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 공연 한 편 배달시켜 볼까?

회의실 탁자를 옮기니 무대가 되었다. 회의 때마다 졸음을 참던 그 의자에 앉았는데 오히려 눈이 더 말똥말똥하다. 조명이나 무대장치는 간이 형태지만 바로 코앞에서 배우들의 숨소리 하나까지 들을 수 있는 연극은 몰입도가 상당하다. 직장으로 공연을 배달해주는 ‘직장 문화배달’을 받아본 직장인 이모씨(34)는 공연장 못지않은 관람 경험을 했다고 느꼈다. 관람료도 안 드는 공짜에, 운 좋게 칼퇴근을 하더라도 퇴근시간 미어터지는 지하철에 시달리며 공연장에 도착해서는 관람하기도 전에 기운이 빠져버리는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 이씨는 “마음 같아서는 매달 돌아오는 ‘문화가 있는 날’마다 회사에서 배달 신청을 해줬으면 좋겠다”면서도 “야근 대신으로 보는 것만 빼면”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서울 성동구 헤이그라운드에서 김외섭 무용단이 진행한 직장 문화배달 공연이 열리고 있다./지역문화진흥원 제공

연극, 무용, 드로잉쇼, 국악 등 인기

‘직장 문화배달’은 평일 문화생활이 어려운 직장인에게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 근무지로 직접 찾아가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는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다. 직장인들에게는 바쁜 근무 중 잠시 짬을 내 숨을 돌리는 시간이지만 반대로 공연을 맡은 입장에서는 긴장되는 일의 시작이다. “생소한 공간에서 하는 공연이라 아무래도 준비하면서나 공연 중에 막힐 경우도 있는데 직장인 관객분들의 호응이 좋은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이래저래 많이 배려를 받아서 더 힘이 나죠.” <런닝머신 타는 남자의 연애갱생 프로젝트>라는 긴 제목의 연극을 ‘배달’하는 공상집단 뚱딴지의 박문수 조연출은 그래도 일을 하고 대가도 받으니 기운이 난다고 말했다.

이 극단의 공연 <런닝머신…>은 내용부터 일에 지친 직장인들의 삶과 희망을 다루고 있다.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남자 직장인 주인공은 출근한 직장이 말 그대로 전쟁터가 되어버린 것을 경험한다. 새로운 계기를 찾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만 언젠가부터 고장 나버린 런닝머신은 멈출 줄을 몰라 계속 달려야 한다. 박 조연출은 “반복되는 업무와 피로도 높은 일상에도 또한 하루하루를 이어나가야만 하는 것이 직장인의 현실”이라며 “무너지는 일상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태도에 관해 연극적으로 이야기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내용까지 직장인 맞춤형으로 구성된 공연들이다 보니 호응은 높다. ‘스튜디오 나나다시’는 일행 중에 숨어 있는 마피아를 찾아야 하는 게임을 공연으로 옮긴 <도시 속 마피아>를 직장으로 공연 배달하는 극단이다. 무엇보다 관객참여형 게임연극이기 때문에 관객과 배우 모두가 함께 누가 선량한 시민이고 누가 범죄자로 의심되는지 토론하는 시간을 거친다. 즉흥으로 진행되어 그날의 사건도, 게임의 결말도 항상 바뀐다. 무료 공연은 관객 반응이 심드렁할 수밖에 없어 힘이 빠질 때가 많지만 직장 문화배달만큼은 예외다. 신덕규 배우는 “직장으로 직접 찾아가면 직장이라는 장소의 특색까지 맞물려서 관객들의 호응을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이끌어낼 수 있다”며 “다양한 분위기의 직장에서 공연하며 여러 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도 공연하는 입장에서는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지역문화진흥원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직장 문화배달 신청건수와 관람객 수는 계속해서 늘고 있다. 연극 외에도 무용, 드로잉쇼, 국악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공연을 관람한 인원이 2만2000여명, 신청 직장 수는 200여곳에 달했다.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있는 직장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공연을 즐길 기회가 적은 곳에도 찾아간다. 유료 공연을 연다고 해서 곧바로 수입으로 이어지기 힘든 형편의 영세 공연단체들에도 놓치기 아까운 기회다. 세 번의 공연으로 공연 기획과 연출, 공연 참가자와 스태프 모두의 인건비를 포함한 필수경비로 1500만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 문화배달에 참여하는 한 단체의 단원은 “어떤 공연은 돈 한푼 못받는 것을 넘어서 제돈 내고 해야 할 경우도 있는데, 열심히 준비한 공연에 제대로 된 대가를 받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충남 천안시 우정공무원교육원에서 국악그룹 고래야가 진행한 직장 문화배달 공연이 열리고 있다./우정사업본부 제공

소방공무원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

손쉽고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직장인 관객들의 만족도가 높지만 완벽할 수는 없다. 배달이 가능한 날이 문화가 있는 날인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인 탓에 업무 상황과 맞지 않아 결국 신청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콘텐츠 기획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김대진 대표(46)는 “불가피하면 공연 요일은 바꿀 수 있지만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정산과 마감이 겹치는 매월 마지막주에만 공연이 가능하다고 해서 직원들의 일반 공연 단체관람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공연단체 역시 상시 진행 중인 공연과 문화배달 신청이 겹치는 경우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한 극단 관계자는 “문화가 있는 날이 일반 공연 관객 수요도 늘어나는 날이라 오픈런 공연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공연 한 번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교대근무 등으로 저녁시간대에 집중된 보통의 공연을 관람하기 어려운 특정 직종에서는 그나마 직장 문화배달이 메마른 문화경험에 드문 기회가 되기도 한다. 특히 화재, 구조, 구급 등 각종 재난현장에서 극한상황의 경험이 많아 외상 후 스트레스의 발병 확률이 높은 소방공무원들에게는 문화배달의 효과와 호응도 더 큰 편이다.

국악 공연단체 온누리국악예술인협동조합을 초청해 사물놀이와 국악, 실내악에 걸친 다양한 국악 공연을 진행한 경기도 안양소방서의 정용안 서장은 “현장 활동을 하는 소방관은 언제든 외상 후 스트레스에 노출될 수 있다”며 “직원들에게서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외상 후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근무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았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