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본 최대극단 ‘시키’의 한국배우들

김지현 강미애 이주영 등 30여명 활동… 월급 주면서 교육·연기병행 한국과 차이

일본 도쿄의 옛동네에 해당하는 고탄다에 자리잡고 있는 극단 시키(四季)의 캣츠씨어터.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몰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저녁 6시 30분이 되자 1200석의 객석을 가득 메운다. 극장의 불이 꺼지자 사방에서 어슬렁거리며 등장하기 시작한 형형색색의 고양이들. 이들이 하나씩 원형무대에 오르자 무대와 앞좌석이 함께 회전하는가 싶더니 이내 흥겨운 무대가 펼쳐진다. 멍커스트랩, 럼텀터거 등 20여마리 젤리클 고양이로 분장한 배우들은 춤과 노래로 객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극장에 일순 정적이 흐르는 것은 늙고 지친 암고양이 ‘그리자벨라’가 등장해 노래를 부르는 순간. 매력적이던 젊은 시절 바깥세상에 나가 산전수전 다 겪고 돌아왔지만 동료들의 내침을 당하는 그리자벨라는 홀로 ‘메모리’를 부른다. 고양이로 분장한 다른 배우들도 저마다 한번 이상씩 노래를 부르지만 그리자벨라 역을 맡은 배우의 아름다운 노래솜씨는 단연 독보적이다. 공연이 끝난 후 가장 뜨거운 갈채를 받은 것도 이 배우다.

이 배우는 한국인 김지현씨(31). 극단 시키 최초의 한국 배우로, 1997년 입단 후 4개월 만에 ‘캣츠’의 주역인 그리자벨라 역을 따냈으며 ‘라이언킹’의 라피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마리아 역도 맡아 발군의 노래실력을 뽐내왔다. 시키는 영국의 뮤지컬그룹 RUG나 미국 디즈니사 관계자들이 방일했을 때 또는 최근의 만국박람회 오프닝 공연 등 중요한 공연에 항상 김씨를 내세운다.

캣츠 주역 그리자벨라 역 따낸 김지현

같은 시간 도쿄 미나토구에 위치한 시키극장. 봄(春)과 가을(秋), 2개 관으로 이루어진 이 극장의 오른쪽에 위치한 봄관은 디즈니 뮤지컬 ‘라이언킹’이, 왼쪽 가을관은 시키의 창작뮤지컬 ‘꿈에서 깨어난 꿈’이 연일 매진사례를 보이며 성황리에 공연 중이다. 두 작품에도 한국인의 저력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라이언킹’의 주술사 라피키를 연기하고 있는 이는 재일교포 강미애씨이고, ‘꿈에서 깨어난 꿈’에서 주역과 다름없는 유령소녀 마코로 분한 이는 2003년 시키에 입단한 이대 성악과 출신 이주영씨(23)다. 1987년 초연 후 정기적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는 뮤지컬 ‘꿈에서 깨어난 꿈’은 유령의 세계를 엿보고 싶은 소녀 피코가 밤의 유원지에서 마코를 만나고 마코의 요청으로 사후세계를 경험하는 내용을 환상적인 드라마와 노래로 그리고 있다.

이들을 포함해 아시아 최대 뮤지컬기업으로 손꼽히는 시키에는 한국인 배우가 무려 30명에 달한다. 김지현씨 이후 2000년 서울예술단원이었던 이기동씨(34)와 세종대 무용과 출신 뮤지컬배우 이승민씨(26)가 입단했고, 2003년에는 국내에서 ‘그리스’ ‘웨스트사이드스토리’ 등에서 주연급 배우로 활동한 고영빈씨(31) 등 15명이 합류했다. 지난해에는 각종 연극·영화·뮤지컬에서 톡톡 튀는 감초연기를 펼쳐온 이무현씨(36)가 가세했으며 올 4월 1일 신입단원 입단식에는 국립발레단과 서울발레씨어터 단원이었던 김구열씨(31)를 비롯해 11명이 참가했다. 5월에도 성악가 김용구씨와 홍본영씨가 입단할 예정이다.

한국의 뮤지컬배우들이 일본행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체계화된 배우양성 시스템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배우가 저마다 자비로 레슨을 받아야 하는 반면, 시키는 월급을 줘가며 배우에게 필요한 각종 전문적 레슨을 무료로 받게 함은 물론 본인 능력 여하에 따라 언제든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 한국 배우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탭댄스가 특기로, 국내에서 ‘브로드웨이 42번가’ ‘마네킨’ 등에 앙상블로 출연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송인미씨(26)는 “주역배우든 연습생이든 할 것 없이 시키의 모든 소속 배우는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 자기 수준에 맞는 반에서 발레와 재즈댄스 레슨을 받아야 하며 공연 후에는 향후 자신이 연기하고자 하는 역할에 대한 학습을 해야 한다”며 “중국인이나 한국인의 경우엔 일본어학습도 매일 오후 4시간 정도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발레와 재즈댄스를 가르치는 교사는 모두 일본 최고 수준이다.

소속배우들 최소 월 200만원 급여

‘라이언킹’에서 오프닝에 등장하는 산양을 연기하는 정유헌씨(29)는 “뮤지컬 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줘 외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큰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시키소속배우들은 무대에 서지 않아도 최소 월 200만원의 급여를 받고 있으며 일단 공연무대에 오르면 100만원 정도가 추가로 지급된다. 김지현씨와 같은 주역배우의 경우엔 상당한 고액을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무대에 얼마나 서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평균 월 800만~900만원에다 연말 성과급으로 받는 액수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배우층이 두텁다는 점. 10세 이하의 어린이 배우부터 70대 노인배우까지 다양하다. 한국 배우 30명, 중국 배우 30명을 포함해 시키에는 600여명의 배우들이 소속돼 있으며 배우 외 스태프만도 1000여명에 달한다. 이기동씨는 “나이 든 뮤지컬 배우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과 달리 이곳은 기존 소속 배우 외에도 50대, 60대 배우도 오디션을 통해 수시로 선발하는 등 배우를 스타성이나 나이로 구분하지 않는다”며 “주역배우들의 연령이 대부분 40대 이상이어서 한국 배우들은 여기서 어린 축에 속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극단 시키가 배우에 대한 지원시스템을 철저하게 구축하고 있는 것은 흑자경영덕분이다. 1953년 7월 결성된 이 극단은 디즈니 뮤지컬 ‘라이언킹’ ‘아이다’ ‘미녀와 야수’, RUG의 ‘캣츠’ ‘오페라의 유령’은 물론 ‘맘마미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대작의 일본 내 판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꿈에서 깨어난 꿈’ ‘유타와 불가사의한 친구들’ ‘이향난’ ‘인간이 되고 싶었던 고양이’ ‘이국의 언덕’ 등 여러 창작뮤지컬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리고 있다.

뮤지컬로 지난해 순이익만 200억원

시키를 아시아의 거대 극단으로 발돋음하게 한 첫 작품은 RUG의 ‘캣츠’. 아사리 게이타 대표(72)는 “1983년만 해도 일본은 한두 달 공연이 한계였지만 내 모든 것을 바쳐 ‘캣츠’ 전용극장을 도쿄에 짓고 공연을 시작하자 놀랄 만큼 큰 흥행성공을 거두었고, 그 일을 계기로 작품만 훌륭하면 관객은 얼마든지 찾아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캣츠’는 동경에서 11개월, 오사카에서 13개월, 나고야에서 11개월, 큐슈에서 7개월, 삿포로에서 11개월 롱런하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다른 작품의 성과도 마찬가지. 1998년부터 도쿄 시키극장에서 선보인 ‘라이언킹’은 이후 오사카, 후쿠오카, 나고야 등에서도 공연됐는데 매회 90% 이상의 유료관객이 들어서는 성공을 거뒀다. 특히 도쿄 시키극장에서는 7년간 롱런 중이다. 1995년 일본에 상륙한 ‘미녀와 야수’ 역시 10년째인 지금까지도 롱런하며 ‘캣츠’의 롱런 기록을 이미 갱신한 상태다. 아사리 대표는 “유료관객수가 70% 이하면 간판을 내리지만 80%면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아사리 대표는 또 “배우나 스태프의 가족까지 합해 수천명에 달하는 극단 식구를 먹여 살리려면 세금을 제하고 매년 100억 정도의 이익을 내야 한다”며 “지난해에도 순이익만 200억원을 내는 등 시키는 초우량 기업”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극단 시키는 한국시장 진출설로 지난해 국내 공연계에 뜨거운 논쟁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국 배우들끼리 서로 채찍질해요”

시키의 한국 배우들에게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언어문제다. 모든 공연이 일본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일본어가 유창하지 않으면 무대에 오를 수 없다. 송인미씨는 “어느정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액센트로 꾸중을 진저리나게 들어야 했다”며 “이제는 언어선생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키의 한국 배우들은 독하다. 이는 일본인 배우 틈바구니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바탕이기도 하다. 김지현씨는 “외국인인 데다 입단한 지 고작 4개월만에 주역을 맡자 극단 내에서 많은 말이 있었다고 한다”며 “그때는 내가 왕따를 당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하자는 생각만 했다”고 회고했다. 이기동씨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배우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자존심이 우리 사이엔 있다”며 “한국 배우들끼리는 서로를 독려하고 채찍질한다”고 말했다.

이들 한국 배우들의 궁극적 목적은 공통적으로 언젠가 한국무대를 빛내는 일이다. 김지현씨는 “기회가 주어지고 극단 시키에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한국에 돌아가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했고, 이는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송인미씨는 “지금은 부족하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이곳에서 기량을 갈고 닦아 어느 순간 한국 관객들에게 뛰어난 연기를 보여줄 각오가 돼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인터뷰/ 아사리 게이타 극단 시키 대표

“한국배우들 좋은 목소리 타고나”

배우들에 대한 배려가 대단하다.
-“일류뮤지컬에는 일류관객이 찾아온다. 관객수준은 유럽이나 미국, 일본이나 한국이 차이가 없다고 판단한다. 문제는 배우다. 극단 시키는 높은 수준의 배우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관객에게 TV 등 영상매체의 싼 감동이 아니라 무대의 큰 감동을 주려면 무엇보다 배우의 역량이 뛰어나야 한다. 또 월급을 주면서 교육과 연기를 병행케 하는 것은 내가 젊은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극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극단을 꾸리게 되면 배우들이 부업을 하면서 연명해야 하는 고통을 없애겠다고 다짐했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다. 이같은 시스템은 일본 내에서도 시키에만 있다.”

한국 진출은 포기한 것인가.
-“난 한국 배우들이 모국어로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 한국의 뮤지컬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하지만 프로듀서협회 등이 반일감정을 부추기면서 ‘문화침략’으로 매도할 때 솔직히 큰 좌절과 배신감을 느꼈다. 난 한국에서 번 돈을 결코 일본에 들여올 생각이 없다. 한국에 재투자할 것이다. 돈은 이미 일본에서 충분히 벌었고, 더 벌고 싶다면 한국이 아닌 브로드웨이 진출을 통해 돈을 벌 것이다. 난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한국에서도 전국의 어린이들을 위한 무료 순회공연을 상시적으로 하고 싶고, ‘라이언킹’ 등을 1년 이상 장기공연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다. 무엇보다 한국 배우들을 위해 그들이 돈 걱정 없이 체계적으로 레슨을 받을 수 있는 연구소를 만들어주고 싶다.”

언젠가 한국에 진출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나.
-“지금은 독도문제 등 정치적 사안으로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다. 하지만 정치와 문화는 별개다. 또 난 일본에서 대표적 친한파(親韓派)이고, 그로 인해 욕을 먹는 경우도 많다. 시기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면 한국에 진출할 것이다. 시키의 한국 배우들이 2주는 한국에서 한국말로 공연하고, 그 다음달 2주는 일본에서 공연하는 식으로 양국 배우가 오가며 공연하면 좋지 않겠나.”

한국 뮤지컬산업 발전을 위해 조언한다면.
-프로듀서들이 해외 인기뮤지컬 수입을 통해 돈 버는데만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뮤지컬에 재투자하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의 제작자들은 뮤지컬극장이 없다며 정부나 기업에 극장을 대신 지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실패하면 죽는다는 각오하에 스스로 지어야 한다. 그래야 라이선스든 창작뮤지컬이든 수준 높은 작품을 제작해 1년 이상 장기공연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이것이 한국 뮤지컬산업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도쿄·오사카·교토=박주연기자 j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