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경제]<러빙 빈센트>-미술 대중화 이룬 인상파의 ‘파괴적 혁신’

879점의 작품을 남긴 빈센트 반 고흐가 붓을 잡은 기간은 불과 9년이다. 4일에 하나꼴, 어떨 때에는 하루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열적으로 작품을 그렸지만 정작 팔린 작품은 단 한 점이었다. 고흐는 살아서 철저히 외면받던 작가였다.

도로타 코비엘라, 휴 웰치먼 감독이 공동연출한 <러빙 빈센트>는 이제서야 거장을 알아본 미래세대가 고흐에게 보내는 오마주(경의의 표시로 바치는 것)다. <러빙 빈센트>는 10년에 걸쳐 만든 세계 최초의 유화 에니매이션이다. 107명의 화가들이 직접 유화로 그린 6만2450장의 프레임을 이어 붙여 만들었다.

영화는 고흐의 마지막을 주목한다. 고흐는 권총자살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다. 타살을 당한 것은 아닌지, 자살을 한다면서 왜 머리가 아닌 배에다 총을 쐈는지 등은 미스터리다. 고흐의 죽음을 추적하는 아르망은 이 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 오베르의 라부 여관을 찾는다. 고흐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영화 속 경제]<러빙 빈센트>-미술 대중화 이룬 인상파의 ‘파괴적 혁신’

비단 고흐뿐 아니었다. 인상파 작가들이 1874년 첫 그룹전을 열었을 때 혹평이 이어졌다. 전통적인 회화에서는 보지 못했던 대담한 붓터치, 화려한 색감, 거친 질감을 보수적인 미술전문가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보층과 젊은이들은 달랐다. 새로운 형식의 작품은 이들을 매료시켰다. 상인계층이 인상파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상주의는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술사조 중 하나가 된다.

미술사에서 인상파의 도약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과 닮았다. 파괴적 혁신이란 저렴한 가격의 단순한 제품으로 시장 밑바닥을 잠식한 뒤 빠르게 시장 전체를 장악하는 방식의 혁신을 말한다. 그러니까 대규모 투자를 해 첨단 신제품을 만든 뒤 시장에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가 제품으로 니즈마켓을 공략해 덩치를 키운 뒤 정면승부를 거는 전략이다.

당시 화가들은 귀족과 대부호의 초상화나 종교화를 그렸다. 이들에게 인정을 받는 화가는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인상파는 달랐다. 귀족의 초상화 대신 일반인의 얼굴을 그렸고, 어둡고 무거운 대저택이나 성당이 아니라 밝고 화려한 야외 언덕을 그렸다. 상인들은 그들의 작품을 저렴한 가격에 사들였다. 대중의 입소문을 타고 인상파의 입지가 확대됐다. 인상파는 로코코·바로크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삼성전자가 저가의 TV와 세탁기 등 백색가전을 앞세워 세계 시장을 공략한 것도 이와 비슷해 보인다. 삼성전자는 바닥을 다진 뒤 마침내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공룡 가전사들을 따라잡았다. 현대자동차도 포니, 엘란트라를 앞세워 미국 시장에 진출한 뒤 글로벌 자동차회사로 급성장했다. 요즘은 중국의 화웨이와 샤오미, 하이얼, 오포, 비보 등이 저가 전자제품과 저가 스마트폰을 내세워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중국은 아직 멀었다”고 방심하는 순간 따라잡힐지도 모른다.

영화 속 경제

파괴적 혁신은 니치 마켓의 소비자를 시장으로 끌어들인다. 그만큼 시장도 커진다. 예컨대 중저가폰은 가격이 부담스럽거나 사용이 너무 복잡해서 스마트폰 구입을 꺼렸던 고령자와 어린이들을 새 소비자로 만들었다. 상류층만 향유하던 미술을 일반대중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인상파의 공로다. 미술의 ‘미’자도 모르는 사람이 고흐의 작품은 안다. 오, 러빙 빈센트!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