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가습기 살균제 잔혹사 “웬만해선 피해자가 아니다”](https://img.khan.co.kr/news/2016/08/31/khan_RM3jUR.jpg)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입은 가족들의 고통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피해자 가족과 환경·시민단체는 “정부의 피해자 판정 결과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엄격한 판정 기준이 피해자 가족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경남 합천 원경고 교장 정일관씨가 막내딸 여원이와 함께한 시간은 1999년 11월 29일부터 2000년 3월 17일까지 117일에 불과했다. 여원이가 태어났을 때 정씨는 전남 영광 영산성지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학교는 당시 정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대안학교여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정씨 부부와 6살·3살 두 아들, 여원이는 스티로폼 패널로 만든 조립식 건물을 사택 삼아 살았다. 겨울이면 쉽게 건조해졌고, 두 아들도 기침과 감기를 달고 살았다. 가습기라도 꾸준히 틀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오빠들이 천식과 비염, 폐렴으로 입원까지 했던 추운 겨울을 별탈 없이 자라는 듯했던 여원이는 백일을 갓 지난 3월 13일 느닷없이 심하게 기침을 하고 가래가 끓는 노인마냥 신음소리를 냈다. 동네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저녁에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정신을 잃었다. 전남대병원 응급실에서 폐에 관을 꽂자 새빨간 피가 쏟아져 나왔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여원이는 입원 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병원 측은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고, 소견서에는 ‘폐출혈’과 ‘급성폐렴’으로만 적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좀 더 정확한 사인을 알고 싶기도 하여 대학병원에 시신 기증을 제의했는데, 거절당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명인가 생각했습니다.” 아내는 갑상선 항진증을 앓는 등 온 가족이 고통을 떠안은 채 시간을 보냈다.
11년이 지난 2011년 8월 31일. 뉴스를 보던 정씨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산모 4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잇달아 숨졌다는 신고를 계기로 역학조사를 시작한 질병관리본부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산모 돌연사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정씨도 당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인체에 무해하다고 광고하던 옥시 제품이었다. 겨울 내내 가습기를 틀다 보니, 또 가습기 오염이 걱정돼 일주일에 1~2회씩 갈아주며 살균제를 사용했다. 아들들이 기침과 폐렴으로 고생했던 것도 우연이 아닌 듯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고 폐가 다 자라지 못한 갓난쟁이에게 얼마나 치명적이었을까 생각하면 아찔했다. 2012년 보건복지부가 1차 피해조사를 벌였을 때 정씨도 신청했다. 병원에서 의료 관련 기록을 쉽게 내어주지 않아, 자료 부족으로 ‘판정불가’ 처분을 한 차례 받았지만 보건복지부에 호소해 겨우 자료를 제출했다. 보건복지부는 폐질환 및 사망과 가습기 살균제의 연관 가능성에 대해 ‘가능성 높음’, ‘가능성 있음’, ‘가능성 낮음’, ‘가능성 없음’ 4단계로 분류했다. 여원이는 4등급, ‘가능성 없음’이었다.

8월 25일 서울 중구 주한영국대사관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 가족들과 시민단체 환경운동연합, 환경보건시민센터, 참여연대 회원들이 옥시레킷벤키저의 책임을 규탄하고 한국의 가습기 살균제 문제 해결에 영국 정부도 적극 나설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연합뉴스
폐 섬유화 증상 없으면 3,4등급 받아
등급 판정은 ‘가습기 살균제 폐 손상 의심 접수사례 조사 결과 보고서’에 등장하는 폐 섬유화(폐 조직이 딱딱하게 굳어 산소와 이산화탄소 교환 기능을 잃는 것)를 기준으로 삼았다. 폐 섬유화 증상이 명확하게 나타나면 1등급이나 2등급을 받았지만, 폐 섬유화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 3·4등급 피해자들은 피해자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의료지원을 받지 못하고 향후 옥시나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당시 1차 조사에 응한 361명 중 1·2등급은 168명뿐이었다. 3·4등급은 186명, 판정 불가는 7명이었다. 폐이식 수술을 받은 피해자도 3등급을 받았다. “집에만 있었던 여원이는 다른 요인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폐출혈이 있다면 최소한 폐 섬유화는 아니더라도, 이상이 생겼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잖아요. 이미 자란 폐의 경우는 독성물질과 접촉하면 딱딱하게 굳어지지만 100일이 안 된 아기의 경우 세포가 파괴돼 찢어질 가능성은 없었을까 생각해요. 똑같이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돼도 어떤 사람은 더 심하게 영향받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국민 건강을 위해서라도 폭넓게 연구하고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죽음에 등급을 나누고 ‘너는 피해자가 아니다’라며 배제해 버렸습니다.”
![[표지이야기]가습기 살균제 잔혹사 “웬만해선 피해자가 아니다”](https://img.khan.co.kr/newsmaker/1192/20160906_16_01.jpg)
갓난아기 여원이가 폐 섬유화가 아니라 그저 폐출혈이기만 해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폐 섬유화 현상이 일어났음에도 4등급 판정을 받은 피해자도 있다. 폐 섬유화가 급작스럽게 일어나지 않고 천천히 발생했다는 이유에서다. 2015년 10월 작고한 고 김천명씨(당시 67세)가 그 예다. 김씨의 딸 미란씨는 “나도 2011년을 생생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2008년 무렵 친정집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쓰는 것을 보고 편리하겠다 싶어서 김씨도 사용했다. 애경 제품이었다. 그러나 살균제를 사용한 이후 가습기를 틀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기침·가래가 나오고, 가스레인지 불조차 색깔이 푸른색이 아닌 붉은색을 띠는 것을 보면서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산모와 영아들의 연쇄사망 이유가 가습기 살균제라는 뉴스가 나오자 친정집으로 달려가 가습기 살균제를 모두 변기물에 쏟아버린 기억이 생생하다. 때는 늦었다. 2010년부터 잔기침을 하고 폐에 고름이 차는 증상을 호소하던 아버지는 2013년에는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았고, 2015년에는 끝내 의식을 잃었다. 김씨가 보건복지부에서 환경부로 이관된 3차 피해자 조사를 신청하고, 가습기 피해자 모임(가피모) 활동을 시작하자 아버지는 “나라에서 어차피 안 해 준다”고 했다. “포기하라”고 했다. 부정맥 등 심혈관 질환에 시달리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피해자 조사를 받는 과정도 녹록지 않았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가습기 살균제를 산 영수증도 없었다. 기억에 의존해 당시 집 도면을 그리고 가습기의 위치를 증언해 조사관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몸상태가 증거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결국은 아버지 말대로 됐습니다. 아버지도 4등급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제 기억은 뭐가 되나 싶어요. 암도 나이든 사람은 천천히 진행된다고 하잖아요. 4등급이라고 해놓고 이유도 알려주지 않아요. 대체 제 기억은 뭐가 되는 거죠.”
![[표지이야기]가습기 살균제 잔혹사 “웬만해선 피해자가 아니다”](https://img.khan.co.kr/newsmaker/1192/20160906_16_02.jpg)
3,4등급 중에서 추가 사망으로 논란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가피모)과 환경보건시민센터는 8월 19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잘못된 기준에 따른 정부의 3차 피해자 판정 결과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센터 측은 정부가 전날 발표한 3차 판정 결과를 보면 지원 대상인 1∼2등급(관련성 확실·관련성 높음)은 판정 대상(165명)의 21%인 35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비지원 대상인 3∼4단계(관련성 낮음·관련성 거의 없음)가 130명으로 대부분(79%)이다. 특히 정부의 건강 모니터링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는 4단계 피해자가 절반에 가까운 49.1%다. 판정 대상 중 사망자 46명의 결과만 봐도 1∼2단계는 37%인 17명, 3∼4단계는 63%인 29명에 이른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제한적인 기준만으로 엉터리 판정을 했다”며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섬유화증을 뜻하는 ‘특발성폐섬유화증‘에 가습기 살균제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입증이 없는 상태에서 3∼4등급은 판정을 보류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취지다. 보건복지부의 1·2차 조사 때에도 판정기준은 문제가 됐다. 가습기 살균제는 폐 이외에도 다른 장기기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정부의 판정 결과 발표 이후 3·4등급을 받은 사람 중에 추가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조사한 결과 천식, 폐렴, 심혈관 질환 등 가습기 살균제 사용 이후 나타난 건강이상 증세는 다양했다. 강찬호 가피모 대표는 “폐질환 외에도 호흡기질환 등에 대한 판정 기준을 빨리 마련하고 판정 절차를 속히 이행해 달라고 늘 요구해 왔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범주는 엄격하게 규정한 반면 기업의 책임은 느슨하게 규정했다. 환경부가 가습기 살균제 3차 피해자 판정 결과를 발표한 다음날인 19일 공정거래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 원료물질인 C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를 상품에 표시하지 않은 업체들에 대해 ‘사실상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 해당 물질의 인체 위해성이 입증되지 않았음으로 SK케미칼과 애경, 이마트 등 관련 업체들에 대한 징계 심의절차를 종결시킨 것이었다. 해당 물질은 환경부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이후 유독물질로 지정한 것들이었다. 공정위는 2012년 질병관리본부의 동물실험 결과를 판단의 근거로 들었지만, 국회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특위 간사인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공정위가 판단의 근거로 제시한 2012년의 질병관리본부 실험은 8월 17일 국정조사 때 질병관리본부 스스로도 그 문제점을 인정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보건학 박사이자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대표이사인 안종주 환경보건센터 운영위원은 “공해 및 시민보건 문제는 공해물질을 쏟아내는 기업의 이윤활동과 관련돼 있다. 판정기준을 엄격히 해 피해자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은 기업의 책임범위를 축소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문제는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가피모 강찬호 대표는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의료비·장례비 등을 추후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에 구상권을 청구해 받아내려고 재판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은 피해자만 1·2단계로 판정하는 행정편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5일 가습기 살균제 문제 해결 동참을 요구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주한영국상공회의소에 방문한 피해 가족들이 경찰에 막혀 건물 안에 들어서는 것을 저지당하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주한영국상공회의소 대표는 휴가를 내고 이날 자리를 비웠으며, 서울 종로경찰서는 "다른 사무실도 있는 민간 건물인 만큼 입장은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건물에는 주한영국상공회의소, 김앤장 등이 입주해 있다. / 박은하 기자
“피해자 축소는 기업 책임 축소하는 것”
책임의 회피와 피해의 축소는 국내에 한정되는 것만이 아니다. 지난 1월 검찰의 가습기 살균제 특별수사팀은 영국에 있는 존 리 옥시레킷벤키저 전 대표를 소환조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불구속 기소했다. 정일관씨 등 가피모 회원들은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국회의원들과 함께 영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국회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특위는 지난 23일 레킷벤키저의 라케시 카푸어 CEO(최고경영자)를 만나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한 본사의 개입 여부와 독성 실험 결과 은폐 의혹 등을 묻고,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도 요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레킷벤키저 측은 일체의 면담을 비공개로 진행할 것을 요청하고, 공개 사과도 거부해 특위의 영국 방문은 취소됐다. 우원식 국회 가습기 특위 위원장(더불어민주당)은 “영국 본사인 레킷벤키저가 내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특위의 방문에 언론 비공개를 요청한 이유는 영국 정부의 요청사항”이었다면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은 국적을 떠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국회의 활동이 영국 정부에 의해 가로막힌 것이라면 매우 유감스러운 사태”라고 비판했다. 가피모 회원들과 환경보건시민센터, 참여연대 등은 8월 25일 주한 영국대사관, 유럽상공회의소, 영국상공회의소 등을 돌며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주한 영국대사관에서는 문 밖에서 항의서한 및 사과 요구, 면담 요청 서한 등을 전달했다. 서울 종로구 영국상공회의소에서는 김앤장 등 다른 기업들도 밀집한 민간건물이라는 이유로 입장하지 못하도록 제지를 당했다.
오는 8월 31일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지 5주년을 맞는다. 정일관씨는 “딸과 함께 보낸 시간은 극히 짧고 세월이 여전히 흘렀는데도 다시 딸을 생각하니 참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정지용의 시 ‘유리창’마냥 ‘물 먹은 별’이 눈에 비치는 듯했다. 김미란씨는 “4차 조사 때 접수 마지막 날에 어머니까지 신청했다. 어머니는 심혈관계 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각자의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판정기준과 개별 소송과 재판에 의존한 구제절차, 정부의 소극적 대응 등으로 피해의 규모도, 최소 사망자의 수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강찬호 대표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판정 문제만 하더라도 기업이 가습기 살균제라는 물건을 만들고 팔 때나 소비자들이 그것을 이용할 때는 엄격한 가이드 라인이나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피해를 입증하고 책임을 물으려 할 때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한다”며 또 다른 ‘이중기준’이라고 꼬집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사회가 돌이켜봐야 할 지점이 많다는 의미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피해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특위를 중심으로 29일부터 9월 1일까지 청문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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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