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악의 AI에 무기력한 정부

한 달 만에 1658만마리 파묻어… 정부 초동대응 실패 흑역사로 남을 듯

벌써 278농가에서 1231만마리를 땅에 파묻었다. 앞으로도 30농가에서 427만마리를 더 파묻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멀었다. 조류인플루엔자(AI)가 전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1월 16일 충북 음성군 농장과 전남 해남군 농장에서 AI가 발생한 지 한 달 만에 닭·오리 농장이 초토화되고 있다. 정부는 16일 AI 위기경보를 ‘심각’으로 격상하며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범정부 차원의 AI 중앙사고수습본부도 처음 설치됐다. 국민안전처, 행정자치부, 국방부, 환경부, 보건복지부 등 관계부처의 협업도 비로소 이뤄지게 됐다. 2016년 AI사태는 세월호 참사,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와 함께 박근혜 정부의 초동대응 실패의 흑역사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AI는 전파속도가 역대 최강이다. 지금까지는 1396만마리를 살처분했던 2014년의 기록을 이미 깼다. 그나마 2014년 AI는 1월부터 7월까지 195일간의 일이다. 이번 AI는 단 한 달 만에 1658만마리가 살처분됐다. 국내에서 키우는 닭·오리(1억6526만마리)의 10%에 달한다.

방역당국 관계자들이 지난달 17일 전남 해남군 산이면 농장에서 조류인플루엔자(AI) 양성반응을 보인 닭을 살처분하고 있다./연합뉴스

최초 발견 21일 지나 가축방역심의회

정부는 “이번 AI가 고병원성에다 철새가 매개가 된 것으로 보여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지만 정부의 늑장대응에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는 시각도 많다. 대통령 탄핵 시국과 맞물리면서 중앙정부 차원의 대응이 늦었다는 것이다. 철새 분변에서 처음 AI 바이러스가 검출된 때는 10월 28일이다. 당시 농림축산식품부는 ‘철새주의’ 문자만 인근 농가에 보냈다. 이어 지난달 10일 포획한 철새에서 고병원성 AI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지난달 16일에는 농장에서 AI가 첫 발생했다. 정부는 최초 발견 21일 뒤인 지난달 18일에 가서야 가축방역심의회를 개최하고 일시이동중지(스탠드스틸) 명령을 발동했다. AI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지만 국무총리는 움직임이 없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12일에야 AI상황 일일점검에 나섰다. AI 의심신고가 접수된 지 이틀 만에 범정부 대책기구를 띄웠던 2014년과 비교된다.

인사청문회 당시 부적격 논란에 시달렸던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어수선했던 분위기도 한몫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야3당의 해임건의안을 묵살하고 김 장관을 임명했다.

고삐 풀린 리더십은 농장주들의 ‘도덕적 해이’로 이어졌다. 세종지역의 한 농장에서는 AI 의심신고 이전에 AI를 사전에 인지하고도 닭과 달걀을 대량으로 출하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농가가 사전에 방역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최대 100%까지 보상금이 깎이는 것을 우려한 농가들이 발생 사실을 숨기거나 신고를 미루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양성으로 확인된 종오리 농장에서는 종사자들이 업무전환 시 소독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출입차량에 대한 방역도 잘 이뤄지지 않았다.

AI 피해가 눈덩이처럼 늘어나면서 인력과 매몰지가 부족해 살처분도 제때 안 되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AI 발생 확인 후 24시간 내에 살처분하는 것이 가장 좋다”며 “하지만 지금은 평균 2.3일, 마릿수가 많은 농장은 일주일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살처분 인력은 저임금·외국인 노동자 인력시장에서 구하는데,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신분이 드러나길 꺼리기 때문에 충원이 쉽지 않다. 군병력 투입도 국방부의 반대로 어렵다.

정부의 느슨한 대응은 일본과 대조를 이룬다. 지난달 21일 일본 돗토리현 철새 분변에서 AI 바이러스가 나오자 일본 정부는 AI 위기경보단계를 최고수준인 ‘3등급’으로 올렸다. 지난달 나가타현 양계장 2곳에서 AI가 발생하자 55만마리를 즉시 살처분했고, 이후 타 농장에서의 신고는 없다. 한국은 철새 분변에서 AI 바이러스가 검출된 지 50일이 지나서야 AI 위기경보단계를 최고수준(심각)으로 올렸다.

정부는 AI를 철새 탓으로 미루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AI 바이러스가 이미 토착화되어 버린 것 아니냐는 우려도 하고 있다. 철새 분변 수천 건 중에서 AI 바이러스가 검출된 것은 극히 미미하다는 점에서 국내에 유입돼 있던 바이러스가 여름철에 잠복하고 있다가 기온이 떨어지면서 발생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거의 매년 AI가 발생하는 것으로 볼 때 단순히 철새 탓으로 보기는 어려운 구석이 있다”고 말했다.

AI 확산에 따른 피해액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2014년 1396만마리를 파묻으면서 2381억원의 재정을 썼다. AI 사태가 장기화되면 농가뿐 아니라 유통업과 음식업도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가뜩이나 소비심리가 얼어붙는 상황에서 관련 업종은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현 상황만으로도 손실액은 5000억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AI 감염률이 10%(1652만마리 살처분)일 때 손실은 농가 1671억원, 육류 및 육가공업 1855억원, 음식점업 208억원 등 4928억원에 달한다. 만약 AI 감염률이 20%(3305만마리 살처분)에 이르면 손실액은 9846억원으로, AI 감염률이 30%(4958만마리)에 이르면 손실액은 1조4769억원에 이른다.

농가·유통업·음식업 피해액 눈덩이

달걀을 낳는 닭인 산란계들이 대거 살처분당하면서 달걀 공급 축소가 현실화되고 있다. 16일 현재 살처분된 산란계는 883만마리로 전체의 12.6%에 달한다.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자료를 보면 6일 소비자가격이 5612원이던 특란(30개)은 13일 현재 6023원으로 껑충 뛰었다. 이마트, 롯데마트 등 일부 대형매장은 1인당 1판으로 달걀 판매를 제한하고 있다. 달걀 부족과 가격 인상은 달걀을 쓰는 식품가격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국내 베이커리 업계 1위 파리바게뜨는 이달 들어 193개 품목의 가격을 평균 6.6% 인상했다. 전체 케이크의 20%가 판매되는 성탄절 특수를 앞둔 제빵업체는 고민이 크다. 한 관계자는 “달걀값 인상도 걱정이지만 달걀 공급을 제때 받지 못하면 아예 케이크를 못 만들 수도 있다”며 “소규모 제빵가게일수록 우려가 많다”고 말했다.

정부가 뒤늦게 사태 진화에 나서고 있지만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다. 정부는 이미 ‘심각’에 준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AI 확산은 막지 못했다. 정부의 방역체계 자체에 부실한 부분이 많다는 의미다. 김재수 장관은 담화문에서 “AI 바이러스가 확산되지 않도록 발생농장 가축을 신속히 살처분하겠다”며 “농장 주변을 소독하는 등 방역조치를 적기에 실시하고, 피해농가 경영안정을 위해 살처분 보상금, 생계안정자금 등 정책자금을 신속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그간 해온 말을 동어반복하는 수준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 이외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서상희 충남대 교수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농장의 유기적 협력이 이뤄지지 않으면 상황은 더 나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민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AI로 인해 축산물 소비가 전체적으로 위축되지 않도록 소비장려책을 마련하는 등 소비위축 방지대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