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조선업 몰락]한계기업 구조조정 도약의 발판으로

4·13 총선 이후 논의 급물살… 복지·실업 정책 등과 연계해야

10명을 고용해 물건을 만들어 파는 회사가 있다고 가정하자. 기술도 없고 경영도 부실하다. 이익을 내기는커녕 직원들 월급을 주기도 벅차다. 월급은 툭하면 밀리고 은행에 진 빚은 회사를 설립할 때 들어간 종잣돈(자본금)을 훌쩍 넘어섰다. 월급도 제대로 못 주면서 직원들을 하루 10시간 넘게 일을 시켜야만 이자를 갚아가며 간신히 회사를 유지할 수 있다. 무리하게 일을 시키다 보니 관리자가 직원들에게 막말과 욕설을 하는 일도 허다하다. 이런 회사라도 망하면 10명은 실업자가 된다. 하지만 이 회사를 억지로 유지시키는 것이 최선일까. 이 회사 때문에 경쟁사 역시 직원들 월급을 올리지 못하고 물건을 최저가로 팔아야 하는 것 아닐까. 실업자가 된 직원들은 실업급여와 직업교육으로 보호하고, 직원들을 제대로 대우할 수 있는 회사만 살아남도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 경제가 직면한 물음들이다.

이익이 나도 은행이자도 못 내는 기업
한계기업은 ‘이익을 내도 은행 이자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기업’을 말한다. 간신히 살아있다고 해서 ‘좀비기업’이라고도 불린다. 한계기업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2014년 4월 부터다. 한국은행은 ‘금융안정보고서’를 발표해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이익을 갚아야 할 이자로 나눈 ‘이자보상비율’(영업이익/이자비용)이 100% 미만 상태가 3년간 이어지고 있는 기업이 2009년 2019개에서 2012년 2965개로 늘었다고 밝혔다. 조사 대상은 건물과 토지 등 자산이 100억원이 넘는 등의 요건을 갖춰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하는 기업들이다. 한계기업이 외부감사 대상 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10.2%에서 15%로 높아졌다. 한국의 기업 10곳 중 1곳 이상이 돈 벌어 빚도 갚지 못하는 부실상태라는 의미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20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국회의원 당선자 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15년 중소기업 신용위험평가 결과’에 따르면 올해 구조조정 대상(C·D등급)으로 선정된 중소기업은 총 175곳으로, 작년(125곳)보다 40%(50곳)나 급증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한 해 세 차례나 신용위험평가를 통해 한계기업을 정리했던 2009년(512곳) 이후 가장 큰 규모다.

한계기업이 만연한 까닭은 한국 경제의 고질적 문제였던 원·하청 구조와 2008년 금융위기의 영향이 크다. 중소기업이 독립된 기술을 갖지 못하고 대기업의 하청화되면서 노동조건이 나빠진 상태에서 금융위기 등으로 대기업이 물량을 끊거나 해외로 이전하면 여건이 나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역시 방만한 경영으로 한계상황에 몰리기도 한다. 지난해 희망퇴직을 받은 두산인프라코어가 대표 사례다.

기업 간 매각, 인수·합병 등을 통해 부실기업이 정리되기도 한다. ‘시장 자율에 의한 구조조정’이다. 이 경우 채권단이 부실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주로 담당한다. 그러나 채권단은 단기적 원금 회수에만 급급한 데다 책임 떠넘기기 공방을 통해 적절한 구조조정 시기를 놓친다는 단점이 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을 살리는 ‘산업 구조조정’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2분기 3조318억원의 영업손실을 냈지만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부실규모도 파악하지 못했다.

반면 정부 주도의 기업 구조조정은 ‘대마불사’의 신화만 만들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정부가 일자리 감소 등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해 구조조정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기업이 도산 직전에 이르면 공적자금을 투입하거나, 부도가 나면 ‘빅딜’ 형태로 다른 기업에 매각시켜 살리는 방식이 ‘버티면 된다’는 나쁜 신호를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정부 주도는 ‘대마불사’ 그릇된 인식 불러
4·13 총선 이후 ‘한계기업 구조조정’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노동개혁과 더불어 정부·여당에서 지난해 말부터 추진했던 과제이기도 하다. 노동개혁과 달리 야당이 협조적 자세로 나오고 있다. 한계기업 정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더민주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4월 20일 당 회의에서 “근본적 구조조정이 실질적으로 이뤄지지 않고서는 경제의 중·장기적 전망이 밝지 않다”며 “더민주도 협조를 아끼지 않을 테니 정부가 심사숙고해 제대로 된 청사진을 제시해 달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기업의 단기적 생존을 위해 돈을 더 투여하는 식의 사고가 팽배해 있는 것 같은데, 이 점을 각별히 유의해 달라”며 ‘땜질식’ 지원에는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대량실업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실업문제를 자연히 해결할 수 있는 조치를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며 “실업기간 생존의 문제나 다른 업종으로 전업할 수 있는 교육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장선 총무본부장은 “비대위에서 현대상선의 실례를 들어 여러 차례 구조조정을 논의한 뒤 김 대표가 실업대책을 포함한 제안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도 “‘문제는 경제다’라는 우리 당의 뜻에 부응해 국민의 평가를 최소한 반영할 수 있는 법을 논의하도록 하겠다”며 “우리나라 경제체질 구조조정을 위한 법이 논의될 수 있겠다”고 가세했다. 한계기업 정리의 필요성에 공감하되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량해고 등의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4월 1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팔래스호텔에서 열린 한국경제설명회에 참석해 발표를 한 뒤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구조조정을 넘어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안 대표는 이날 당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김종인 대표의 구조조정 언급에 대해 “구조조정을 넘어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박근혜 정부의 미시적 구조조정 정도가 아니라 거시적 관점에서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경제가 굉장히 힘들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 대표는 특히 청년실업 문제를 강조했다. 그는 “청년고용촉진법 등 청년실업 대책과 관련한 합의를 할 수 있는 법안들에 대해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결심을 촉구한다. 협조해 달라”며 “청년 일자리를 늘리는 한편, 창업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청년창업 지원과 공정시장 만드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당은 원칙적으로 동의하되 부실기업의 책임이 협력기업과 노동자에게 전가돼선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의당 한창민 대변인은 22일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정부와 여야 정치권은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사태가 불러온 사회적 갈등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기억해야 한다”며 “노동시간 단축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해고의 최소화 노력은 당연하고, 사회안전망 확충과 실효적인 실업대책은 기본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쌍용차 사태는 2009년 경영난을 겪고 있던 쌍용차가 법정 관리를 신청하고 대량 정리해고를 단행해 발생했다. 노조의 공장 점거 파업을 용역과 경찰특공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대적 갈등이 벌어졌고, 대량해고 이후 해고노동자들의 자살과 각종 질환에 따른 사망이 이어져 모두 28명이 숨졌다. 이 사건으로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2010년 한진중공업이 경영난을 이유로 생산직 직원 400여명에 대한 희망퇴직 계획서를 통보하자 노조가 이를 철회시키기 위한 총파업에 돌입하며 불거졌다.

실업급여 등 두꺼운 사회안전망 확충, 신성장동력 발굴, 잠재력 있는 기업 지원, 직업교육 기회 확대 등이 병행돼야만 ‘한계기업 퇴출’이 혁신과 재도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인식을 야당들이 공유하고 있다.

정부는 한계기업 퇴출과 서비스법·노동개혁법을 연계시키고 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1일 “구조조정으로 우려되는 실업에 대해 기존의 법적 보호장치가 있다”면서도 “필요하면 기존의 법 이외의 추가 대책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유 부총리는 그러면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서비스법)과 노동개혁 4법도 일자리 창출을 촉진하기 때문에 입법이 되면 구조조정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