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재해는 ‘안전약자’에게 더 가혹하다

보통의 주거환경보다 안전도가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안전약자’로 분류한다. 스스로 대피 또는 대응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이 부족한 노인·어린이·장애인도 안전약자다. 안전약자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전상규씨(50·가명)는 ‘달방’에 산다. 서울 종로구 종로5가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여관이다. 1월 20일 불이 나 6명이 숨진 서울장여관이 지척인 곳이다. 불은 새벽에 났지만 전씨가 아침 출근길에 나설 때까지도 매캐한 냄새는 골목에 남아있었다. 전씨는 화재현장을 지나며 과거 자신이 살던 고시원에서 불이 났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불이 난 것은 새벽이었다. 전씨는 자다 깨서 속옷 바람으로 정신없이 대피한 고시원 입실자 무리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그 대피행렬에 합류하지 못한 여성 한 명은 유명을 달리했다.

2005년 12월이었다. 서울 마포구의 한 고시원에서 불이 났다. 당시 전씨는 가까운 신촌에 있던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 그만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중이었다. 5층 건물의 지하층을 통째로 쓰는 고시원에는 40개가 넘는 방이 있었다. “고시원 알잖아. 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거든. 그 방들이 거의 다 (입실자들로) 차 있었던 것 같은데, 한 명밖에 안 죽은 게 신기했지.” 그때 살던 고시원만큼이나 지금 살고 있는 여관 달방도 화재가 나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보증금 없이 다달이 40만원 안팎의 방값을 내고 사는 달방 여관에는 스프링클러와 같은 화재 대비 설비가 갖춰져 있지 않다. 서울장에 불을 지른 피의자가 전씨가 묵는 여관으로 발길을 향했다면 전씨도 두 번이나 화재피해를 피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무사히 화재를 피한 것을 다행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전씨는 “글쎄, 운이 좋은 거라고 해야 하나. 그 반대 아닐까”라고 짧게 답했다.

전씨의 대답처럼 불이 날 위험이 더 높은 곳에 사는 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달방 여관은 고시원과 비교해도 규모가 작은 경우가 많아 대부분이 소방시설법 적용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연면적 600㎡ 미만이거나 소방시설법이 시행된 2004년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은 스프링클러와 같은 소방시설을 설치할 법적 의무가 없다. 종로5가 일대에서 달방 거주자를 받는 숙박업소 중 3~4층짜리 ‘모텔’을 제외한 ‘○○장’ 여관은 연면적이 100~200㎡ 수준이어서 소방안전점검도 정기적으로 받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소규모 숙박업소의 수가 전체 숙박업소의 3분의 1에 달한다는 점도 문제다. 전체 4만7147곳의 숙박업소 중 소방법에 따라 소방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특정 소방대상 숙박업소를 제외하면 1만5377곳의 소규모 업소가 서울장여관과 비슷한 화재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화재로 6명이 목숨을 잃은 서울 종로구 서울장여관 앞에 시민들이 추모의 뜻으로 갖다놓은 국화가 놓여 있다. / 연합뉴스

소방법 사각지대 놓인 달방여관들

경제적인 어려움은 안전의 위협으로도 이어진다. 보통의 주거환경보다 안전도가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도 ‘안전약자’로 분류된다. 재해약자나 재난약자라는 표현으로도 불리는 안전약자는 크게 보면 세 가지 이유로 잠재적인 안전위협을 겪는 이들을 가리킨다. 재난이 벌어지면 자기 힘으로 대피 또는 대응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이 부족한 노인이나 어린이, 장애인이 대표적이다. 그밖에 외국인처럼 안전·대피 표지를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 있을 때도 안전약자로 분류된다. 그리고 전씨처럼 경제적인 이유로 기본적인 안전이 보장되는 환경에 있지 못할 때도 안전약자가 되는 것이다.(국립재난안전연구원, ‘재난약자 방재대책 실태조사 및 분석 보고서’)

노인은 안전약자의 세 가지 분류에 모두 해당되기 쉬울 때가 많다. 기본적인 근력이 약해진 데다, 만성질환을 앓고 있을 확률도 다른 연령대보다 높다. 혼자 살고 있으면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고립되는 경우도 있고,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재난정보에 접근하기에 어려운 경우도 많다. 농촌에 살고 있으면 구급·구조를 기다리거나 병원으로 이동할 때도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노인 빈곤율 1위를 유지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노인들은 경제적 약자로도 분류되기 쉬운 것이다.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참사에서도 희생자의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사망자 40명 중 70대 이상 노인이 32명으로 전체의 80%에 달했다. 대부분 뇌졸중이나 치매처럼 혼자 힘으로 대피할 수 없는 환자들이었다. 일부는 병상에서 떨어지는 낙상을 피하려 묶여서 고정돼 있었던 것이 더 큰 참변을 불렀다. 여기서도 문제는 같았다. 가장 전형적으로 피난능력이 제한된 안전약자인 노인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곳이지만 병원 규모를 이유로 배연·제연시설 설치의무를 피해간 것이다. 화재 시 연기와 유독가스를 밖으로 배출하는 배연·제연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의무는 6층 이상의 건물이나 바닥면적이 1000㎡ 이상인 시설에만 적용된다. 5층 규모인 세종병원은 만만치 않은 설치비용이 들어가는 방재시설을 도입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소방·방재 전문가들이 도입이 시급하다고 지적하는 설비는 특히 이들 안전약자들이 빠른 시간 안에 대피하지 못할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일반적인 화재 발생 시에는 대피에 필요한 ‘골든타임’ 5분 안에 불이 난 사실을 알아채고 재빠르게 대피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노인이나 장애인 등 화재 사실을 알아도 혼자 힘으로 이동하기 어려운 안전약자들에게는 보다 빠르게 화재를 감지해 건물 전체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설비가 필수적이다. 최영상 대구보건대 교수(소방안전관리 전공)는 “화재가 상당히 번져야 감지할 수 있는 열 감지 화재경보기 대신 연기 감지식 기기로 빠르게 불을 감지해 자동 방화문·방화셔터가 작동하면 확산을 최소화할 수 있다”며 “여기에 배연·제연시설이 함께 작동해 질식위험이 높은 유독가스를 빼내면 안전약자라도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은 극적으로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신체적인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요양시설에도 이러한 설비가 마련돼 있기는커녕, 그나마 있는 대피방안을 따라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김모씨(47)는 수도권 일대의 요양원과 요양병원, 노인전문병원 등에서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여러 병원과 시설을 접해봤기 때문에 소방점검과 대피훈련도 여러 차례 참여하고 지켜본 경험이 있는 김씨는 “불 나면 목숨은 그냥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방재 및 대피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대응 매뉴얼에 따라 움직여도 화재 상황에선 제 역할을 다하기 어렵다는 것이 김씨의 생각이다.

안전약자를 위한 대비시설 시급

김씨는 “물론 제가 소방관도 아니고 구조에 대해 뭐라 말할 순 없지만, 당장 내 입장만 놓고 보면 대피훈련한다고 들것이랑 피난사다리까지 다 준비해놓은 상황에서도 10분 넘게 우왕좌왕하는 걸 보니 ‘나부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자기 힘으로 휠체어에 올라타는 훈련도 하기 힘든 요양시설의 노인들을 그보다는 젊지만 대부분 중년 여성인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들이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입원자 수에 비해 부족한 의료진과 요양인력으로는 화재 초기 불이 난 사실을 시설 전체에 알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판단이었다.

현직 소방관도 김씨의 판단 자체가 틀렸다고 부정하지 못했다. 서울의 한 일선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소방관은 “규정대로 방화문이 닫혀 있고, 스프링클러에 충분한 수량이 채워져 있어서 작동하기만 해도 스프링클러에서 나온 물로 연기가 가라앉기 때문에 구조인력이 들어갈 때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반대로 그 중 하나라도 제 역할을 못해서 가스가 건물 전체로 퍼지기 시작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이동이 어려운 안전약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시설에서 화재 같은 재난이 발생하면 대형참사로 이어져온 전례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없다면 여전히 반복될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2014년 벌어진 전남 장성의 요양병원 화재에서도 입원해 있는 환자의 절대다수를 노인이 차지했기 때문에 사망자가 21명에 이르는 참극이 벌어진 바 있다. 그런데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후 대처도 미진했다. 요양병원에 대해서는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했지만 비슷한 성격의 노인전문병원이나 요양원 등은 이 설치의무에서 제외된 것이다. 여기엔 화재 예방과 진압을 맡은 소방·방재당국과 피난시설이나 건축구조 등을 담당하는 건축 관련 당국이 따로 노는 정부의 행정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최근 이어진 충북 제천 화재나 서울 종로 화재에서도 보듯 일반적으로는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안전약자로 보이지 않는 일반인들도 언제든 비슷한 대피 불능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된다. 화재에 취약한 구형건물에 소방시설 미비 상황까지 겹친 다중이용시설의 문제는 복합적으로 접근해야 하지만 그에 맞는 행정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것이다.

1월 26일 대형 화재참사가 발생한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 화재현장인 응급실 앞을 경찰들이 지키고 있다. 뒤편으로 일부 환자들이 대피에 이용한 인명구조대가 펼쳐져 있다. / 이석우 기자

일상 속 부족한 안전의식 문제

행정의 틈을 메울 일상 속의 안전의식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직장인 권현준씨(29)가 살고 있는 원룸식 고시원 방 천장에는 화재감지기가 붙어 있다. “천장에 있는 감지기가 가끔씩 짧게 ‘삑’ 소리를 내더라고요. 궁금해서 고시원 관리자한테 물어보니까 정상 작동하는 소리라는 거예요.” 그러나 관리인도 권씨도 감지기의 배터리가 다 됐기 때문에 ‘삑’ 하는 교체 경보음을 낸다는 사실은 몰랐다. 권씨는 전력이 다 된 감지기에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 걸 문득 깨닫고 관리인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동안 감지기가 먹통인 상태로 있었다는 것을 모두가 뒤늦게 알게 됐다. 권씨는 “스프링클러도, 방화문도 없는 곳인데 불이 나면 최소한의 경보도 못 듣고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게 소름끼쳤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누구나 안전약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주거비용이 모자라 취약한 주거환경에서 사는 것은 물론이고 고층건물에 살 때도 긴급한 재난 시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한계는 비슷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고층건물 등에서는 상대적으로 스프링클러나 방화문 등의 설비를 갖췄을 비율은 높아지지만 기본적인 안전 불감증이 반복되면 피해가 악화될 소지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이다. 공하성 경일대 교수(소방방재학과)는 “종로 여관과 같은 쪽방촌은 대부분 노후화돼 있다는 한계가 있어 불에 타기 쉬운 실내장식물에라도 법으로 규정해 주기적으로 방염처리를 하도록 하는 처리기준이 필요하다”며 “안전보다 경제적 논리가 앞선 탓에 안전약자들을 위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문제는 정부에서 소방시설 설치비용의 일부를 지원해 주는 식으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고령화 시대 안전약자 매뉴얼

노인은 가장 대표적인 안전약자이다. 그리고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노인인구는 늘어나고 있다. 더 이상 안전약자가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분류가 아닌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다. 게다가 재난에는 긴급한 대피가 필요하지만 대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를 입지 않는 화재와 같은 재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교통사고를 비롯해 폭염이나 한파, 지진과 홍수 등 다양한 재난에 있어서도 노인이 안전약자의 자리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화재보다 더 흔하게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교통사고와 폭염·한파 피해에서도 노인들이 취약한 상황이라는 사실은 통계가 입증하고 있다. 도로교통공단이 발표한 2015년 자료에서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65세 이상 노인의 보행 중 사망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한국 노인인구 10만명당 보행 중 사망자 수는 15.5명을 기록해 OECD 평균인 3.2명보다 5배 가까운 수치를 기록하며 압도적 1위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폭염과 한파로 노인들이 입는 피해 역시 고령화에 따라 점차 증가해 연평균 20명 수준이다. 한파피해는 더욱 광범위해서 2010년대 들어 한파 등 이상기후로 사망한 총사망자 수는 연간 25만5000명 수준까지 높아졌다. 다른 연령대의 한파 사망률은 줄어들고 있지만 고령층의 사망 비율이 높아진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또 관련 정보를 빠르게 얻어서 대비하는 것이 중요한 전염병 관련 피해에서도 상대적으로 정보 접근성이 약한 노인계층이 더 큰 타격을 입는 것으로 분석됐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의 ‘늙어가는 위험사회, 대한민국’ 보고서를 보면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당시 연구결과를 토대로 “질병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히 이루어질수록 위기상황 발생 시 적절한 대처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여러 사회적 요인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신종플루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사실이 나타났다. 특히 대도시가 아닌 농촌에 사는 노인일수록 정보 접근에 취약한 특성이 의료 인프라 부족과 연관돼 더 큰 여파를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고령화시대 안전약자인 노인층에 대한 대책은 복합적으로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연령에 따른 정보 격차와 도·농 간 의료 격차를 줄이는 사회 전반의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게다가 교통사고는 물론 이상기후에 따른 피해 역시 사람이 만든 사회복지 및 예방의학체계를 정비하는 방향으로 충분히 개선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의 이종설 안전연구실장은 “우선 재난정보 전달체계를 갖춰 피난에 보통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노인들의 상황을 고려해 다양한 수단을 활용한 복수의 정보전달 경로를 확보하고 소방·복지분야 등 관련기관이 상시적으로 안전약자 정보를 공유하도록 하는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잇따른 화재참사로 논란이 된 노인 이용시설 관련 대책으로는 근본적으로 소방 안전관련 인력을 보강하는 한편 안전관리 교육·훈련을 강화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농어촌 등 의료취약지역을 중심으로 응급체계를 보강하고, 실제 주거지에서 노인들도 무리 없이 대피 가능한 경로를 확보할 수 있게 주택구조를 바꾸는 지원대책도 검토된다. 최영상 대구보건대 교수(소방안전관리 전공)는 “화재 등 재난이 발생한 뒤에 대책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하므로 당장의 안전대책 마련이 노인복지와도 직결된다는 인식으로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며 “한시가 급한 재난상황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자동설비를 갖추는 비용이 적지 않지만 어느 한 부분이라도 빠지면 전체 체계가 흔들린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