적으로 집주인이 받은 주택담보대출과 전세금을 합친 금액이 집값의 70%를 넘어서면 깡통전세로 분류한다. 전셋값은 현재의 비싼 가격을 유지하는 반면 공급 과잉으로 집값이 하락할 가능성이 커진 데다, 지금처럼 전세가율이 높을수록 깡통전세가 될 위험이 크다. 금융당국은 이달부터 유사시 전세보증금을 금융회사에서 대신 돌려받을 수 있는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의 보증한도(수도권 5억원, 지방 4억원)를 높이고 보험료율을 내렸지만, 여전히 보험 가입자는 세입자 100명 중 4명이 채 안 되는 실정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