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프로스포츠 총재 “정치인은 왠지…”

4대 인기종목 수장 선출 ‘팬 눈치’보며 기업인 선호

정치인들에게 있어 프로스포츠 수장은 아마스포츠 수장과 수준이 역시 달랐다. 국회의원들이 아마스포츠 수장에는 다수 진출한 반면, 최근 정치인들이 프로스포츠 수장으로 진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4대 프로스포츠 야구·축구·농구·배구 팬과 구단주들은 정치인보다 기업인이 체육계 수장을 맡는 것을 선호한다. (왼쪽부터) 17, 18대 KBO 총재를 맡았던 유영구 명지재단 이사장, 제9대 프로축구연맹 총재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KBL 7대 총재에 선출된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 이동호 한국배구연맹 2대 총재. |경향신문

6월 3일 한국농구연맹(KBL) 7대 총재로 선출된 한선교 의원(한나라당)은 총재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현역 의원인데도 추대가 아닌 현역 총재(전육 전 총재)와 경선을 치른 후에야 총재에 선임될 수 있었다. 그것도 이틀 전 첫 경선에서 5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승부를 내지 못했다. 6월 3일 재투표를 한 후에 겨우 선출된 것이다.

한 의원이 KBL 수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6대 전육 총재에 대한 부정적 평가 때문이라는 분석이 높다. 언론인 출신의 전 총재는 취임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농구인들의 신뢰를 잃었다는 주위의 평가를 받았다. 때문에 한 의원에게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한 의원은 3년 전 6대 총재직에 도전했지만 전육 총재가 추대되는 통에 좌절한 적이 있다. KBL 장재홍 홍보팀장은 “그동안 KBL 총재는 추대 형식이었지만, 7대 총재 선임 과정에서 이사회가 외부인에게 기회를 공정하게 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면서 “어느 누구도 경선이 이렇게 치열할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한 의원은 천신만고 끝에 프로스포츠의 수장이 됐지만 아예 문턱에서 좌절한 경우도 최근 있었다.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공석인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로 거론됐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총재설이 떠돌자, 야구계 인사들이 “낙하산 인사”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예전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과거 프로스포츠 수장은 정·관계 인사들의 ‘자리 마련용’이었다. 하지만 프로스포츠가 산업으로 성장하면서 팬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갔고, 구단에서는 팬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관계 인사가 별다른 마찰 없이 프로스포츠 연맹 수장이 되던 과거와는 달라진 풍경이다.

이에 비해 여전히 팬들의 여론이 약한 아마스포츠 협회 수장들은 정치인이 다수 부임해 있다.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대한태권도협회장을 맡고 있고, 임태희 대통령실장은 2008년부터 대한배구협회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강승규 한나라당 의원도 2009년 대한야구협회장에 올랐고, 얼마 전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한 공성진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07년 종합격투기스포츠연맹 총재에 당선됐다. 야당 의원인 이종걸 민주당 의원도 대한농구협회장을 세 번째 연임 중이다.

아마스포츠는 아직 ‘정치인의 힘’ 통해
아마스포츠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아직은 적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발생했다는 분석이 많다. 스포츠계에서 낙하산 정·관계 인사가 통하느냐 마느냐는 여론의 감시와 눈초리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달라지게 됐다. 아마스포츠 협회는 여전히 정치인의 힘이 통하는 셈이다. 동아대 정희준 교수(생활체육학과)는 “프로스포츠는 여론의 관심이 높기 때문에 정치인이 수장에 오르는 것이 만만치 않다”면서 “하지만 인기 많은 프로스포츠를 제외하면 여전히 스포츠계는 정치인이면 뭐가 될 것 같다는 구시대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프로스포츠계의 분위기도 아마추어 스포츠계와 비슷했다. KBO 역대 총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역대 KBO 총재는 정·관계 인사들의 낙하산 자리였다. 야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사들이 총재로 부임했다. 서종철 전 국방부 장관(초대 총재), 이웅희 전 문화공보부 장관, 권영해 전 국방부 장관,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정대철 전 국회의원, 신상우 전 국회의장 등이 역대 KBO 총재 자리에 올랐다. 2008년까지 KBO 총재는 문화관광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정부가 총재를 낙점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이를 바꾼 이가 극성맞은(?) 프로야구 팬이다. 팬들의 목소리가 가장 큰 프로스포츠로 꼽히는 것이 프로야구다. 심판 오심 사태가 일어나면 KBO 사이트는 그날 마비된다. 야구계에 사건이 터지면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 순위는 야구 관련 단어가 모두 차지한다. 프로야구 팬들의 적극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야구팬들은 2009년 17대 KBO 총재를 선출할 때 들고 일어났다. 15, 16대 KBO 총재를 지냈던 신상우 총재가 사임을 표명한 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박종웅 전 한나라당 의원이 KBO 총재로 거론됐다. KBO 이사회(각 구단 대표)는 KBO 고문과 서울돔구장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던 유영구 명지재단 이사장을 총재로 추대했다. 야구를 잘 아는 인사가 KBO 총재를 맡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당시 문화관광부는 야구계가 선출했던 유영구 총재의 취임을 거부했다. KBO 총재는 문화관광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 야구계 인사는 “당시 여론이 들끓었다. 야구팬들은 야구에 지원도 안 하는 문화부가 KBO 총재를 왜 승인하느냐고 비판했다”면서 “당시 여론은 유 전 총재를 지지했다. 총재 선임시 문화관광부 승인 정관도 비난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KBO 정관 내용도 ‘승인’에서 ‘보고’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신재민 전 차관은 한 인터뷰에서 “내가 차관으로 재임할 때 그 규정(총재 승인)을 없앴다”고 말했다. 신 전 차관은 자신이 바꾼 규정 때문에 총재 도전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겪게 된 셈이다.

다른 프로스포츠의 경우도 팬들 때문에 정치인 수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조심스러워 한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1987년 유흥수 전 민정당 의원이 초대 회장을 역임한 것만 제외하면 현 9대 총재에 이르기까지 구단주나 기업인이 총재직을 맡았다. 2004년 출범한 한국배구연맹의 1대 총재는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였지만, 이후 2008년부터 현재까지 이동호 대우자판 사장이 맡고 있다. 정치인들이 4대 프로스포츠(축구·야구·농구·배구)에서 별다른 힘을 못쓰는 것이다.

스포츠 단체장, 정치인의 선거운동 수단
한국배구연맹 관계자는 “프로스포츠 구단은 정치인보다 기업인을 선호한다. 정치인은 이미지만 챙기는 경우가 많아서 스폰서십이나 비즈니스 측면에서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팬들도 자기 얼굴 알리는 데 열중하는 정치인보다 스포츠 산업을 활성화할 수 있는 노하우를 지닌 기업인에 대해 더 우호적”이라고 설명했다.

지역구 관리와 의정활동으로 바쁜 의원들이 체육계 단체장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표’가 되기 때문이다. 스포츠 단체장이라는 타이틀을 달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 연예계와 스포츠계 인사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진다. 한선교 의원이 현역 의원임에도 추대도 아닌 ‘모양 빠지는’ 경선에 도전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 의원 측은 KBL 총재 경선에 나선 이유에 대해 “의원이 되기 전에도 농구 장내 아나운서를 할 정도로 원래 농구를 좋아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이는 없다. 프로농구는 10월부터 시범경기를 시작으로 2011~2012시즌에 돌입한다. 지난 시즌 프로농구 관객은 100만명을 돌파했다. 한 의원은 KBL 총재라는 자격으로 100만 관객에게 얼굴을 알리는 공식적인 통로를 얻었고, 언론도 시즌이 시작되면 KBL 총재 관련 소식을 많이 다룰 수밖에 없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어느 누구보다 효과적인 선거운동 수단을 찾은 셈이다. 다른 현역 의원들이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 관계자는 “정치인의 경우 체육계 수장이 되면 대중과 쉽게 소통할 수 있다. 스포츠·연예계 인사들과 인맥을 만들기도 쉽다. 유권자와 접촉할 때도 스포츠단체 회장이라면 훨씬 편하다”면서 “정치인이라면 누구라도 스포츠계 수장이 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