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연속 정권창출 이룬 ‘정치적 상상력’
3선의원, 통합민주당 공동대표, 중도개혁통합신당 대표, 문화관광부 장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국회 건설교통위원장…. 김한길 의원의 주요 경력이다. 오늘의 그가 있게 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는 그의 문학적 자질에서 나오는 풍부한 상상력이다. 둘째는 야당(김철 사회민주당) 당수의 아들로서 접한 자연스런 정치적 환경이다.
그의 정치 입문, 그리고 성장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1992년 대선 때 고(故) 정주영 국민당 총재에게 발탁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품인 ‘여자의 남자’를 출간, 문학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가정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이혼(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사위)과 함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직후였다. 그는 당시 정 총재에게 ‘정주영 대통령만들기 프로젝트’가 담긴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것이 정 전 총재의 눈에 띄었다. 어떻든 그는 파격적인 대접을 받았다. 당시 현대중공업 사옥(광화문)을 개조했던 국민당 당사 5층의 절반을 그가 혼자 쓸 정도였다. 그의 방엔 수십 대의 TV모니터가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를 눈여겨봤다. TV토론회를 처음 도입한 199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은 그를 최측근 참모로 등용했다. 그는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다. 김대중 정권의 기획통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당시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강래 의원과 함께 김 의원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해내는 사람”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에게 확실한 믿음을 줬다. ‘우지원(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좌한길’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김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김 전 대통령은 절로 웃었다”고 말했다.
그의 역량은 노무현 정권으로도 이어졌다. 2002년 대선에서도 그는 기획을 총괄하면서 방송대책을 책임졌다. 선거광고의 백미라고 불리는 ‘노무현의 눈물’ 역시 그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다. 두 명의 대통령이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는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정권 창출 주역의 그늘 또한 짙다. 단물을 다 뺀 뒤 그는 또 다른 권력 창출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김 의원은 지난 2월 “기득권을 선도적으로 포기함으로써 국민통합신당의 밀알이 되겠다”며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주군을 배신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 뒤 그는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이어 민주당과 통합하면서 통합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는 민주당을 탈당도 않은 채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에 발을 드려놓았다. 모두 ‘밀알’이 되기 위해서라는 미명 아래였다. 하지만 그는 7월 27일 ‘신당창당 기술자’, ‘탈당전문가’라는 비난을 피해 당사에조차 출근하지 않았다.
‘소설가의 상상력’이 정치판에 드리워진 그림자인 셈이다.
<김경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