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나일론으로 짠 '석산 양말'을 처음 본 것은 1955년 10월, 서울 창경원(지금은 창경궁으로 복원되었다)에서 열린 광복 10주년기념 산업박람회에서였다. 쉽게 구멍이 뚫리는 면 양말, 뚫어질 때마다 전구를 넣고 기워 신던 그 시절에 쉽게 뚫어지지 않는 나일론 양말은 '기적의 양말'이었다. 저녁에 빨아서 그 이튿날 아침에 신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몇달을 신어도 처음의 품질과 감촉을 그대로 유지했다. 시골에서 수학여행 온 중3학생에겐 망설여지는 가격이었지만 선물용으로 한 켤레를 샀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러나 새로운 화학섬유가 나오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천연섬유를 더 선호하게 되자 석산 양말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비록 '석산'이라는 브랜드는 사라졌지만 모든 물산이 부족했던 시절에 나온 나일론 양말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 새삼 반세기 전의 양말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도 이젠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국산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사람들은 코트를 얘기할 때면 영국산 버버리를 떠올리고 색안경을 얘기할 때면 미제 레이번을 떠올린다. 버버리나 레이번 등은 특정상표가 제품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된 대표적인 경우다.
미국이나 영국에 본부를 둔 시장조사회사나 브랜드 컨설팅회사에선 해마다 세계 10대 유명상표를 발표한다. 해마다 그 순위가 조금씩 바뀌긴 하지만 코카콜라나 마이크로소프트, 코닥, 디즈니, 맥도널드, IBM 등은 거의 빠지지 않고 10대 상표에 들어간다. 일본 회사로선 전자제품 소니와 자동차 도요타가 들어 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여기에 이름을 올린 상표가 없다.
물론 우리나라 상품으로 세계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한 브랜드는 많다. 주로 섬유와 직물, 조리-주방기구들이지만 세계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상품은 76개(1999년 기준)나 된다. 그러나 이 숫자는 미국의 924개나 독일의 694개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다. 중국의 460개, 일본의 326개에 비교해도 우리 상품의 세계시장 지배율은 너무 초라하다.
며칠 전 산업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는 연속 3년째 떨어져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국내기업 브랜드 가치는 3년째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삼성전자가 21조7천7백96억원을 기록해 그나마 체면을 세웠다. 그러나 이 역시 이미 5년 전에 브랜드 가치 100조원을 기록한 코카콜라에 비하면 한참 멀었다. 제품브랜드 평가에선 유명 세탁기와 냉장고, 휴대용전화 등이 올라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내용일 뿐이다.
우리나라도 이젠 남의 나라 원조물자나 쳐다보고 살던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세계 제12위의 당당한 경제대국이다. 연간 수출도 올해로 2천5백억 달러를 넘어섰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을 국시처럼 떠받들며 수출 1백억 달러를 항해 일하던 1970년대에 비하면 엄청난 성취다. 그러나 이젠 수출 규모만 자랑할 게 아니라 세계 소비자들에게 친근한 유명 브랜드를 키워야 한다. 우리가 경제대국임을 내세우려면 무슨 제품 하면 바로 메이드 인 코리아의 특정 브랜드를 떠올릴 만한 명품 몇개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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