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그때 “이러시면 안 돼요”라고 말해야 했다

내가 웃어넘긴 수많은 순간들은 세상을 만드는 데 명백하게 기여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여성들을 그렇게 대해도 괜찮다는 확신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 지면에서 지금껏 나는 ‘일을 못한다는 것’의 긍정적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눈치 없이 툭 불거져 나오는 사람, 덜렁거리는 사람, 시킨 대로 잘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나는 삶의 대부분을 일을 못하며 살아왔지만, 그게 그렇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이 지면을 쓰면서부터는 더욱 그랬다. 일 못해도 괜찮다고, 어쩌면 일을 못하는 나 때문에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가끔은 일을 잘한 때가 있었다. 오늘은 내가 ‘일을 잘했던’ 순간들을 부끄럽게 고백하려고 한다.

얼마 전 SNS에서는 ‘#ㅇㅇ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가 돌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피해경험을 고백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성추행에 대한 폭로글을 읽고 나서 “술자리에서 손등에 입을 맞추는 중년남성 정도에는 솔직한 마음으로 화도 안 나게 되어버렸다. ‘아, 또…’라는 생각이 제일 처음 든다. 얼마 전에도 그냥 손을 빼고 웃어 넘겼다”는 트윗을 쓰다가 뒤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이러시면 안 돼요, 라고 했어야 했는데. 꼭 말했어야 했는데.”

나는 올해 서른 살이 되었다. 처음 내 손가락을 자기 입 안에 집어넣는 중년남성을 만났을 때는 19살이었다. 한참 울었다. 선배라는 사람이 따라 나와서 “네가 이해해라, 다시 들어가자”고 말했을 때는 더 많이 울었다. 살다보니 그런 경험은 더 늘어났다. 나 역시 나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들에게 적응을 해서 어떤 때는 화를 내기도 했고,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했고, 누군가를 발로 걷어찬 경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순간들을 ‘웃어넘겼’다.

가끔씩 나를 불편하게 하는 행동들을 제외한다면 괜찮은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피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을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 말라고 해도 멈추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불편했지만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나는 불편한 감정들을 마음 한편에 눌러놓은 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웃어넘김으로써 사람들은 편안했고, 일은 수월히 진행되었으며, 세상은 단단해졌다. 그런 순간에야말로 괜한 불평을 하지 않고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웃어넘긴 수많은 순간들은 세상을 만드는 데 명백하게 기여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여성들을 그렇게 대해도 괜찮다는 확신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들 불편해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불편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누군가를 나처럼 그냥 웃어넘기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사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사는 세상이 공고하게 유지되도록 여러 번 내버려두었다. 심지어 나 자신을 그 가운데 두고서도 그랬다.

이 지면에서 일을 못해도 된다고 말한 이유는 사람은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업, 국가, 계급, 넓게 바라보면 역사 자체가 스스로를 돌아보려고 노력한 기억의 총합일 것이다.

연일 뉴스는 이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 대통령과 그의 친우를 이야기한다. 외신에는 그녀가 한국의 전통적 샤먼이라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그녀가 청와대를 마음껏 드나들고 연설문을 고칠 때 어떻게든 일을 진행시켜야 했던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그 모든 일들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일을 잘했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내가 사는, 내가 만들어낸 세상이 얼마만큼 망가져 있는지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망치를 들고 그 세상을 전부 깨뜨려버리겠다고 생각을 한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모든 것이 깨져나간 다음에야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제 꼭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능숙하고 매끄럽게 일을 잘하는, 붙임성 있게 웃어넘기고 뒤돌아서서 약간 우울해 하는, 그런 사람은 되지 않을 생각이다.

<이서영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