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에너지 확보 못 하면 수출도 리쇼어링도 어려워진다

탄소국경세 눈앞… 철강 등 국내산업 ‘비상등’

대전의 한 배터리 소재 업체는 최근 배터리 부품을 만드는 스웨덴 업체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제품 생산 전 과정에서 나오는 탄소배출량 데이터 제출을 요구받았다. 스웨덴 측 구매자는 이 정보를 줄 수 없으면 거래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현재 유럽연합(EU)은 배터리 생산과정에서의 탄소배출량 신고만 요구하지만, 2027년이 되면 기준치 이상의 제품은 수출규제 대상이 된다. 탄소배출이 기업의 비용으로 반영되면서 온실가스 감축 노력을 게을리한 기업은 경쟁력을 잃을 처지에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7월 14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탄소국경조정제도 도입 등 탄소배출 감축 방안을 담은 정책 패키지를 발표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역내외 탄소배출량 차이만큼 관세부과

변화를 주도하는 곳은 EU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7월 14일(현지시간)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최소 55% 감축하기 위한 정책수단을 담은 ‘핏포 55(Fit for 55)’를 발표했다. EU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는 첫 번째 대륙이 된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지난 6월 이를 명시한 유럽기후법을 채택했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정책수단을 ‘핏포 55’라는 이름으로 처음 공개했다. 이 제안은 EU 27개 회원국과 유럽의회의 협상·승인을 거쳐야 확정된다.

여기에는 2035년부터 등록되는 모든 신차의 운행 중 탄소배출량을 ‘0’으로 줄여 사실상 신규 휘발유·디젤 차량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가 포함된다. 교통, 제조업, 난방 부문에서 탄소배출 비용을 높이고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항공·선박 연료에 세금(탄소세)을 부과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EU 탄소 배출권거래제(ETS)를 개정해 교통·건설 부문에도 탄소배출 비용을 부과하고 선박·항공 분야도 ETS에 포함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한국을 비롯한 제조업 중심 국가들이 특히 관심을 갖는 정책은 탄소국경조정메커니즘(CBAM·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이다. 이는 EU 역내로 수입되는 제품 중 역내 생산품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경우 관세 형태로 탄소비용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제품 생산과 운송, 전력 생산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않으면 수출도, 기업 유턴(리쇼어링)도 어려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날 공개된 CBAM 초안에 따르면 가장 먼저 적용되는 품목은 생산과정에서 탄소배출이 많은 철강, 시멘트, 전기, 비료, 알루미늄 등 5종이다. EU 집행위는 2023년 1월 1일부터 이 분야에 우선 적용하고, 3년의 전환기간을 거쳐 2026년 전면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초기에는 생산공정에서 나오는 직접배출 온실가스만 반영하지만, 전환기간이 끝난 후에는 생산공정에서 사용한 전기 생산과 협력사 부품 생산, 제품 운송 과정 등에서 발생하는 간접배출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대할 가능성도 내비쳤다.

비용 부과 방식은 ‘CBAM 인증서(certificate)’ 구매 방식이 유력하다. 이에 따르면 CBAM 적용 품목 수입자는 사전에 연간 수입량에 해당하는 양의 CBAM 인증서를 구매해야 한다. 인증서 1개는 탄소 1t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EU 역내 제품 1개를 생산할 때 배출되는 탄소가 10t이고, 수입제품의 생산과정에서 나오는 탄소배출량이 12t일 경우, 수입자는 2t만큼의 CBAM 인증서를 구매해야 한다. 사실상 관세부과 효과가 생겨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이 약해진다. 인증서 가격은 EU의 탄소배출권 시장에서의 주간 평균가격을 반영한다. CBAM 대상 수입품이 원산지 국가에서 배출권거래제 등을 통해 탄소배출 가격을 이미 지불한 경우 수입업자는 해당 가격에 상응하는 금액의 감면을 요청할 수 있다.

EU는 ‘탄소누출(Carbon Leakage)’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고 밝혔다. 탄소누출은 탄소배출 규제가 약한 국가로 기업이 생산시설을 이전하는 현상을 말한다. 유럽 기업이 부담하는 탄소배출 비용을 수출업체도 부담하도록 해 공정한 경쟁 조건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EU는 파리기후협정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국제사회 공동의 노력을 강조한 것도 여러 번 언급했다. CBAM이 없다면 탄소누출로 오히려 글로벌 탄소배출이 증가할 수 있다고 도입의 정당성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이는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유럽 기업이 지불하는 비용 차이만큼 탄소국경조정세로 부과한다는 주장이 일견 합리적이고 정당해보이지만, 그 수준이 과하다”면서 “자국 산업 보호의 측면도 있지만, 관련 산업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오히려 에너지 전환 등에 필요한 재원으로 활용하려는 측면이 훨씬 더 크다”고 설명했다.

실제 유럽의회는 지난해 9월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7500억유로) 차입금 상환을 위해 탄소국경조정세 등을 포함한 EU 차원의 신규세제 도입을 승인했다. EU 집행위는 탄소국경조정세 부과 시 연간 약 50억~140억유로(약 19조원)의 세수확보를 기대하고 있다. 허혜인 환경부 기후변화국제협력팀장은 “유럽연합의 공식적 입장은 탄소누출을 방지한다는 것이지만 이면에서는 코로나19 이후 경기회복을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그린딜로 준비하면서 그에 드는 막대한 재정을 이 제도로 충당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설명했다.

철강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 발등에 불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지난해 말 발간한 보고서에서 EU가 이산화탄소 1t당 30유로를 과세할 경우, 우리나라는 연간 10억6100만달러(약 1조2200억원) 규모의 추가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했다. 1.9%의 추가 관세가 부과되는 정도이다. EU 배출권 거래시장에서의 탄소배출권 가격은 지난 5월 이후 t당 50유로를 넘어섰다. 앞으로 EU 배출권 시장에 포함되는 산업이 늘면서 가격은 더 오를 가능성이 크다. 탄소배출 비용이 국내 산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예상되면서 증권가에서는 향후 매출/탄소배출 지표를 기업 수익성 분석의 한 축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산업부문 탄소배출량이 가장 많은 산업인 한국 철강 수출경쟁력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국내 철강산업은 국가배출량의 17%를 차지하는 온실가스 다배출 업종이다. 하지만 철광석에서 철을 끄집어낼 때 유연탄을 환원제로 쓰기 때문에 온실가스 감축이 쉽지 않다. 정부와 철강업계는 유연탄 대신 수소를 활용하는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지만, 상용화까지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 개발에 성공해도 난점은 있다. 유승훈 교수는 “포스코 한 곳만 해도 수소환원제철을 위해 연간 350만t의 수소가 필요하다. 1기가와트 규모의 원전 1기에서 나오는 열과 전기로 수소만 생산해도 연간 20만t에 불과하다. 수소를 대량으로 공급할 방안을 강구해야 하고, 안 되면 일본처럼 수입이라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수소환원제철로 80%를 생산하고 20%는 고철을 수입·재활용해 만들 수 있다. 이 경우 고철을 녹일 전기로가 필요하다. 이때도 탄소배출을 줄이려면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가 필요하다. 철강산업은 탄소중립 시나리오라도 있지만, 시멘트는 폐콘트리트 재활용 외에는 아예 대안이 없다. 석유화학의 경우 석유 기반에서 천연가스·셰일가스 기반으로 바뀌거나 바이오 기반으로 전환해야 한다. 여의치 않으면 해외로 이전할 수밖에 없다.

‘탄소장벽’ 대응하는 공급망 재편 가능성

탄소국경세가 부과되고, 탄소배출 규제가 강화될 경우 재생에너지 공급이 부족한 나라는 수출도, 해외로 나간 기업의 국내 유턴도 어려워진다. 오히려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를 쓰기 용이한 나라로 생산시설을 옮길(오프쇼어링) 가능성도 있다. 과거엔 낮은 임금 때문에 중국과 베트남 등 동남아 지역으로 공장을 옮겼다면 이젠 재생에너지 확보를 위해 해외로 가게 되는 상황이다. 애플·구글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자사 공급망에 속한 업체들에게 생산과정에서 재생에너지 100%(RE100)를 요구하는 것도 이런 흐름을 재촉한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려면 재생에너지 확보를 대폭 늘려야 한다. 일부 탄소 다배출 기업의 눈치를 볼 여유가 없다. 유승훈 교수는 “탄소배출 수준에 따라 관세가 부과되고, 그 수준이 올라가면 국내 기업은 국내 공장 문을 닫고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공급 여건이 양호한 개발도상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서 “기업이 오프쇼어링을 택하지 않도록 재생에너지 보급을 최대한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력 생산에서 재생에너지 보급을 확대한다는 말은 전력 생산의 탄소배출계수(전력 1㎾h를 생산할 때 나오는 온실가스 배출량)를 낮춘다는 말이다. 현재 국내 탄소배출계수는 2018년 기준 457g이다. 전 과정 평가 전문가인 김익 스마트에코 대표는 “전기의 탄소배출계수를 낮추지 않으면 전기를 쓰는 우리나라 많은 기업이 수출에 타격을 받게 된다”면서 “전기 생산의 제조원가가 높아지면 산업의 제조원가가 높아지기 때문에 탄소 중심의 그리드 믹스를 빨리 바꾸기 어렵다고 하지만 현재만 보지 말고 수출 타격이라는 미래 비용까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유승훈 교수는 CBAM이 자유무역을 가로막는 부당한 관세로 볼 여지가 있기 때문에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해 시간을 벌고, 협상 과정에서 부담을 낮추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 교수는 “미국은 석유와 가스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자체 도입하면서 한편으로 EU와 협상도 하는 투트랙 전략을 택하지만 우리는 무조건 외교력을 발휘해 유예나 감면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의 탄소세 도입도 서둘러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진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글로벌전략팀장은 “우리 기업도 배출권거래제에 참여하면서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완전히 아무런 비용을 내지 않는 건 아니다”라면서 “너무 우려의 시각으로 보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엔 기후변화협약도 무역에서 자의적 조치가 돼선 안 된다고 경고하고, 특정 국가에 배타적 차별이 되면 WTO 위배 소지도 있어서 전면 도입될지는 긴 호흡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CBAM의 초안은 당초 예상과 달리 초기 대상 품목에 직접배출만 적용하는 등 역내외 반발을 반영해 일부 후퇴했다.

다만 문 팀장은 제품의 생산부터 최종 소비자 구매 단계까지 전 과정에서의 탈탄소화를 염두에 두고 경제활동을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혜인 팀장은 “원산지에서 충분한 탄소비용을 지불했을 경우 그 노력을 어느정도 반영해 CBAM 적용 시 감면하겠다는 취지의 조항이 포함됐다”면서 “한국도 EU 못지않게 강력한 규제로 온실가스를 관리하는 만큼 이를 잘 납득시켜 최대한 국내 기업의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협상하고, 고탄소 배출 기업이 저탄소 분야로 전환하는 자구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